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뷰-미래한국 공동기획] 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中
[월드뷰-미래한국 공동기획] 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中
  • 박명수 서울신학대 명예교수 ·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21.02.1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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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조선의 인재를 키우다


김일성도 기독교 가문 출신이었다. 해방 후 김일성이 북한에 지도자로 나타나자 친척들은 그를 초청해 감사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잔치가 끝난 다음에 김일성은 동료들에게 “하나님은 일찍이 스탈린 원수가 쏴 죽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능글맞은 김일성은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지만 마음속에는 무신론적인 세계관이 가득했다. 조만식은 해방 후 북한 사회의 중심이었고 특히 자유를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그러했다. 해방 후 3·1절은 북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와 싸우는 날이었다. 원래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이날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북한 사회의 민주화를 기원하고 예배를 마친 다음에는 조만식이 갇혀 있는 고려호텔로 가서 찬송가를 불렀다. 그러면 조만식은 호텔 발코니에 나와 손을 흔들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조만식이 갇혀 있는 고려호텔은 북한에서 일종의 민주화 성지가 되었다.


조만식이 기독교인으로서 민족 운동에 깊이 연관된 것은 그가 오산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였다. 잘 알다시피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정신과 민족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학교이다. 조만식은 이 학교의 교사로, 그리고 교장으로 일했다. 그가 이곳에서 가르친 것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었다. 그는 실제로 이곳에서 많은 인재를 키워냈다. 

실력으로 나라 세우려 한 민족주의자

이승훈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일으킨 위대한 민족 운동가이다. 이승훈은 3·1 운동을 일으키면서 자신이 세운 학교의 교장이었던 조만식과 깊이 상의했을 것이다. 조만식은 3·1운동 당시 독립을 위해 큰 노력을 했으나 33인에 이름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1919년 2월 조만식은 오산학교의 다른 교사와 함께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송하려고 한 것이 들통나 학교에서 사임했고 그 이후에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려다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 3·1운동 이후 민족 지도자들은 한성정부를 만들기 위해 각 지역 대표들의 이름으로 대회를 소집했다. 이 명단에 첫 번째로 나오는 이름이 이만식인데, 많은 사람이 이만식이 누군지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벌였다. 당시 모임을 주도한 이규갑에 의하면 이만식이 바로 조만식이라는 것이다. 손병희가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조만식은 전국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정신으로 평북 정주에 세워진 오산학교는 조만식의 민족운동과도 관련 깊다. 현재 오산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다.
기독교정신으로 평북 정주에 세워진 오산학교는 조만식의 민족운동과도 관련 깊다. 현재 오산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조만식은 출소 후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가 평양에 다시 돌아와 맡은 직책이 바로 YMCA 총무였다. YMCA는 원래 서울 중심의 기독교 단체였으나 조만식은 이 단체를 평양에도 세워 평양 시민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평양 YMCA는 평양 시민운동의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조만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만식은 자신의 시민운동이 지역색에 매몰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벌인 캠페인이 “고향을 묻지 맙시다”라는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소위 문화통치를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과거의 강압적인 정책에서 벗어나서 일정 부분 조선인들에게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회사령의 개정이었다. 과거의 회사령은 일본인에게만 유리하게 되어 있어 조선인들이 회사를 만들기 어려웠는데 그것이 폐지된 것이다. 조만식은 이것을 통해 조선 사람들이 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했다. 조선인이 회사를 설립하려면 먼저 경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잘못된 인식을 바꿔 기업의 가치를 증진시키고자 했다. 우선 회사를 만들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므로 저축조합을 만들어 자본을 조달하도록 했고 조선인이 만든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물산장려운동을 통해 민족 제품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만식의 노력 덕분에 평양은 조선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평양 YMCA는 평양 시민운동의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조만식이 있었다.
평양 YMCA는 평양 시민운동의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조만식이 있었다.

3·1운동 이후 총독부는 교육령도 개정했다. 3·1운동 이후 완화된 교육령에 근거해 조만식은 오산학교를 다시금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일제는 조만식의 교장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조만식은 평양에서 산정현교회 장로들과 함께 숭인상업학교를 세우고 조선의 경제를 이끌 수 있는 인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당시 새로운 교육령은 조선에도 대학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줬기 때문에 서울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소위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시도했다.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조선에도 대학 수준의 교육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중요했다. 여기에 놀란 일본은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다.


조만식은 물산장려운동이나 교육 활동과 함께 농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한국인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기 때문에 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에는 산업화가 막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이 농촌을 떠나고 있었다. 당시 한국 교회도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장로교 총회와 YMCA가 이 농촌 운동의 중심이었다. 조만식은 YMCA의 총무이자 장로교 장로였다. 조만식은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기독교농촌연구회’를 만들어 농촌 문제를 연구하는 한편, 이상촌을 만들어 당시 농촌 문제에 실질적인 답을 주고자 했다. 그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업 기술을 보급하고, 판매망을 구축해 공산주의식의 소작쟁이보다는 협동조합을 통해 실질적으로 농민을 돕고자 했다.


결국 조만식의 독립운동은 실력을 양성해 조국의 독립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일제시기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국 등지에서는 외교를 통해, 중국에서는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다면 일제의 직접 지배하에 있는 조선에서는 실력을 양성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독립운동이었다. 사실 이 같은 인재가 없었다면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만식의 ‘실력양성운동’을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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