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압록강 以北 긴급추적권 不許
워싱턴, 압록강 以北 긴급추적권 不許
  • 미래한국
  • 승인 2006.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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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共軍, 이를 알고 韓半島 ?兵
▲ 정일화 미래한국신문 편집위원
맥아더를 기리며 <28> 정일화 鄭逸和·편집위원美 7함대, 대만해협에서 國府軍의 本土공격 저지 당시 워싱턴의 理念성향 혼미, 맥아더 報告 무시 일쑤그렇다면 미 육군이 한·중 국경지대를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미 공군은 압록강의 한반도 영토 이상을 절대로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 수풍발전소와 기타 발전시설은 절대로 미 공군이 공격할 수 없다는 결정을 중공군은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맥아더만 모르고 긴급추적권을 염두에 두고 “중공군이 넘으면 살육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맥아더는 그의 회고록에서 압록강 다리를 국경선을 넘지 않고 파괴하려다 적기에게 피습당해 죽어가는 한 공군조종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워싱턴의 비상식적인 긴급추적권 박탈사건을 비판하고 있다. 그 조종사는 “사령관님 도대체 워싱턴은 적 편입니까, 우리 편입니까”라고 말하면서 죽어갔다.미군이 아무리 진격한다 해도 국경지대까지 올라오지 않는다면 중공군은 편안한 마음으로 압록강을 넘을 수 있는 것이며 수풍댐이 절대로 공격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속에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대만 공격을 위해 총집결해 있던 화남지방의 제4야전군이 어떻게 대만공격을 포기하고 일시에 동북지역으로 올라왔는지에 대해서도 적잖은 의혹이 있다. 한국전이 터지자 워싱턴은 태평양함대 사령부 소속 미 7함대의 정예 함대를 대만과 중국 사이에 긴급배치했다,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대만군이 중국을 쳐들어갈지 모르며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대만은 7함대가 대만해협에 완충군으로 배치되는 것을 보면서 본토침공에 대한 꿈을 접고 대신 3개 사단을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대만의 이런 제의를 거부했다. 대만군이 한국전에 뛰어들면 중공군의 한반도전 개입의 정당성을 제공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중공군은 7함대가 대만해협에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대만해협 쪽에 집결해 놓은 50만 병력을 대거 만주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이들이 나중에 모두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에 뛰어 들었다. 7함대는 결국 모택동군으로 하여금 대만군의 본토침공가능성을 제지하는 확실한 보증이 되었고 그 결과 임표의 제4야전군은 만주로 이동했던 것이다.1950년 당시의 워싱턴 사정은 색깔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아직 소련과는 동맹관계를 형식적이나마 유지하고 있었고 모택동의 중공에 대해서도 이들을 공산주의정권이기 보다는 민족주의 정권으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 더군다나 모택동이 몰아낸 장개석군은 부패정권으로 너무 많이 언론에 오르내려 미국인들의 신뢰를 많이 잃고 있었다. 심지어 맥아더의 동경 사령부는 중공군에 대한 정보를 대만군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면서 동경 사령부가 보내는 중공군 정보를 워싱턴은 무시하기도 했다.
미 국무성의 상당한 관리들도 중공 쪽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부터 중공을 공산 정권이기 보다는 민족주의 정권으로 봐야 하며 미국과 소련이 결국 심각한 대치상태로 가게 될 때 중공을 소련 견제역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국무성을 둘러싸고 있는 상당수 진보 지식인들은 그런 식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보다 못한 매카시 상원의원은 1950년 2월 국무성과 국방성에 공산간첩이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1953년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었을 때 매카시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로버트 스티빈스 육군장관을 고발하는 등 국무성과 국방성의 많은 관리들을 조사위원회에 소환했다. 당시의 워싱턴 분위기는 그만큼 분홍색이 짙게 깔려 있었다.이때쯤 워싱턴에는 뒤에 소련으로 탈출한 소련간첩 도날드 맥클린, 가이 버지스, 킴 필비 등이 영국외교관 신분으로 국무성과 국방성을 들락거렸으며 이들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왕성한 간첩활동을 한 것이 뒤에 밝혀졌다. 맥클린은 워싱턴 영국대사관의 원자력정책담당관이었으며 버지스는 2등서기관이었다. 이들 두 외교관은 워싱턴 주재 영국정보책임자로 와 있던 이중간첩 킴 필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필비가 이중첩자로 밝혀진 것은 한참 뒤인 1962년으로 그가 런던에서 갑자기 사라져 이듬해 모스크바에 나타났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미스테리를 안고 있는 필비 사건의 주역이 바로 이 필비이다.모스크바 간첩단과 중공군 개입이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어쨌든 중공군은 맥아더의 예상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1차로 20만 대군을 한반도에 투입했으며, 유엔군의 배치와 압록강지역에 대한 워싱턴의 정책 방안 등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강을 건넌 지 1주일이 채 안 된 10월 25일에는 국군과 전투를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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