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미군은 점령군이었나
[이슈] 미군은 점령군이었나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1.07.30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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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군정은 전시점령 아닌 평화점령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이재명 경기지사의 ‘미군 점령군’ 주장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여야 인사들 간에 날선 공방들이 오고 갔다. 이에 따라 보수와 진보 진영에도 ‘미군 점령군’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오류인가?

안준형 국방대 교수는 ‘해방직후 주한미군정의 국제법적 성격’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안 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미군정의 점령군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미군정청의 점령포고문: ‘해방과 독립’

정치학자들과 국제법학자들은 점령(occupation)을 크게 2가지 개념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교전국을 상대로 한 전시점령(belligerent occupation)과 비교전국을 상대로 하는 인도주의적 정책의 평화점령(pacific occupation)이 그것이다. 

전시점령은 다시 ‘항복에 따른 점령’(Post-Surrender Occupation)과 ‘복속에 따른 점령’(Post-Debellatio Occuation)으로 분류된다. 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이 독일을 점령한 것은 전시점령이자 전쟁에 승리한 ‘복속 점령’이었고,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점령은 전시점령 중에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용한 무조건 항복에 따른 ‘항복 점령’에 해당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점령인데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이미 포츠담선언과 카이로회담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선언되었기에 전시점령이 아닌 평화점령이 헤이그 협정에 따라 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에 대한 점령 목적을 분명히 한 1945년 미군정청의 점령 포고문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미군정청은 1945년 9월 7일자 ‘포고’(Proclamation) 제1호를 통해 “항복문서의 이행과 한국 인민의 개인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한반도 점령의 목적임을 선언하고 있다. 특히 포고문의 전문에는 ‘한국인은 오래된 일본의 노예 상황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적절한 절차를 거쳐 독립적인 국가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된 SWNCC (미국 전후 정치 군사 조정 연방 정부위원회)의 지령에서도 한국 군사점령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책임 있고 평화적인 국제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자주독립국 수립의 조건들을 촉진”시키는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미국이 해방된 조선에 대해 적국의 개념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된다. 실제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재미한국인들에 대해 일본인들과는 달리 ‘우방국인’의 지위를 부여했다. 

이 조치로 재미한국인들에게는 은행예금 동결, 사업 폐쇄, 공무원 채용 금지 등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적국 국민으로 취급되었던 일본인에게 부과되었던 모든 제한들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이처럼 미국은 식민지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켜 독립국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를 시행했고 한국인을 일본 정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평화적 점령을 했음에도 왜 미국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점령군’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상황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하지(Hodge) 주한미군사령관이 한반도 진주 당시 한국인을 ‘적국인’에 준해 취급한 문제다.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미 24군단에 대한 전문을 통해 한국인들을 ‘해방된 인민’으로 취급하라고 지시했으며 ‘한국의 미군 점령지역내 민정업무에 대한 초기 기본 지령’이라는 SWNCC 보고서에서도 카이로선언의 규정에 따라 그 민정업무는 최대한 한국을 ‘해방된 국가’ (liberated country)로 대우하는 데 기초해야 할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안준형 교수에 따르면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의 이와 같은 조치는 당시 상부로부터 한국에 대한 어떠한 지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총독부로부터 소련의 영향을 받는 좌익세력들의 폭력행위에 관한 정보들을 접하면서 한국인들의 친소경향에 관한 선입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봤다. 

미군정청장 하지 중장(좌)과 이승만(우)
미군정청장 하지 중장(좌)과 이승만(우)

실제로 미군정이 남한의 해방 공간 상황에 대해 가장 우려한 점은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남한에 반공적 색채가 강화되었던 상황은 현재 진보의 뿌리를 소급해 볼 때 일부 급진적 좌파들과 친북적 세력들에게는 미군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 ‘미군=점령군’론을 주장했던 이재명 지사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그 이유로 미국이 임시정부를 부정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김원웅 광복회장이 이재명 지사의 ‘미 점령군’ 발언을 두둔하고 나섰다. 

김원웅 회장은 “친일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그때 유지했다’는 이재명 지사의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더글러스) 맥아더는 미군정 실시와 동시에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를 강제해산시켰고, 임시정부도 해체하도록 강요했다”며 “그리고 친일파들을 중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역사적 진실은 건준의 여운형이 임시정부를 반대하고 해체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봉숭아 학당이 따로 없다.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했던 건준의 여운형, 왜?


박명수 미래한국 13기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다음에 임시정부에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공산주의였다. 소련은 자신들이야말로 피압박민족의 구원자라고 선전하며 실망한 민족주의자들을 유혹했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1차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열어 이들을 초청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는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이 포함되었고, 이들은 레닌을 만나 막대한 자금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미국을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며 반미주의자가 되었고, 세계의 중심은 워싱턴이 아니라 모스크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다시 상해로 돌아와 첫 번째로 한 일은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롭게 창조하거나 아니면 임시정부를 공산주의와 연합전선을 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소련으로부터 들어온 막대한 자금을 배경으로 당시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임시정부를 접수해 코민테른의 휘하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러면 여운형이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운형이 임정을 반대하는 이유는 1) 임정은 스스로 자멸할 단체이며, 2) 국내의 조직 기반이 없으며, 3) 인민이 토대가 되지 못하며, 4) 임정보다 유수한 독립운동단체가 많으며, 5) 해외의 안전지대에 있었으며, 6) 미국과 소련이 다 같이 인정하지 않고, 7) 임정은 건준의 건국 활동에 장애가 된다는 것 등이다. 특별히 임정이 건준의 활동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반대해서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임정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바로 송진우였다. 송진우는 거국적으로 임정환영위원회를 열고 임정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이런 송진우의 준비로 이승만과 김구는 국민의 환영 가운데 귀국할 수 있었다. 비록 임시정부가 정식 정부로서 귀국한 것은 아니지만 미군정은 과거의 입장을 바꿔 군정의 파트너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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