[특별기고]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을 보내며
[특별기고]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을 보내며
  • 김형철 예비역 공군 중장·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 공동대표
  • 승인 2020.07.27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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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평양 동쪽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백선엽 장군. 만주군 중위로 해방을 맞은 백선엽은 평양으로 돌아와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1950년 10월 평양 동쪽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백선엽 장군. 만주군 중위로 해방을 맞은 백선엽은 평양으로 돌아와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2020년 7월 10일 100세 노장 백선엽 장군이 운명하셨고, 그 하루 전인 7월 9일 3선의 서울 시장 박원순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의 인생처럼 그들의 죽음도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도 달랐고, 역사의 평가도 극명하게 엇갈리게 되리라고 전망한다. 영웅은 죽어서 그 빛을 발한다. 백선엽 장군이 그러했다.

백선엽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자랐다. 7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학업을 계속해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이 되겠다는 꿈으로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해 9기로 졸업한 뒤 만주국 군 장교로 복무했다.

만주군 중위로 해방을 맞은 백선엽은 평양으로 돌아왔고, 동향인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후 1945년 12월에 월남했고, 당시 조만식 선생에게 함께 내려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한국 군 장교가 된 백선엽은 1950년 4월 대령 계급으로 1사단장이 되어 개성을 포함한 38선의 경비를 담당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1사단은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냈으나 결국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사단급 편제를 유지하면서 퇴각한 부대는 개성의 1사단, 춘천의 6사단 그리고 강릉의 8사단 정도였다.

영웅을 만드는 국가와 죽이는 국가

1사단은 학도병과 신병들을 계속 보충 받아 한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으로 많은 방어작전에 주력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악화되어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했고 그 와중에 병사들 속에 섞여 퇴각하던 백선엽은 북한군의 추격으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이런 후퇴와 재편 과정 속에 그는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1950년 8월 1일 낙동강 유역까지 밀린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당시 미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은 “여기서 더 물러날 곳은 없다. 죽든지 방어하라”는 의미의 “Stand or Die”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낙동강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백선엽 사단장이 지휘한 다부동에서 벌어졌다. 일진일퇴가 거듭되던 다부동 전투에서 8월 20일 11연대 1대대가 후퇴하자 증원되었던 미군도 철수하겠다는 보고를 받고 백선엽 사단장은 권총을 들고 쫓아가 후퇴하던 한국군 장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지금 생각하면 사단장으로서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백선엽 준장은 사단장이었지만 그의 나이 이제 갓 30세였다. 30세의 청년 백선엽은 그렇게 대한민국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해 냈다.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고 백선엽 장군 안장식 / 연합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고 백선엽 장군 안장식 / 연합

그후 백선엽 장군이 지휘한 1사단은 평양에 최초로 입성해 김일성 집무실에 1사단 지휘소를 차리기도 하였는데, 백선엽 장군이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곳 지리에 밝았던 것이 평양전투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소강 상태를 보이던 1951년 12월에서 다음해 1월까지 백선엽 장군은 빨치산 토벌전 태스크포스를 지휘해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고 1953년 1월 31일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으로 진급해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를 새롭게 열었다.

이처럼 백선엽 장군은 구국의 영웅이었다. 30세의 청년이 권총을 빼들고 자신의 부대보다 서너 배 많은 북한군을 향해 돌진하지 않았다면 그의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져 낙동강 전선은 무너졌을 것이고,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은 일본으로 후퇴해 망명정부를 세웠겠지만 대한민국은 거기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사실 백선엽은 만주국 중위로 1943년 간도특설대에 보임되어 2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복무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부터 당시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김일성, 강건, 김광협, 최용건 등이 가담한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 소속 게릴라 부대를 주로 상대하며 여러 차례의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급장교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되기 전인 1940년에 이미 김일성 및 만주빨치산파 독립운동가들은 토벌을 견디다 못해 동북항일연군을 빠져나와 소련 연해주로 망명해 소련군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백선엽 중위가 실제로 독립운동가들을 맞상대할 일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간도특설대가 상대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은 대부분 후일 북한 정권을 수립하거나 북한군의 주력이 된 세력들이었다. 따라서 백선엽 장군의 중위 시절 복무활동을 가지고 친일로 몰아 세우는 것은 좌파세력의 영웅 흠집내기일 뿐이다.

백선엽 장군은 그가 위관 시절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회고록에도 담았으며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백선엽 장군을 더 이상 박원순 같은 이중인격자와 비교하는 것은 죄스러울 따름이다.

미국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들이 대통령이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1789년 미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남북전쟁에서 북군 사령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은 1869년 미국 18대 대통령이 되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물리치고 자유세계에 승리를 가져다 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 1953년 34대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고 80여 년 간격으로 전쟁 영웅이 대통령으로 탄생된 것이다. 전쟁 영웅이니까 대통령이 되었다기보다는 전쟁 영웅이 국가를 이끌어가도록 한 미국이니까 세계 제일의 국가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조지 워싱턴은 1752년 20세의 나이에 영국군에 입대해 영국 군인이 되었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 누구도 조지 워싱턴이 영국군에 복무했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친영파라는 논리를 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미국편을 들었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이 영국군으로 복무하며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실은 흠결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미국은 그를 총사령관으로 선출했고, 그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켰으며 미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 사령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랜트 장군은 웨스트 포인트 출신의 장교였지만, 미 육사 졸업 성적도 시원치 않았고 장교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 대위로 전역한 인물이다. 전역 후 그의 부친이 운영하던 가죽상회에서 잡무를 보던 그랜트에게 남북전쟁은 인생 반전의 기회였다.

