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뷰-미래한국 공동기획] 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下
[월드뷰-미래한국 공동기획] 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下
  • 박명수 서울신학대 명예교수 ·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21.03.05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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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공산주의와 싸운 민주주의자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을 때 한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당시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중경의 임시정부를 봉대(奉戴)해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제 공산당의 지시를 받은 지하 공산당 세력을 중심으로 공산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조만식의 대답은 분명했다. 조만식은 해방 공간에서 임시정부를 봉대해서 민주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이 점에서 조만식이 해방 직후 세운 ‘평북 건국준비위원회’와 여운형이 서울에서 세운 ‘건국준비위원회’는 달랐다. 여운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박헌영과 함께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웠지만 조만식은 남한의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주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1945년 8월 해방되고 아직 소련군이 등장하지 않았을 때 북한, 특히 서북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평북에는 이유필 장로와 한경직 목사, 평남에는 조만식 장로, 황해도에는 김응순 목사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만일 소련의 강제적인 힘이 아니었다면 해방 후 북한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주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군이 진주하고 이들이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위적으로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로 만들어 버렸다. 북한에 공산주의 국가가 설립된 것은 북한 주민의 뜻이 아니라 소련과 소수의 공산주의자가 합작해서 강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북한에 들어온 소련은 조만식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만식을 지도자로 내세우고, 실질적으로는 공산당이 주도해서 정국을 이끌어 가려고 했다. 조만식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가능하면 이들과 협력해 북한 사회에 민주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희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1945년 10월 조만식은 소련이 제안한 북조선 5도 인민위원장을 거부했다. 만일 조만식이 그것을 수락했다면 그것은 바로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소련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세웠다. 전후 소련의 대한(對韓) 정책은 한반도를 친소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핵심은 친소 인사를 중심으로 북한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만식의 생각은 달랐다. 해방 후 북한의 지도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북한 주민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에 진주하며 가옥과 식량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했다. 이에 조만식은 강하게 분노했다. 그는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Ivan M. Chistyakov)를 찾아가 “당신들은 점령군이오? 해방군이오?”라고 따졌다. 또 1945년 11월 일어난 신의주 학생의거를 보면서 조만식은 소련군을 찾아가 그들의 만행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이로 인해 조만식과 소련의 사이는 멀어졌다. 그러나 소련군과 조만식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신탁통치 문제 때문이었다. 소련은 근본적으로 조만식을 친소 인물로 만들어 미국과 협상하려고 했다. 소련은 조만식에게 자신들의 정책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만일 조만식이 소련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그것을 거부했다. 당시 일제에서 해방되어 독립의 기쁨을 맛보았던 한국인들로서는 신탁통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만식은 친소 인물이 되어 소련의 비호 아래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꿋꿋하게 민족 독립의 길을 가고자 했다. 결국 조만식은 1946년 1월 고려호텔에 연금되었고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그들의 길을 가고자 했다.


많은 사람이 조만식이 고려호텔에 연금됨으로써 그의 공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록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는 한반도의 운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외상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의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 것을 결정했다. 이 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되는가가 한반도에 어떤 정부가 들어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근본적으로 북한은 통일시켜 하나의 친소 그룹으로 만들고, 남한은 분열시켜 좌·우의 두 그룹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북한의 친소 세력과 남한의 좌익 세력이 합하면 2:1이 되어 정국을 자신들의 구상대로 이끌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은 북한을 김일성과 조만식의 두 그룹으로 나누고, 남한을 좌, 우, 중도의 세 그룹으로 나누려고 했다. 남북을 좌, 우, 중도의 2:2:1로 만들고 나중에 중도를 미국 쪽으로 오게 해서 민주 정부를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북한으로서는 조만식을 친소 인물로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했고 미국으로서는 조만식이 북한에서 우익 세력으로 생존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남북회담의 주요 과제 가운데 조만식을 참여시킬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소련은 조만식이 친소 세력이 되지 않는 한 참여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미국은 어떻게 하든지 조만식을 참여시켜 북한에 민주 세력을 존속시키고자 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우)이 일본군 평양사관구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 중장(중)을 숙소인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장면으로 그 장소에 조만식(좌)도 입회하였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우)이 일본군 평양사관구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 중장(중)을 숙소인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장면으로 그 장소에 조만식(좌)도 입회하였다.

