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반복되는 역사에 대비하자
[논단] 반복되는 역사에 대비하자
  • 송종환 미래한국 편집고문·경남대 석좌교수
  • 승인 2021.09.2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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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1950~1953년' 한글판을 편집 출판하면서 

미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연합군 철수 시한인 8월 31일을 2주일 이상이나 앞두고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무장반군조직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20년 만에 다시 접수했다.

카불이 함락되자 카불공항을 통한 비극의 탈주가 시작되고 탈레반과 경쟁 관계에 있는 이슬람극단주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의 아프가니스탄 지부 IS-K(Khorasan·호라산)의 폭탄 테러와 이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군사 보복이 이어졌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8월 16일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미군 주둔을 계속하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면서 싸울 의지 없는 아프간을 위해 미군을 희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군사 보복을 단행했다.

1953년 7월 28일 판문점에서 열린 첫번째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 블랙시어 브라이언 미 육군 소장과 리상조 조선인민군 소장이 신임장을 교환하고 있다./AP 자료사진
1953년 7월 28일 판문점에서 열린 첫번째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 블랙시어 브라이언 미 육군 소장과 리상조 조선인민군 소장이 신임장을 교환하고 있다./AP 자료사진

평화협정 다음은 미군 철수와 이제까지의 미국 지원국가 패망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미·베트남 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이 철수한 후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고, 금년 2월 29일 미국과 탈레반 간에 카타르 도하에서 ‘아프간의 평화 도래를 위한 협정’(평화협정)에 서명한 후 8월 15일 카불 함락된 것이 연상되어 한국과 미국에서 주한미군 철수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당국은 한국과 아프간은 다르다고 애써 강조하고 있지만 72년 전 1949년 9월 고문관 500여 명만 남기고 미군이 철수한 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이 소련, 당시 중공(현 중국)의 지원 하에 기습 남침해 왔음에 비춰 주한 미군 철수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6·25전쟁의 휴전협상 시작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한 후 한국군과 함께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스탈린이 9월 30일 소련공산당 정치국회의 협의를 거쳐 10월 1일 즉각 정전, 외국군 철수, 국제감시 하 총선 등 요지의 결의안 초안을 마오쩌둥과 협의 후 유엔주재 소련 대표부로 타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10월 4일 소련 측 결의안을 부결시켰다.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도강하여 공격에 나서자 유엔군과 한국군이 다시 후퇴, 전황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12월 초 유엔주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트리그브 리 사무총장이 중국 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정전 조건 제시를 요구하면서 정전을 제의했으나, 중국은 스탈린의 권고에 따라 이에 응하지 않았다.

진전이 없던 협상 개시가 1951년 7월 시작된 배경에는 미국이 있었다는 연구가 입수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밀명에 따라 애치슨 국무장관은 국무부의 소련 전문가로서 당시 프린스턴대에서 연구하고 있던 케난으로 하여금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를 동 대사의 롱아이랜드 별장에서 만나 휴전 제의를 설득하게 했다. 말리크 대사는 1951년 6월 23일 유엔평화관계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교전 당사국들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이런 6·25전쟁 휴전 개시 상황은 미국은 6·25 남침전쟁 동안 3만6574명의 병사를 희생시키고 전쟁 후에는 한국의 안보를 지키는 든든한 동맹국이지만 언제든 입장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전쟁에 미국의 젊은이들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과 함께 평화협정으로 이어질 문재인 정부의 종전선언 주장으로 불안이 엄습해옴을 숨길 수 없다. 

잊혀진 전쟁 표지
잊혀진 전쟁 표지

<6·25전쟁 회고록: 1950~1953> 한글판 책자 발간

카불 함락 후 주한미군 철수 논쟁이 일어나고 이번에는 한국이라는 자조적인 한숨이 나오고 안보 결의를 다지자는 경고가 나오는 시점에 6·25 남침전쟁이 발발한 1950년 10대였던 8명의 소년·소녀들이 80대가 되어 영어로 쓴 <6·25 전쟁 회고록: 1950~1953>을 편집한 한글판 책자가 발간되었다.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각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은퇴한 8순이 넘은 재미 한국인 8명의 필자들은 6·25전쟁 71주년에 즈음하여 그들이 6·25 전쟁 기간 중 겪었던 일들을 생생하면서도 솔직하게 기록하였다.