남군에게 패배만 하던 북군에게 최초의 승전보를 가져다 준 지휘관이 그랜트였고,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링컨 대통령은 주위의 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그를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해 결국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북부 워싱턴 정가의 귀족주의를 물리치고 그랜트를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은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링컨 대통령의 공정심과 그의 집념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짧은 역사 속에서 영웅을 키우고 배출해 냈으며 그 영웅은 또 국가를 위해 무한 봉사를 하면서 국가를 발전시켜 왔다.

미국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영국을 대상으로 한 독립전쟁 당시 ‘왕당파’라고 불리는 일부 세력의 행동이다. 이들은 독립전쟁을 모국(영국)에 대한 반란으로 여기면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가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평화적 해결책을 찾지 않고 어떻게 동족끼리 싸움을 하느냐고 하면서 이에 반대했었다. 소위 ‘왕당파’가 전체 미국 인구의 1/3 정도였는데 그들은 1776년 독립선언 이후에도 미국보다는 영국을 편들기 일쑤였다.

최근 백선엽 장군에 대한 비하 발언을 쏟아 내고 있는 노영희 변호사와 김원웅 광복회장의 망동을 접하면서, 미국 역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가운데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많은 방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민족’을 ‘국민’보다 우선시하고 자신과 뜻이 다르면 누구든지 흠집을 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이란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에 대해 죽음으로 맞섰던 것이고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도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내했던 것이다. 좌우를 떠나 우리 국민 모두는 ‘우리 민족에게 총을 쏜 사람’은 김일성이란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빼어 닮은 백선엽 장군

백선엽 장군의 삶과 죽음은 이순신 장군을 빼어 닮았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고 훈련과 새로운 병기 개발에 몰두했다. 그래서 1592년부터 1598년 사이에 벌어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제해권을 유지해 적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혁혁한 공에도 불구하고 그를 끊임없이 모함한 사람들로 인해 삭탈관직되어 하옥되고,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에게 씌운 죄목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해 꺼려함이 없는 죄 등 다수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모함해 해임시킨 후 그 자리를 꿰어찬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하자 선조 임금은 이순신을 복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원균이 수군을 전멸시키고 남긴 전함은 불과 12척이라,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린다. 今臣戰船 尙有十二(금신전선 상유십이),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사오니,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의미의 보고를 선조 임금에게 올리고 명량해전에서 13척의 전함으로 적함 133척을 맞아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1598년 퇴각하는 일본군을 끝까지 추격하며 섬멸하던 이순신 장군은 적의 유탄에 맞아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셨으니, 노량해전이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선조 임금은 조선을 도와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의 은공으로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고, 그를 이끌어낸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이라고 공치사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공도 전쟁이 끝난 6년 후에나 평가해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했다. 이후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가 계속되어 인조 21년 1643년에는 ‘충무’ 시호를 내림으로써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이 되었고, 정조 17년인 1793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백선엽 장군 역시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공훈을 세우셨다. 다부동 전투는 6·25전쟁의 결정적 작전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한 최대의 전투였고 백선엽 장군은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다. 6·25전쟁을 통해 한미동맹을 이끌어낸 백선엽 장군은 미군들도 전쟁 영웅으로 호칭하며 각별히 예우한다. 백선엽 장군 서거 후 전직 주한미군사령관들의 추모사가 이어졌고, 현직 주한미군사령관은 물론 주한 미국대사도 빈소를 찾아 장군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으며 생전에 장군을 우러러뵈며 무릎 꿇고 찍은 사진을 꺼내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최고의 군인으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구한 백선엽 장군은 구국의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 좌파들이 씌운 친일 프레임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셨고, 사후에는 6·25전쟁 전우들이 묻힌 국립 서울현충원이 아닌 대전현충원으로 모셔져야 했다.

베트남의 민족지도자 호치민이 베트남전 기간 중 1969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남북 베트남이 1주일 간의 휴전을 갖고 남북이 모두 호치민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2020년 7월 대한민국의 영웅을 보내는 길은 한줌도 안 되는 세력들의 목이 터져라 외치는 친일 왜곡으로 인해 갈가리 찢겨졌다.

그러던 중 천만다행인 것은 장군이 서거하자 젊은 청년들이 스스로 광화문에 시민 분향소를 설치했고, 비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에 의한 추모의 물결이 넘쳤다는 사실이다. 별은 밤에 빛나는 것과 같이 영웅은 국가가 어려울 때 빛을 발한다. 스러져 가는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정신을 장군은 다시 한번 혼신의 힘으로 일깨워 주고 떠나셨다.

우리는 장군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가 원했던 바와 같이 6·25전쟁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들과 함께 묻히실 수 있도록 서울현충원으로 모셔오거나 또는 그가 30세 나이에 목숨을 걸고 지켜낸 다부동으로 모셔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로 원수 계급을 드림으로써 그에 합당한 예우를 갖춰야 한다. 생전에는 못해드렸지만 사후에라도 우리는 반드시 도리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킨 대한민국의 국권을 계속해 지키는 것이다. 이제 장군이 떠난 대한민국을 누가 지켜야 하겠는가?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 등 국가만을 생각했던 영웅들은 떠나고 대한민국에는 종북좌익 세력들만이 보이고 있다.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반대파들을 탄압하고, 불법과 부정을 서슴지 않으며, 낮은 단계 연방제를 거쳐 고려 연방제로의 남북 연합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박정희와 같은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백마 타고 우리 앞에 나타날 영웅은 더 이상 없다. 이제 이 나라를 지켜야 할 사람은 손에 든 흰 국화를 백선엽 장군의 영전에 바쳤던 우리이고 바로 당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당히 외쳐야 한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고.

김형철

예비역 공군 중장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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