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법적 개념조차 없다 
‘공영방송’, 법적 개념조차 없다 
  • 미래한국
  • 승인 2021.02.0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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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법상 KBS 이사는 방통위가 추천하면 대통령이 임명하고, 방문진과 EBS 이사

지난 1월 20일 방송통신위원회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주요 쟁점은 그동안 정치권에서 여야 합의로 공영방송 이사 나눠 먹기 관행이다. 현행법상 KBS 이사는 방통위가 추천하면 대통령이 임명하고, 방문진과 EBS 이사는 방통위가 임명한다. KBS 사장은 이사회가 추천하면 대통령이 임명한다. MBC 사장은 방문진이 임명하고 EBS 사장은 방통위가 임명한다. 하지만 정치권은 관행에 따라 여야 7대4, 6대3 등 비율로 공영방송 이사를 추천해왔다.

공영방송의 뿌리, 근대 계몽국가

야당 의원들과 언론노조는 한결같이 ‘공영방송’이라는 단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도대체 무엇이 공영방송인지,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들이 분분하며 무엇보다 공영방송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그 개념이 다르고, 따라서 설립과 운영의 방식이 다르다. 

원래 공영방송의 뿌리는 ‘국민들을 계도’하며 ‘국가에 통합’한다는 국민국가적 계몽주의에 바탕하고 있다. 따라서 민영방송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공영성’의 개념이 성립된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모든 방송이 다 ‘공영적’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전파자원의 국유성에 바탕한다.

역사적으로 영국의 BBC, 독일의 ARD, 일본의 NHK와 같은 대표적인 공영방송은 라디오 시절 원래 신문이나 잡지와는 달리 전파자원의 희소성과 공공성 때문에 ‘방송은 공익의 의무를 갖는다’는 개념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방송 초기에는 ‘공영방송’이라는 별도의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초기 방송사들은 순수 민간기업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율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견지하고 있었다. 유럽의 방송은 공공의 이름으로 국가의 운영과 통제의 대상이었고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방송을 파시즘의 선동무기로 활용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이 문제가 됐다.

이로부터 독일에서는 방송에 대한 국가개입의 제한과 ‘내부적 다양성’의 확보라는 자유주의 이념에 입각한 논의가 시작됐고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방송위원회의 구성과 사측-제작자간의 ‘편성규약’과 같은 내부 자율적 규범들에 대한 법적 보장이 이뤄져 왔다.

한국의 공영방송은 이러한 독일식 모델이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독일 ARD는 ‘아래로부터의 주권’ 즉 지방분권에 의해 설립된 로컬 공영방송들의 키 스테이션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공영방송을 감독하는 방송위원회가 다양한 시민들과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코포라티즘’적 국가구성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영국의 BBC와 일본의 NHK는 ‘국민주권’이라는 궁극적 상위의 가치에 통합지배된다. 다만 영국과 일본의 정치제도가 의회주의 내각을 취하고 있기에 공영방송들은 의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공영방송을 내세우는 이들이 아무리 정치적 독립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준조세인 수신료를 재원으로 하는 한 이들 공영방송은 결국 ‘국민주권’에 의해 제약되며 이는 정치적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공영방송의 혼란, 시청자 국민은 누구의 계몽 대상도 아니다.

20세기 들어 상업방송들의 출현 그리고 디지털 기술에 의한 전파자원의 희소성이 극복되면서 공영방송은 더 이상 ‘매체의 독점’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로부터 등장한 공영방송의 논리는 ‘사회통합’이었다. 즉 다양한 매체들이 다양한 가치들을 주장하게 되면서 중심과 변방, 주류문화와 하위문화 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이에 따른 가치 상대주의가 만연하게 되면 사회는 통합이 어렵게 된다.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사회적 콘센서스가 없다면 이는 한 국가의 정치적 분열과 주권의 위기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로부터 새로운 공영방송의 필요성은 ‘사회통합’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문제는 그러한 통합을 실현하려면 자유 민주사회에서 피할 수 없이 정치적 가치들에 대한 포섭과 배제의 결정이 이뤄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즉 사회통합을 자임하는 공영방송이라면 주권의 위임 결정자와 같이 상대주의 속에서 어떻게든 ‘옳은 것’을 방송에서 ‘결단’해야 하는 행위의 필요성이 요청된다.

만일 공영방송이 사회통합을 위해 갈등하고 대립되는 정치적 가치들에 대한 ‘포섭과 배제’를 할 수 없거나, 또는 하지 않겠다면 그것은 정치적 중립이나, 정치적 독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회통합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공영방송이 필요한가. 모두 민영방송이 되어서 각자가 옳다고 믿는 정치적 가치들을 주창하면 된다.

그러면 시청자인 국민은 선택을 할 것이고 선택받는 방송사는 그에 따른 각자의 수신료로 수익을 창출하면 된다. 따라서 야권과 언론노조가 주장한 ‘방송의 정치적 독립’은 한갓 허구적 수사에 불과하다. 정치적 독립을 하려면 먼저 강제적 수신료와 국민 세금의 지원에서 독립해야 하며 그들 스스로 종업원 지주제로 방송사를 설립해 찬동하는 국민들로부터 펀딩을 해서 하면 된다. 