필자는 초대 미주한국시문학회 회장으로 문학 활동을 해온 최연홍 박사, 춘원 이광수의 차녀 이정화 박사, 육당 최남선의 손자 최학주 박사, 전 동아일보 사장이며 제헌국회의 법제사법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초안한 근촌 백관수의 차남 백순 박사, 경기고 3학년 재학 중 6·25전쟁 발발로 참전하고 미 하원 코리아게이트 조사특위 전문위원을 역임한 안홍균 선생, 미국 질병통제본부 의료통계학자인 조지아 의대의 최재원 교수, 핵물리학 박사로서 한국에 돌아와 전북대 교수를 역임한 김승곤 박사, 한국 해군 군의관을 거쳐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강창욱 박사 등이다. 

영문판 책자 출판을 위해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미국 다트머스대 객원교수인 김성곤 박사는 유려한 문체로 집필자들의 글 내용과 경력를 소개하는 서문을 썼다.

미국 워싱턴에서 최연홍 교수는 8명이 쓴 <6·25전쟁 회고록> 영문판과 한글판 출판을 추진하다가 지난 1월 6일 췌장암으로 별세하였다. 최 교수의 유지에 따라 노세웅 시인과 필자 7명이 힘을 합쳐 6·25전쟁 71주년인 지난 6월 25일 영문판 책자를 출판하였다. 이번에 출판된 한글판은 워싱턴 필자들의 요청으로 고인의 지인(知人)인 필자가 중심이 되어 출판사 화산문화를 통해 펴내게 되었다.

이 한글판 책자는 6·25전쟁 당시 한국의 사회·문화를 잘 나타내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북한 인민군이 1950년 6월 28일 남침 사흘 후 서울을 장악하고 9월 28일 수복될 때까지 3개월 동안 우익 인사들을 길거리에서 공개 처형하는 인민재판을 목도하고 강제 노역 동원을 당하면서 남편의 납북과 자식의 의용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여성들의 희생과 용기, 저명인사들의 납북과 가족의 헤어짐, 한국 전통 사회의 가족 간의 아름다운 관계와 지향하는 사상의 다름으로 인한 가족 관계의 파괴, 학도병들의 장렬한 전사와 그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 피난 중에서도 텐트 막사에서 공부를 하고 인재를 기르는 교육자들의 헌신, 생계와 가족을 위해 인민군에 협조하는 부끄러운 부역, 혹독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눈물 어린 추억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강대교 폭파 전에 남쪽으로 피난한 국민들과 서울 잔류 국민들 간의 반목과 분열, 어려움 속에서도 피난민들의 상부상조하는 생활의 모습, 그리고 군인들 간의 전투와는 별도로 후방에서 우익과 좌익 간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살육도 있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찾아다니면서 남침전쟁을 은밀히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국방 당국자가 이승만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 때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는다는 헛소리를 하고, 미국은 남침전쟁 발발 9개월 전에 철수를 한 후 북한군 증강에 대비하고자 하는 한국군 지원에 소극적이었음도 밝히고 있다.

통일이 눈앞에 보였을 때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이 개입하여 벌어지는 장진호전투, 흥남철수와 1·4후퇴 당시 필자들의 형제와 피난민들이 겪는 일도 기록되어 있다. 특히 흥남철수 때 미국 화물선 선장이 무기 등을 버리고 버림받아 죽게 될 1만4000여 명의 피난민들을 싣고 험난한 겨울 바다를 항해하는 기적적 인간애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근저에는 필자 8명이 비교적 안전한 나라인 미국에 살고 있지만, 두고 온 모국에 대한 진한 애국심이 깔려 있다.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한 북한이 최근 한미군사훈련을 하면 보복하겠다고 엄포를 하고 중국까지 훈시를 하고 있는데도 여당 대표는 북한이 남침할 의도가 없다고 공언하고 정부는 한국이 작은 나라라고 자처하면서 ‘높은 산봉우리’ 중국을 바라보면서 한미군사훈련을 축소했다.