조만식은 해방 공간에서 한반도에 어떤 국가가 세워져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45년 8월 말 소련군 사령관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나라는 개인의 자유와 사적 소유권이 보장되는 나라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소련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내세워 전략상 이런 정책을 수용하는 것처럼 말했으나 실제로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갔다. 조만식은 이 같은 소련의 행위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같은 해 10월 평양에서 소련군 환영대회가 열렸을 때 조만식은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나라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만식은 당시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카이로 선언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여야 하며 이것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봤다. 신탁통치를 강요하는 소련 사령관에게 조만식은 신탁통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며 이것을 강제로 막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7년 7월 조만식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석차 북한을 방문한 미국 대표 브라운(Brown, W.G.) 소장에게 자신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소련이 말하는 인민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이 말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임을 분명하게 했다. 조만식이 고려호텔에서 연금되어 있을 때 그의 많은 동료는 월남해 이승만과 김구의 건국 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조만식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남한에 ‘조선민주당’을 만들어 정치 활동을 했다. 조선민주당은 신탁통치는 반대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에는 참여하기를 원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제대로 열리면 조만식은 다시 정계에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실패로 돌아갔고 조만식의 정계 복귀는 어려워졌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고 1947년 가을 유엔 총회는 총선거를 하여 한반도를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북한이 총선거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남한에서만 선거를 치렀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게 되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에 이북을 대표하는 인물이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그래서 조만식 대신에 조만식이 세운 조선민주당 부당수이며 월남 인사인 이윤영을 총리로 임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총리 임명에 실패한 이승만은 이윤영을 사회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윤영은 감리교 목사로서 제헌 국회에서 기도했던 인물이다. 해방 공간에서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월남했지만 조만식은 월남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조만식에게 월남을 권유했을 때, 그는 자신이 월남해 버리면 북한에는 김일성을 견제할 사람이 없어지며, 이것은 북한을 통째로 공산당에 바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월남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북한의 공산화를 막았다.

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이 지금의 대한민국은 1945년 해방되었을 때와 같은 혼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신앙과 민족과 세계를 위해 분명한 철학을 갖고 살아간 지도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필자는 그런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조만식 장로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한국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조만식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북한 주민들의 추앙을 받았던 고당 조만식 선생.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주민들의 추앙을 받았던 고당 조만식 선생.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 조만식은 초지일관 신앙의 사람이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인물이 기독교 신앙으로 출발해 나중에 기독교 신앙을 떠났는지 모른다. 이광수, 이동휘, 여운형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조만식은 그렇지 않았다. 조만식은 단지 신앙을 떠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 배경은 기독교였다. 그는 자신과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산정현교회 장로들과 항상 중요한 일을 상의했고 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조만식은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기존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활동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조만식은 근대적인 의미의 시민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조만식의 활동 근거는 평양이었다. 그는 평양을 근대적인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는 평양의 종교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상인, 기업가, 교육자들을 하나로 묶어 일본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감당했다. 평남 도지사가 이 지역의 행정적인 수반이라면 조만식은 이 지역 사회의 대표였다. 그는 평양에 시민운동을 일으켜 공적 기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 했기에 지역적 지지 기반이 조선의 어떤 지도자들보다 튼튼했다. 이런 지지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 소련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셋째, 조만식은 국내에서 실력 양성을 통해 조국의 독립에 기여한 민족주의자이다. 한일병합 이후 독립운동에는 여러 길이 있었다. 외교를 통해,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으나 국내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조만식은 독립을 위해서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농촌을 계몽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상업을 일으키고, 회사를 세우도록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회사업을 했다. 그렇게 일본이 허용하는 테두리를 넘나들면서 최선을 다해 민족을 위해서 일했다.


넷째, 조만식은 우리 한민족이 나가야 할 방향은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공동체가 나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웠고 일본에서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Democracy)’라는 근대 민주 교육을 경험했다. 이런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 분명한 입장을 가졌으며 개인의 자유, 소유권의 확립, 종교의 자유와 같은 인간의 기본권을 강조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병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섯째, 조만식은 민족의 통일을 항상 생각했다. 해방 후 조만식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것은 38선이다. 소련이 그에게 이북 5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취임을 요청했을 때 이것을 거부한 이유는 이런 직책이 바로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할 때도 분명히 조속한 시일 내에 남북을 포함하는 중앙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만식은 절대로 공산주의식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인간이 제대로 대접받은 민주 사회로의 통일이 그의 꿈이었다.
여섯째, 조만식은 자유 세계와의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해방 후 북한에서 소련군을 경험한 그는 한반도의 통일과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애물은 소련이라고 봤다. 북한의 공산당과 김일성이 큰소리치는 것은 오로지 소련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만식은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해방 후 그는 북한에 있었지만 남한의 미 군정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조만식은 해방의 상황에서 일본에 대해 관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수백만의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데 조선의 일본인을 박해한다면 일본에서 조선인들 역시 박해를 당할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했다. 그는 맹목적인 반일주의자는 아니었다.


일곱째, 조만식은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도자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신뢰의 바탕에는 도덕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조만식은 물질적으로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직책을 맡았으나 월급을 받지 않았다. 자신의 생활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충당했다. 조만식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다. 그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 처음 한 일은 거지를 집에 데려다가 자기 옷을 입힌 것이었다. 그는 해방 후 평양 고려호텔에 머물 때도 자신의 돈으로 방값을 치렀다. (당시 김일성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저택을 여러 채 갖고 마음대로 사용했다) 그가 절제 운동을 이끌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생활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2021년 오늘의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조만식과 같은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함석헌은 해방 후 하나님은 조만식에게 북한을 맡겼다고 했는데 지금 하나님은 이 혼란한 대한민국을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실까? 2021년 하나님께 다시 조만식과 같은 지도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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