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성남은 왜 ‘아수라’의 먹잇감이 되었나
[심층분석] 성남은 왜 ‘아수라’의 먹잇감이 되었나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1.10.19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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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에는 육도윤회((六道輪廻))라는 것이 있다.

육도윤회는 중생이 태어나 살다가 죽고 나면 생전의 행보에 따라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수라도, 인간도, 천상도로 나뉘는 육도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을 뜻한다.

이 가운데 ‘수라도’는 싸움이 그치지 않는 곳이다. 당연히 무법천지일 수 밖에 없다. 수라도의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 혹은 아수라왕과 제석천이 대전쟁을 벌인 마당을 뜻해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생겼다.

경기도 중앙부에 위치한 성남시는 무법천지, 아수라장의 기억을 갖고 있다. ‘천당’ 위에 있다는 ‘분당’은 성남시가 가진 아수라의 상처로 만들어진 진주다.

수도권에서 제일 먼저 계획적으로 개발된 위성도시였던 성남시는 원래 서울 옥수동, 금호동, 답십리에 있던 무허가 천막촌에서 살던 사람들을 서울 근교로 분산하기 위한 대단위 거주지로 개발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아무런 생활시설이나 편의시설 없이 그야말로 천막촌에 ‘던져졌다’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에 박정희 정부는 서울의 무허가 빈민촌 정리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일부는 무허가 주택을 현지 개량해서 양성화하고, 또한 새로운 주거지를 만들어 이주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주거지로 계획된 것이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현 성남시 중원구, 수정구 및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조성되는 10만 명이 살 수 있는 규모의 대단지(광주대단지)와 서울 시내 곳곳에 짓는 시민아파트였다.

이때 10만 명이 넘는 빈민층 사람들이 살 집을 준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이사를 갔다. 당시 청계천과 서울역 일대에 살던 빈민들에게 ‘다시는 서울로 이사오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이주시켰다.

14만 명에 이르는 이주민들이 황량한 황무지에 그냥 버려졌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모란시장이 있었지만 당시 모란시장은 소규모 면소재지의 5일장일 뿐이어서 10만 명 대인파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결과 성남에는 광활하고 불결한 천막촌이 형성되었다. 당시에 광주대단지에 입주했던 주민은 “산에다가 나무만 베어놓은 후 살라고 하는 바람에 장화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화천대유 관련 복잡한 관계도는 아수라판 그 자체다.
화천대유 관련 복잡한 관계도는 아수라판 그 자체다.

2017년 12월 출간된 고건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에서 ‘광주 대단지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했다. 고 전 총리는 회고록을 통해 “이 마을에서 굶주림에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풍문이 돕니다”라는 당시 안내자의 말로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증언했다.

당시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부이사관)이었던 고건 전 총리는 사건 발생 20여일 후 경기도 직할 성남출장소를 설치하고, 파출소를 증설하는 등 후속 대책 마련으로 사태 해결에 참여했다고 회고하며 “지금의 성남시가 있기까지 철거 이주민의 눈물과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는 당부를 남겼다.

조폭과 종북의 아지트 성남

하지만 성남의 아수라는 빈민촌이었기에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직후인 1971년 6월 광주대단지 관할 행정 당국인 경기도청은 주민들에게 토지대금을 납부하라는 고지서를 발부했다. 그 가격은 처음 약속했던 가격의 최소 4배에서 최대 8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주민들은 이에 분노했고 삽과 곡괭이들을 들고 집단적인 저항에 이르렀다. 이른바 ‘광주대단지사건’이었다.

100여 명의 부상자들이 속출했고 성남시청은 불타올랐다. 해방 이후 최초의 대규모 도시빈민투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성남은 진보와 좌파 진영에서 체제 변혁 투쟁의 해방구로 일찌감치 낙점됐다. 이석기의 RO조직 경기동부연합이 성남을 본거지로 똬리를 튼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 조폭 세력이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바로 은수미 성남시장을 비롯 이재명 후보와 연루설이 제기되는 성남 국제마피아 조직이 그들이다.

이들은 성남시가 들어선 1970년대부터 창설되어 활동해 왔다. 국제마피아파는 70년대 초부터 함께 성남을 양분하던 종합시장파가 세를 점차 잃으며 성남 내에서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했고, 2000년대 말 이후로 명실상부 성남 최대의 조직으로 급성장했다.