나라가 갈 데까지 가는 것 같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는 지난 8월 30일 중국공산당이 작년 6·25전쟁 참전 70주년을 맞아 1953년 6~7월 강원도 철원군 금남면에서 중공군이 한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싸운 전투를 미화해 제작한 영화 ‘1953 금성대전투’에 이달 중순부터 15세 이상 청소년들이 VOD(주문형 비디오)로 볼 수 있도록 등급을 부여, 허가했다.

중공군이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도강, 개입한 후부터는 사실상 유엔군과 한국군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때까지 중공군에게 한 뼘 땅도 주지 않기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 싸웠다. 그럼에도 영등위는 국군 살해 장면이 없어 허가했다고 한다.

국민의 분노에 동 중국 영화 수입사는 국내 상영을 포기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수입사 측에서) 등급분류를 포기해서 상영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영등위 사람들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주무부처는 이런 문제에 대한 입장이 없나? 

국가정보원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이적죄 혐의로 추적하던 자들이 2007년부터 중국, 캄보디아 등지에서 북한공작원을 접촉하여 공작금과 지령을 받는 정거를 확보했다. 북한의 지령에 따라 반보수 투쟁을 하면서 정당·여성노동자 접근, 스텔스 전투기 F-35 도입 반대 서명 등 활동을 하고 이를 북한에 보고하는 간첩 활동을 하던 청주지역 일당 4명 중 3명이 2021년 7월 2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혐의가 경미하다는 이유로 구속을 면한 1명은 8월 12일 국가정보원이 사건을 조작했다고 정부 당국자들을 고발하고 ‘충북동지회’는 8월 25일 국가정보원과 경찰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소했다. 이러한 한국의 현실은 이번 한글판 책자에서 기록한 6·25전쟁 발발 직전의 정치 안보 정세를 연상케 한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는 윈스턴 처칠의 경고와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라틴어 경구가 무겁게 들린다. 이 한글판 책자가 널리 읽혀 독자들에게 6·25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전달되기 바란다.

나아가 이 책이 71년 전 목숨으로 나라를 지킨 참전용사들과 학도병들의 희생으로 얻은 자유를 지키고 무너진 안보 의식과 자유민주통일의 꿈을 회복하여 주변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으면서 튼튼한 대비책을 강구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다시는 6·25 남침전쟁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해 필자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핵심 요지를 <잊혀진 전쟁: 1950~1953> 한글판 책자 출판 기회에 밝힌다. 북한은 1991년 이래 ‘조선반도 비핵화’로 북한 핵 폐기를 주장하는 상대방을 속이는 협상을 하면서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왔다. 

중국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상감령 전투지역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전투다. 현재 오성산은 북한땅이다./철원군
중국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상감령 전투지역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전투다. 현재 오성산은 북한땅이다./철원군

북핵에 대한 현실적 세가지 대안과 대미 여섯가지 설득 논리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8월 27일 연례이사회 보고서에서 2018년 말부터 가동 징후가 없던 5MW 원자로가 올해 7월 초부터 냉각수 방출 등 재가동 징후가 있으며 원자로에서 꺼낸 폐연료봉을 재처리하여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방사화학실험실도 5개월간 가동해 왔음을 확인했다. 