왜 주제넘게 정치적 가치들이 모두 다른 국민들로부터 강제적으로 돈을 받아 광우병이나 세월호, 사드 문제 같은 이슈에서 자신들이 ‘善이라 생각하는’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결단해서 방송하겠다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로 현행 KBS나 MBC의 조직과 운영을 규정하는 법은 공영방송을 구현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KBS의 공정방송위원회나 MBC의 공정방송협의회 등 노사 간에 단체협약으로 약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공영방송의 내부적 자율제도는 우선 방송법적 사항을 노동법적 수단으로 달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방법론적인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국내 편성규약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사측 대표와 노측 대표가 동수의 위원으로 구성돼 편성위원회의 성격도 본래 법 제정 취지와는 성격이 다르게 노사협의체이다. 문제는 국내 방송사, 특히 공영방송사의 언론노조의 지나친 좌편향적 이데올로기다. 이런 정치적 노조가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 식 정치이데올로기’를 관철해 내겠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이념 노조의 ‘우리식 善의 결단’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그것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다. 공영방송이 국민의 수신료와 세금에 입각하기에 오로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사법부 독립처럼 공영방송의 독립을 주장하겠다면 그것은 공영방송이 ‘주권을 대리하는 국가권력’이 되겠다고 스스로 자임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주권의 대리 권력은 주권자의 일반의지인 법에 의해 규율되어야 한다. 즉 법원조직법처럼 공영방송법이 존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준조세화 된 KBS 시청료에 대한 일반인의 불만은 상당히 높다.
준조세화 된 KBS 시청료에 대한 일반인의 불만은 상당히 높다.

‘공영방송의 운영과 지원’이라는 법적 개념이 필요하다

공영방송은 법적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공영방송’이라는 법률적 개념도 없는 상태에서 ‘공영방송의 독립’이라는 법적 규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논의 자체가 연목구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공공의 자격에는 법적 규정이 필요하다. 
KBS, MBC, EBS가 공영방송이기에 공영방송의 권리와 책무를 일반의지화하겠다면 여기에는 먼저 ‘공영방송’에 대한 국민 일반의지의 규범이 요구된다. 공영방송은 무엇이며 그 재원과 조직은 어떠해야 하고 그 제작의 규범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점이 먼저 정의되어야 그 다음에 공영방송의 권리와 의무를 정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우리 방송법은 KBS는 한국방송공사법, EBS는 한국교육방송공사법과 같이 개별 방송공사법등이 존재하며 MBC, YTN과 같은 방송사들은 민간 자본도 함께 주주를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 아리랑TV나 국회TV, 국방TV와 같은 방송사들은 정부 산하 소속이다. 심지어 홈쇼핑에도 정부기금 출연의 ‘공영 홈쇼핑 TV'도 존재한다. 
서울시는 자체 방송도 한다. 이런 상태에서 도대체 무엇은 공영방송이고 무엇은

영방송이며 또 무엇은 민간방송인가. TV수신료를 재원으로 하는 경우 이 TV 수신료를 누구에게 얼마나 거둬 어떤 방송을 지원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바로 공영방송의 핵심적 의제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공영방송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TV 수신료의 이용을 결정하는 자가 해야 한다. 지금같이 KBS가 공영방송의 독자적 주체가 될 이유가 없다.

어떤 방송사든 공영성에 맞는 방송 프로그램을 하겠다면 이를 심사해서 수신료를 지원하면 된다. 그것이 오히려 공영방송의 가치를 방송사에서 콘텐츠로 옮기는 바람직한 결정이며 다매체, 다채널시대에 공영방송의 사회통합적 가치를 구현하는 데 있어 효율적이다. 그러한 ’공영방송에 대한 운영과 지원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수신료를 준조세 형식으로 걷고 있다. TV 수상기를 보유하면 수신료를 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신료를 내는 국민은 어떤 형태든 수신료를 재원으로 하는 공영방송이라는 매체에 주권을 갖게 된다. 즉 공영방송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주권자인 국민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국민주권의 행사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국민주권의 대의를 의회, 즉 국회가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국민주권은 대의되지 않는다. 

야당이 아무리 전원 일치로 방송법의 개정을 주장하고, 이를 국회에서 다수결로 표결한다고 해도, 그 표결에 대한 최종 심의와 결정은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과 공포권을 가진, 그리고 우리 헌법이 ‘국가의 원수’라고 규정한 대통령에게 있다. 그것이 민주 공화제의 정치적 원리다. 따라서 국민주권 행사의 최고 결정권자는 의회가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다. 그러한 대통령은 의회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국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따라서 야권의 방송법 개정안에 대해 그 최종 심의권자는 대통령이며 대통령이 이에 대해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헌법은 우리 대통령에게 국회가 발의하고 표결한 법안에 대해 ‘대 심문관’으로서 최종의 판단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야당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에 대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먼저 공영방송법이라는 전제되는 규범을 법률안으로 제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야권의 방송법 개정안은 ‘공영방송’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도 올바른 공영방송이 국민의 일반의지인 법의 개념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前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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