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역사문화 기행] 천년의 약속 용인, 미래를 열다
[용인 역사문화 기행] 천년의 약속 용인, 미래를 열다
  • 고성혁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21.04.1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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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지역사회 공헌에 부응하여 미래한국은 본사가 자리한 용인시의 역사 문화 콘텐츠를 기획, 발굴하여 연재기사로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 지자체는 인구감소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경기도 용인시는 가장 급속하게 인구가 늘고 있는 지자체 중 하나다. 1996년 이전만 하더라도 용인은 군이었다. 용인군이 1996년 용인시로 승격된 이래 불과 26년 만에 용인특례시가 된다. 인구 100만 대도시에 ‘특례시’ 명칭을 부여하는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2020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를 최종 통과했다. 이로써 용인시는 2022년 1월 고양시, 수원시, 창원시와 함께 특례시가 된다. 지자체 행정단위로 본다면 특별시, 광역시 다음이 특례시다. 이미 인구면에서 보면 경기도가 서울특별시 인구를 넘어선 지 오래다. 그만큼 서울의 인구가 경기도 인근의 도시로 유입된 결과다. 


용인시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가 또 있다. 경기 용인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이 건설된다. 그 규모는 축구장 약 580개에 해당하는 약 415만㎡ 면적이다.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대에 SK하이닉스의 최첨단 반도체 공장 4기를 신설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SK하이닉스의 총투자비는 약 120조 원이다. 2023년 착공해 2025년 초 1단계 공장이 준공될 예정이다. 대규모 반도체 생산단지(클러스터)를 조성하기 위한 정부의 행정 절차가 완료됐다. 1만7000명의 고용 효과와 188조 원 규모의 부가가치 창출이 기대된다. 게다가 현재 전 세계는 반도체 부족으로 시달리고 있다. 좀 더 일찍 투자하고 성과를 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니 이제라도 대규모 투자가 시행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석성산 정상에서 본 용인 동백 전경//고성혁 미래한국 기자
석성산 정상에서 본 용인 동백 전경//고성혁 미래한국 기자

2025년 이후부터는 ‘용인’하면 이천과 함께 반도체단지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각인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용인하면 일반인들에게 용인 인근 골프장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용인 에버랜드’다. 한국의 디즈니랜드와 같은 용인 에버랜드의 예전 명칭은 ‘용인자연농원’이었다. 이병철 삼성 회장은 1976년 용인자연농원을 만들었다. 


이병철 회장이 용인자연농원을 만들게 된 계기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이병철 회장은 대한민국 전자산업을 일으킨 선구자임과 동시에 대단한 미식가였다. 일본과 기술제휴도 많고 일본 바이어와 상담도 많았던 이병철 회장은 일본 스시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신라호텔 주방장에게 특별 주문해도 일본에서 먹은 스시 맛이 나지 않았다. 국내 최고 호텔인 신라호텔 주방장도 늘 쌀 때문에 고민이었다. 아무리 해도 일본의 스시만큼 맛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6년 당시 식량자급자족이 최우선이었던 정부는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계통만 재배하게 했다. 통일벼는 ‘찰기’면에서 일본쌀에 크게 뒤졌다. 한마디로 밥맛이 떨어졌다. 


이병철 회장은 정부의 허락을 받고 용인자연농원에서 일본의 쌀을 능가하는 볍씨를 연구하기 위해 시험재배에 들어갔다. 이것이 용인자연농원의 시발점이다. 또한 척박한 산야를 개발해 숲을 조성하고 묘목 육성을 통한 조림사업, 퇴비 공급원으로 양돈사업, 유원지 조성 사업 등을 종합적으로 착수했다. 


1970년대는 한국이 고도성장하던 시기였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그만큼 레저 욕구가 일어난다는 것을 이병철 회장은 예견했다. 자연농원에 위락시설도 함께 조성했다. 용인자연농원 설립 당시 “미국의 디즈니랜드처럼 어린이가 자연을 배우면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꾸미라”고 이병철 회장은 지시했다. 그것이 현재 용인 에버랜드다. 오늘날 용인은 에버랜드와 함께 많은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수도권 주민들의 휴식처와 같은 곳이 되었다. 이제 대규모 반도체단지까지 완성되면 용인특례시는 국민의 휴식과 위락, 그리고 최첨단 생산까지 겸하는 대한민국 중심적 도시가 된다. 


용인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서울에서 용인을 거쳐 충주, 경상도로 이어진다. 또한 원주에서 이천을 거쳐 수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재도 용인의 지명에는 역삼동(驛三洞)이 있다. 조선시대 역(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도 용인은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교차하는 교통 요지다. 용인의 주봉이라 할 수 있는 석성산 정상에는 조선시대의 봉수대가 있다. 석성산 봉수대는 북쪽으로는 청계산을 거쳐 서울 남산 봉수대로 연결된다. 석성산 정상에서는 용인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멀리 인천 송도와 시화단지 앞바다까지 보인다. 바로 조선의 봉수대가 있는 그곳에 현재는 육군 통신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석성산 동쪽 사면에는 대한민국 지상군작전사령부가 있다. 파월사령부가 월남에서 철수하면서 용인 석성산 인근에 사령부를 뒀다. 그후 육군 3군사령부로 개편되었다. 


