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軍, 中共軍의 人浿전술·유격전술에 敗退
韓美軍, 中共軍의 人浿전술·유격전술에 敗退
  • 미래한국
  • 승인 2006.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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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를 기리며 <30> 정일화 鄭逸和·편집위원
맥아더 사령부는 거듭되는 중공군 잠입의 정보에도 불구하고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보급문제였다. 50만 군대가 이동하려면 긴 보급행렬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중공군은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고 달구지도 보이지 않았으며 도보 보급부대도 이렇다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는 보급부대 없는 군 이동은 없다는 이론을 갖고 상당기간 동안 중공군의 대거유입 정보를 인정하지 않았다. 10월 18일 넘었다고 적고 있는 서부전선의 4야전군 병력만도 4개 군단 12개 사단으로 병력수는 약 15만이었다. 국군이 주로 북진하고 있던 동부전선은 3야전군 산하의 3개 군단 병력 4만 명이 투입되고 있었다. 전투가 진행되면서 후속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었는데 1차로 30만 정도의 전투병이 들어왔다. 워커 중장이 지휘하고 있던 서부전선의 미 1군단과 한국군 2군단 병력은 6개 사단에 총 6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총병력으로 따져 유엔군 병력과 중공군 병력은 처음부터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중공군이 우세했다. 중공군은 처음부터 “미군은 6대 1로, 한국군은 3대 1의 병력우세를 확보한 후 싸움한다”라는 전쟁지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이나 한국군은 중공군과 싸움이 붙었다 하면 6배 또는 3배의 병력과 맞붙지 않을 수 없었다. 홍학지의 회고록은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가 어떻게 “귀신 같은 병력운용을 했는지”를 소상히 기록해 놓고 있다. 팽덕회는 북경에서 날아오는 전문과 당시 한국전쟁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소상히 보도하고 있던 UPI통신을 이용해 전투를 벌일 때마다 “모자라는 병력을 잘도 긁어모아 월등한 병력구성을 했다”는 것이다. 중공군과 유엔군은 모든 지역이 언제나 6대 1 또는 3대 1의 우세를 유지하지 않았을지라도 일단 전투가 벌어졌다 하면 팽덕회는 중공군은 월등한 수적 우위를 확보한 후 대응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직 미군이나 한국군은 중공군이 들어와 있는지 조차도 잘 모를 때에 상대방인 중공군은 워싱턴이나 런던 또는 동경으로부터 날아오는 간첩들의 정보와 공개 제1주의로 나가는 언론보도를 갖고 정확히 6대 1 또는 3대 1의 월등한 병력운용을 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미군 1명을 상대하는 데 중국인 6명을 희생하겠다는 것이고 한국군 1명에게는 중국군 3명을 희생할 각오로 싸운다는 것인데 일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중국으로서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전략을 구상했던 것이며 그 전략은 결국 맞아 떨어져 중국식 표현대로 ‘2차대전의 승리자이며 천하무적인 미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한 사정이란 어떤 것인가. 중국의 공식적 해명은 미군 같이 강력한 무기를 가진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월등한 병력을 투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인데, 실제 내용을 보면 중국공산당은 당시 무기는 몰라도 전쟁에 던져 넣을 사람은 얼마든지 소모할 수 있는 자원이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중공군은 무기를 갖지 않은 채 고함소리나 북을 치는 임무를 갖고 공격하다가 기관총에 마구 맞아 죽는 경우가 많았다. 수류탄 2개만 들고 덤벼다가 그 수류탄을 던져 버린 후 맨몸으로 달려드는 것은 다반사였다. 미국인 한 명에 중국인 6명, 한국인 한 명에 중국인 3명을 희생시킬 각오로 싸우겠다고 처음부터 설계했다는 것은 정말 인도적 견지로나 전략상으로 있을 수 없는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사정이 틀림없이 그랬고 거의 공식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홍학지의 전쟁회고록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중공군은 전투에 들어가면서 애국심을 무척 강조했다. 지휘관들은 시간 있을 때마다 미군을 맞아 싸우는 것이 조국의 명예와 이익을 지키는 것이며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를 귀가 따갑도록 설교했다. 모택동과 팽덕회의 전쟁 제1지침이었다. 당시 한국전에 투입된 중공군의 구성은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 장개석의 국부군에서 싸우다가 모택동 군대에 항복했거나 패배한 부대의 출신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공산당 식으로 생각한다면 언젠가 제거해야 할 인물들이었다. 전쟁에 내보내 조국의 영광을 위해 죽으라는 말보다 이들을 더 잘 대접할 일이 있겠는가. 어쨌든 1950년 10월 말쯤에는 청천강 이북의 북한땅에는 적어도 30만 중공군이 우글거리기 시작했으며 이런 중공군은 한때 1백만 수준으로 북한에 주둔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소위 항미원조전(抗美援朝戰)을 수행했다. 미국에 항거하고 조선을 돕는다는 것이다. 홍학지의 회고록이나 중국의 조선전쟁 공간사 같은 것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거의 이해 할 수 없었던 내용 중의 하나는 아무리 인해전술(tactics of human wa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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