IAEA 연례보고서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북한 외무성은 8월 29일 “최강의 억제력을 부단히 비축해 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8월 30일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북한 핵·미사일 활동을 지속 감시 중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평화정착과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나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믿으라는 것으로, 끊임없는 북한 핵 개발로 인한 국가 안보 위기 대책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북한이 핵무기를 고도화하고 투발 수단을 완성한 후 실전 배치를 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이 북한 핵의 포로로 살지 않으려면 그 현실에 맞는 근본 대책을 세우고 국가 예산을 우선 투입하여 가능한 북한 핵 억지를 위한 대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이 대책의 기본은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 교수가 “다투는 두 나라 중 핵 위협을 받는 나라가 핵 반격 수단이 없으면 1945년 8월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 일본처럼 완전 파괴되거나 무조건 항복이라는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다”고 경고한 것에 둬야 한다. 

이 경고에 따른 전략의 기본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한국을 공격하려고 할 때 자신들도 핵과 미사일로 선제공격을 받거나 즉각 반격을 받아 절멸(絶滅)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도록 하는 ‘공포의 균형’에 의한 억지력으로 북한이 극단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은 ‘공포의 균형’을 갖추기 위해 먼저 독자의 힘을 강화하는 자강책(自强策)을 추진하면서 동맹국인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한다. 공포의 핵 균형을 갖추기 위해 세 가지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1) 북한이 어느 시점까지 핵 폐기에 응하지 않으면 전술핵을 재배치하겠다고 사전 발표를 한다.

(2) NATO 식 전술핵무기 공유(독일, 벨기에 등 5개 동맹국의 미군기지에 전술핵 탄두 150~ 200여기를 배치하여 핵탄두는 미국이 보유·통제, 유사 시 NATO 해당국 전투기로 투하) 체제를 갖춘다.

(3) 미국의 양해 하 한국의 조건부 핵 무장(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한국도 핵 무장 추진 중단)을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1991년 이후 진행된 북한 핵 폐기 협상은 실패했고, 협상을 재개해도 북한은 핵 폐기에 앞서 주한미군 철수를 의미하는 대북적대정책 철폐를 요구하는 ‘조선반도 비핵화지대론’을 주장할 것이므로 북한 핵 폐기는 해결될 전망이 없다.

한국은 1958년 미국으로부터 핵 협력 거부를 당하자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하고 1961년 핵무기 개발을 시작한 사례를 미국에 솔직하게 전해야 한다.

1962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인도가 중국의 1964년 핵실험에 대응해 1974년과 1998년 핵실험을 하고, 파키스탄이 숙적 인도에 대응해 1998년 핵실험을 했다. 한국은 중국과 인도,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국경을 넘는 작은 전투가 빈발하고 있으나 큰 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는 것은 분쟁 당사자가 모두 핵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미국에 상기시켜야 한다.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경쟁을 노골적으로 하면서 한미군사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있고 북한은 ‘조선반도 비핵화’를 내세워 핵 폐기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들과 대화할 일이 없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이 전술핵무기를 한국에 배치, 공유하거나 한국이 미국의 양해 하에 핵무장을 추진하는 방안 중 하나라도 실현되도록 아래 여섯 가지로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1) 북한이 남북한 간과 미·북한 간 대화에 진정으로 나오도록 유도할 수 있고, (2)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에 민감한 중국이 북한 핵 폐기에 적극적 역할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3) 북한의 대남 도발을 억지하여 중국·인도 간, 인도·파키스탄 간처럼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고, (4) 북한이 미국 본토와 주일 미군 기지를 위협하지 못 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할 것이며, (5)미·중 간 패권경쟁 시대에 중국의 주한미군 타격을 억제할 수 있고, (6)미국의 대북 군사옵션보다 피해와 경비가 적고 북한 핵무력을 대응하는 데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 대통령 경선 주자들은 북한 핵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핵무기 재배치로 공방 중이다.

유동적인 국제질서 속에서 엄혹한 핵 위기를 맞아 스스로 힘을 기르고 미국과의 진지한 협상을 통해 최소한 전술핵무기 재배치라도 이뤄지도록 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후보가 있으면 그는 6·25전쟁 후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된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승만 대통령과 1978년 11월 7일 한미연합사령부 창설을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안보를 확고히 하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겪어본 것 같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자유민주통일을 이루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자유민주체제로의 통일 소망을 굳건히 하고 방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으면 그런 위대한 지도자가 다시 출현할 것이다.

