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1개 연대가 중공군 3개 사단 공격 저지
국군 1개 연대가 중공군 3개 사단 공격 저지
  • 미래한국
  • 승인 2006.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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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를 기리며 <34> 정일화 鄭逸和·편집위원
항복한 200만 國府軍 소모 차원 人浿전술 작전中共軍, 대포·항공기 공격 피하기 위해 山에 불질러중공군의 무모한 용기는 두 가지 면으로 분석될 수 있다. 첫째는 중공군은 원래 게릴라전 초기나 만리장정 시절부터 무기로 싸우기 보다는 정신으로 싸웠으며 낮보다는 밤에 싸웠고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전투하는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장개석군과 싸울 때도 처음에는 모택동군의 무기가 형편없었으며 싸우다 보면 장개석 군대의 무기를 빼앗아 결국 모택동군의 화력이 우세해 마지막 승리를 했다. 그러니까 중공군은 처음부터 무기 없는 부대로 출발했고 어떤 일이 있어도 결국 승리한다는 용기 하나로 싸웠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공군에게는 처음부터 무기가 없는 것이 사기와 무관했으며 밤은 낮으로 알고 적을 마구 놀라게 해 공격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죽음으로 무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공군 수뇌부의 철저한 인명경시현상의 결과라는 것.모택동은 중국 내전 결과 적어도 200만 장개석군을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항복군으로 받은 것이다. M1, 칼빈, 45구경 권총, 105mm포와 같은 미제무기도 그대로 접수했다. 사단편제를 국부군 시절 그대로 두고 중공군에 편입한 경우도 있었고 국부군 포로를 중공군 사단에 분산 배치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공산당의 철저한 감시감독 아래 두었다. 한국전에 중공군이 참전하기로 결정하면서 공산당은 각 성에 모병할당을 했다. 지원병을 모집하되 어느 지역에서는 얼마를, 다른 지역에서는 또 몇 만 명을 모병해 올리라고 할당제를 실시했다. 모택동은 “우리에게는 무진장한 인력이 있다”는 말을 많이 했다. 전선에 투입할 인원은 얼마든지 던질 수 있다는 말인데 던져지는 이 병력은 고귀한 인명이라는 개념보다는 던져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특히 장개석을 따라 다니던 군대가 200만이나 투항해 왔는데 이들을 전쟁에 동원해 인해전술 무기로 쓴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들은 혹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철저한 공산주의자, 또는 애국자로 인정해 줄 것이라는 희망과, 잘못했다가는 반동적인 장개석 군대 출신으로 낙인찍혀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무조건 공격대열에 가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중공군의 용감성이 전투경험에 의한 애국심의 결과이든 아니면 공산당의 인명경시풍조에 의한 무모한 투입의 결과이든 한국전에서 보인 중공군의 용감성은 밀번 같은 백전용장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임에는 틀림없었던 것이다. 운산에서 중공군은 마구 밀려 들었다. 당시 운산의 상황은 적의 형편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1시간, 1분, 1초 사이가 어떻게 진전될지 몰랐다. 얼마나 많은 중공군이 들어와 있는지, 이들이 정말 중국에서 들어온 모택동 군대인지, 아니면 인민군 6사단이나 5사단처럼 과거 모택동 밑에서 8로군으로 싸우다가 북조선이 서자 고스란히 부대 전체를 보낸 것처럼 나머지 조선인 군인들을 보낸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일선 지휘관들이 중공군 대부대라고 믿어도 8군이나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서 별다른 조처가 없는 한 그것은 그저 생각에 불과할 뿐이었다. 중공군 포로 심문 내용을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어 일선 사령관들은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25일부터 한국군 2군사령부 예하의 6, 8사단은 곳곳에서 무너져 내려 앉았다. 사단 규모의 전투가 일어난 것도 아닌데 대대 단위로, 또는 연대 단위로 움직였다하면 깨져 도무지 사단 규모의 방어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25일이 지나면서 워커의 8군은 1군단 우측 방어선인 한국군 2군단의 방어력이 바로 소실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면 미군 전투 군단인 미 1군단은 우측이 휑하게 뚫린 것이다. 우측이 뚫린 상태에서 만일 청천강을 따라 후면에 포위군이라도 스며들면 미 1군단 전체가 그물망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유엔군이 후퇴를 하더라도 한국군 1사단이 버텨줘야 후퇴라도 할 수 있는 처참한 지경으로 사태가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만큼 운산은 유엔군의 전체 운명과 관련되어 있었다.국군 1사단은 밀번의 매일 출근에 힘입어서인지 어쨌든 국군 2군단 전선과는 다르게 하루 하루를 잘 버텨갔다. 운산-북진-대유동-대동을 거쳐 수풍댐을 점령해야 한다는 명령서를 들고 매일 싸움터로 나갔다. 낮에는 운산을 약간 벗어나면서 전진을 하다가 밤이면 약간 후퇴하고 또 낮이 오면 전진하여 부딪치고 하면서 전투를 전개해 나갔다. 낙동강에서 평양까지 그리고 순천-숙천까지 어마어마한 속도와 전투력으로 달려온 부대의 경력에 비하면 이해가 안 될 만큼 성과가 부족했다. 인민군이든 중공군이든 거칠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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