2019년 1월 1일부로 ‘국방개혁2020’에 의거해 원주의 제1야전군사령부와 용인의 제3야전군사령부를 통합해 지상군사령부로 개편했다. 석성산성을 고구려가 쌓은 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없다. 최근 발굴조사에서도 조선시대 유물만 나왔을 뿐이다. 반면에 석성산 북쪽 할미산성은 신라산성이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할 때 최전선으로 추정한다. 발굴조사에서도 신라토기가 나오면서 신라산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용인의 할미산성은 안성의 죽주산성, 이천의 설봉산성, 성남의 남한산성으로 연결되는 신라의 군사시설로 추정된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필자는 2000년 용인으로 이사했다. 용인에서 산 지도 벌써 20년이 넘고 있으니 제2의 고향이라고 할 만하다. 용인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 풍수지리적 설명으로는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라는 말이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용인과 관련된 설화로는 가장 유명하다. 저승사자의 실수로 몸이 바뀐 추천석에 얽힌 설화다. 저승사자들이 용인의 추천석을 데리고 와야 하는데 그만 실수해서 진천 사는 동명이인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진천의 추천석을 돌려보내고 용인의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저승사자들에게 명령했다. 추천석은 가족과 다시 만날 생각으로 진천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미 자신의 몸은 땅에 묻히고 집에는 위패만 놓여 있었다. 추천석은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직 용인의 추천석은 저승사자들이 데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용인으로 향했다. 


용인 추천석의 영혼은 저승사자들이 데려갔지만 다행히 몸에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고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이었다. 그는 용인 추천석의 몸에 들어갔다. 용인 추천석의 가족들이 통곡하다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추천석을 보고 놀라 “여보! 다시 살아났구려!” 반가워했다. 깨어난 그는 용인 추천석의 아내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지만 가족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진천 집으로 간 추천석은 아내를 보고 “여보, 나요. 내가 돌아왔소!” 했다. 


아내는 웬 낯선 사람이 헛소리를 하니 이상해서 마을 사람들을 불렀다. 용인에서부터 따라온 추천석의 아내와 식구들은 뒤늦게 도착해 “남편이 미친 것 같다”며 용서를 구했다. 추천석은 그간 사정을 모두 이야기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매질을 당하고 결국 관아로 끌려갔다. 고을 원에게도 그간의 사정을 모두 말했다. 그러자 고을 원이 “이승에는 영혼이 아니고 육체가 인정되니 용인으로 가서 살라”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진천 추천석은 용인으로 돌아와 용인 추천석으로 살았다. 이때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생겼다고도 한다.


그런데 필자가 20년 넘게 살아보니 ‘살아서도 용인이 좋다.’ 서울도 광역버스로 바로 연결되고 전철로는 이제 서울뿐 아니라 수원, 인천까지 환승 없이 갈 수 있다.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도 공항버스로 바로 연결된다. 지방으로 다녀올 때도 좋다. 길 막히는 서울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 좋다. 교통으로 말하면 용인은 사통팔달 지역에 속한다. 조금만 차를 몰고 나가면 얼마든지 시골의 정취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용인이다. 따라서 사거용인   (死居龍仁)이 아니라 생거용인(生居龍仁)으로 바꿔도 될 듯싶다.

용인 마성 고갯길에 있는 터키군 참전 기념비. 터키군은 신갈 저수지 인근, 현재의 보라동 일대에서 백병전으로 중공군을 물리쳤다.
용인 마성 고갯길에 있는 터키군 참전 기념비. 터키군은 신갈 저수지 인근, 현재의 보라동 일대에서 백병전으로 중공군을 물리쳤다.

전쟁사를 통해 보는 용인

용인이 우리 역사 전면에 등장한 때는 몽골의 2차 침략 때였다. 최씨 무신정권이던 고려 고종 때 1232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대규모로 침략했다. 몽골의 1차 침략에 최씨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몽골에 대항하자 몽골이 2차 침략한 것이다. 살리타이는 텅빈 개경을 지나 경기도 광주를 거쳐 용인 처인성에 도착했다. 