아니 그런 지도자가 출현하도록 국민들이 대선 주자들을 구별해 지원, 비판하면서 올바른 평화와 통일을 위해 눈 똑바로 뜨고 단결해 나갈 것을 권고한다, 

시진핑이 보는 6·25전쟁, “한방으로 물리쳐 백방을 아꼈다”(?)

지난해 10월 3일 중국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 행사에서 시진핑 주석은 6.25전쟁에 대해 ‘침략자에 대한 응징’으로 그 의미를 부여했다. 10월 3일자 인민일보는 시 주석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실었다.

한국전 소재로 중공군의 항미원조 선전영화 '금강천'이 수입허가가 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전 소재로 중공군의 항미원조 선전영화 '금강천'이 수입허가가 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작전으로 중국 인민은 침략자들의 침공과 신중국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무찔러 이른바 “한 방으로 물리쳐 백 방을 아꼈다”. 따라서 제국주의가 다시는 무력으로 신중국을 침범하지 못해 신중국이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은 국토와 국가의 안녕을 지켜 중국 인민의 강포에 굴하지 않는 투철한 의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작전으로 중국 인민은 근대 이후 착취와 남의 눈치를 보던 백년간의 치욕을 깨끗하게 씻고, ‘동아시아 병자’라는 딱지도 완전히 제거하며 진정한 활개를 펼쳤다. 이 작전은 중국 인민의 정기를 뿜으며 중국 인민의 하나된 확고한 품격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 작전으로 중국 인민은 침략자를 무찌르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해 신중국의 아시아 및 국제 사무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다졌고, 신중국의 대국적 지위까지 드러냈다. 

이 작전은 전 세계로 하여금 중국을 새롭게 보게 해 중국 인민의 세계 평화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심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 작전으로 인민군대는 전쟁 속에서 전쟁을 배우고 전쟁을 할수록 용감해지고 강해져 중요한 군사 경험을 얻은 것은 물론 단일군에서 다수 병종을 통합한 군대의 전환을 실현해 국방과 군대 현대화를 크게 촉진시켰다. 이 작전에서 인민군대 전투력은 세상을 놀라게 해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막강한 군대를 보여주었다.

이 작전으로 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전략 구도가 완전히 재편되고, 전 세계 핍박받는 민족과 인민들의 민족 독립과 인민 해방을 위한 정의 사업이 탄력을 받아 세계 평화와 인류 진보 사업이 적극 추진되었다. 

이는 확실한 사실을 통해 어떤 국가나 군대를 막론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떠나 만약 세계 발전 조류와 대립각을 세우는 약자 괴롭히기, 역행적 행동, 침략 확장을 자행한다면 반드시 참패를 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작전으로 정의가 반드시 강권을 이기고 평화 발전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임을 다시금 입증한다.> (번역: 조미경) 원문 출처: 인민망 

최근 6·25 전쟁에서 중공군을 미화한 중국영화 ‘1953 금성 대전투(원제 ‘금강천’)’가 국내 상영 허가를 놓고 논란을 빚은 끝에 무기한 상영 보류가 결정됐다. 포털의 영화 소개란에는 ‘6·25전쟁 끝 무렵인 1953년 여름, 40만 명이 넘는 미군과 중공군이 금강산 금성 돌출부를 두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한국은 이 전투에서 수적 우세를 앞세운 중공군에 밀려 패전하며 영토 193㎢를 북한에 넘겨줬다. 

국군 피해는 전사자 1701명, 부상자 7548명에 달하는 것으로 기록됐다. 이 외에 4136명이 포로가 되거나 실종됐다.

중국의 포털사이트 바이두는 영화에 대해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抗美援朝) 70주년을 기념하며, 적과 아군의 전력 차가 현격한 상황에서 분투한 의용군 전사들의 영웅적인 행적을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운 ‘항미원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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