처인성은 자그마한 토성에 지나지 않았다. 처인성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다. 개울은 자연의 해자 역할을 했다. 처인성 안에는 지역민과 승려 김윤후가 이끄는 승병들이 막강한 기마병 몽골군을 상대해야 했다. 작은 개울 앞에 선 몽골군 살리타이는 처인성을 바라보고 섰다. 그런데 처인성에서 화살이 날아와 살리타이 눈을 정확히 맞혔다. 장수를 잃은 몽골군의 진격은 용인 처인성 앞에서 막혔다. 처인성 전투 승리로 몽골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남쪽 지방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게 되었다. 고려 조정은 승병과 지역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물리친 김윤후에게 상을 내렸지만 김윤후는 사양했다. 당시 처인지역은 고려의 행정구역상 천민이 거주하는 부곡지역이었다. 향(鄕), 소(所), 부곡(部曲)이라는 행정구역은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있었던 특수한 지방의 행정구역이다. 처인성 승첩의 결과 처인부곡은 처인현(處仁縣)으로 승격되었고 김윤후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해 섭랑장(攝郎將)이 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천민지역이라는 것은 조선시대 천민과는 좀 다르다.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들거나 혹은 민란에 가담하거나 하면 해당지역 등급을 강등시켰다. 신라 수도였던 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고려 조정은 경주를 부곡으로 강등시킨 바 있다. 몽골 침략을 물리친 처인성 전투 이후 고려 조정은 지역주민이 뭉쳐 외적을 물리치면 지역 전체를 승격시켜줬다. 굳이 요즘식으로 해석하면 대승을 거둔 사단의 장병 전체를 1계급 특진시킨다고나 할까. 고려 관군이 무너진 가운데도 지역 단위별로 열심히 싸웠다. 몽골군의 5차 침략 때 김윤후는 충주성에서 지역민을 이끌고 또다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처인성 전투 승리는 오늘날 용인의 지역명으로 남았다. 용인시 처인구는 바로 처인현에서 이어진 지명이다. 


용인이 우리 전쟁사에서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임진왜란 때 용인 전투는 병자호란 때 쌍령전투, 6·25전쟁 때 현리전투와 더불어 3대 패전지 중 하나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에서 전라도 이광 4만, 전라도방어사 곽영 2만, 충청도 윤선각이 이끄는 1만5000의 약 7만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이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 전투이다. 명색이 7만 근왕군이라고 하지만 갑작스레 모은 오합지졸 농민군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용인 전투에서 왜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정예병이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끼는 시즈카다케 7본창의 한 사람이다. 당시 일본에서도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거칠기로 소문난 왜장 중 하나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어 6·25전쟁 때도 용인은 격전을 치렀다. 용인에는 터키군 참전기념비가 있다. 영동고속도로 에버랜드·마성나들목 입구의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전적비는 1974년 9월 국방부가 터키군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산화한 용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했다. 6·25 참전국인 터키는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이 참전했다. 터키군은 3064명이 전사했다. 전사자 수로 본다면 세 번째에 달할 만큼 희생이 컸다. 특히 터키군은 용인 인근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혈전을 치렀다. 1·4후퇴 후 리지웨이 사령관은 재반격 작전인 ‘선더볼트’ 작전을 펼쳤다. 중공군의 수원-이천 방어선을 돌파해 한강 이남까지 회복하는 작전이다. 그 첫 번째 돌파 작전이 현재의 용인 일대에서 감행되었다. 현재의 신갈 기흥동과 처인구 일대에서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약 3일간 혈투가 벌어졌다. 

처인성 승첩비
처인성 승첩비

현재 용인 구시가지인 김장량동에서 광주지역으로 이어지는 중공군 방어선을 미군이 밀어붙였다. 터키여단 소속 터키군은 현재 신갈저수지 인근 보라동 일대에서 중공군 진지를 육탄 공격했다. 이 일대는 남쪽으로는 오산 안성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바로 영통을 거쳐 수원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현재 보라동 일대의 고지인 151고지를 향해 터키군은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면서 중공군을 백병전으로 물리치고 고지를 점령했다.


용인에서 터키군에 패한 중공군은 같은 해 2월 지평리에서 프랑스군에 패하고 이어 5월에는 용문산에서 국군 6사단에 대패를 했다. 그 이후 중공군은 휴전선 일대까지 밀려났다. 결과적으로 보면 용인에서 터키군의 승리는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 이후 역전의 발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기념하는 터키군 참전기념비가 용인에 있다. 용인에는 ‘한터’라고 하는 곳이 있다. 용인에서 곤지암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직전 너른 터라는 의미에서 한터다. 6·25전쟁 때 북한 인민군은 한터에서 양민을 학살했다고 지역 주민은 전하고 있다. 

용인의 미래

용인은 21세기 들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다. 1980년 이전만 해도 용인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1979년에 용인면은 읍으로 승격했다. 1996년 용인군에서 시로 승격하고 이제는 100만 도시 용인특례시가 된다. 2021년 3월 시점 용인시 인구는 107만5421명이다.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용인시로의 인구 유입 패턴을 보면 8,90년대 서울 강남 주민들이 분당으로 이주하고 그 다음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나서 죽전이나 용인 기흥 쪽으로 이주한 경우가 많다. 앞으로 대규모 반도체 단지가 들어서게 되면 인구는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인구 증가는 정치적 지형도 변화시킨다. 


현재 용인의 국회의원 지역구는 용인 갑, 을, 병, 정 4곳이다. 이 중 용인갑을 제외하면 3곳 모두 집권 여당이 차지하고 있다. 용인시장 역시 더불어민주당 소속 백군기 시장이다. 그러나 인구 증가 및 유입 등 변화만큼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용인시 인구가 20만 명이 더 늘어난다면 국회의원 지역구도 추가 재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만큼 용인의 정치적 입지도 달라지게 된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인구가 곧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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