범죄 자금으로 설립한 코마트레이드라는 회사를 겉으로 내세워 성남 지역사회 정관계에 온갖 로비를 벌여 오며 이권을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불법도박 사업도 하며 이 과정에서 불법 웹사이트를 코딩하는데 강제노역 수준으로 동원된 한 웹프로그래머를 조직원이 살해한 사건도 있다. 그런 코마트레이드는 2015년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성남이 빈민들의 투쟁 도시가 되어가는 중에 조폭들의 활개는 힘없는 서민들과 상인들을 더 힘들게 했다. 여기에 북한의 직접 지령을 받고 움직이다가 해체된 경기동부의 핵심세력들의 아지트가 바로 성남이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는 성남 광주대단지사건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거점학교로는 용인에 있는 한국외대 글로벌캠퍼스(舊 용인캠퍼스)가 핵심이며, 자연스럽게 경기동부연합의 핵심 파벌은 구 용인캠퍼스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용인 성남지구 총학생회연합(용성총련)이라 불리는 NL계 중에서도 특히 강경하기로 유명했던 학생운동 조직이다. 경기동부연합의 리더격인 이석기의 경우 전남 목포 출신의 이주민으로 성남의 성일고와 한국외대 용인캠퍼스를 졸업했다. 특히 성일고의 경우 이석기의 직계 후배들로 분류되어 성남내 조직 구성 때 주요 포스트를 담당했다.

이렇듯 성남은 도시 빈민 운동을 빙자한 일부 체제 전복 세력들과 조폭, 그리고 종북 경기동부연합 등과 같은 무법 세력들이 이재명이라는 이름의 성남시장을 고리로 하여 거대하고 치밀한 네크워크를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성남의 헬게이트 수라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12년 취임2주년 기자회견에서 대장동 개발 계획을 발표하는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연합
지난 2012년 취임2주년 기자회견에서 대장동 개발 계획을 발표하는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연합

아수라 위에 세워진 분당과 판교

현재의 성남은 광주대단지사업 때 개발된 중원구, 수정구 지역과 1기 신도시 개발지인 분당신도시 지역, 2기 신도시 구역인 판교신도시와 위례신도시 지역으로 나뉜다.

1990년대의 분당신도시, 2000~2010년대의 판교신도시가 2015~2025년대의 위례신도시까지 들어서며 성남시는 꾸준히 세가 확장되었다. 성남시 전체가 신도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020년 1인당 GDP는 4만6094달러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남 발전의 이면에는 아수라의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다. 분당신도시와 위례신도시는 신도시 개발로 강남에 들어오지 못한 중산층 내지 신흥부자들이 많이 이주했다.

이로 인해 고급 아파트, 대기업 본사 등이 분당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일부 신도시 주민들이 수정구, 중원구에 대해 못 사는 동네라는 식의 비하 발언을 하는 것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성남시 당국의 분당구민에 대한 노골적인 ‘돈줄’ 취급에 대한 분노로 인한 감정도 있다. 이에 맞서 수정구, 중원구에서 분당을 비난하여 ‘X통(糞堂)’이라고까지 하는 말들이 자주 들린다.

개발 이전의 분당지역은 대부분 논밭이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이다. 흔히 분당, 판교, 위례신도시의 거주민들에게 어디에 사냐고 물었을 때 분당, 판교, 위례에 산다고 하지 절대로 성남에 산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상식이다. 이러한 갈등은 학생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당연히 수정구, 중원구민들은 분당, 판교, 위례도 성남이라며 반발한다.

성남의 이러한 구시가지와 신도시 간의 차이는 현재진행형이다. 2018년을 시작으로 한번에 조성된 분당지역의 대규모 리모델링과 판교신도시의 집값 상승, 위례신도시 조성, GTX A 성남역 및 신분당선의 연이은 확장으로 분당구의 집값이 여전히 구시가지 대다수 지역을 압도하며 끊임없이 상승하는 상황을 만든다. 2021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화천대유 대장동 개발 비리사건은 바로 성남에 구축된 이재명 전 성남시장을 고리로 한 아수라 커넥션의 결과라고 보는 시각들이 우세하다.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일대는 2005년 원래 LH가 공영개발방식으로 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LH의 경영상 부담문제와 민간과의 경쟁 지양의 정책적 문제로 민간개발로 변경됐다. 이와 관련해 신영수 당시 새누리당 의원의 동생 등 정치권의 로비로 인해 민간투자사업으로 방향이 선회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2009년 대장동 개발 민간 시행사는 한국의 비벌리힐스 콘셉트를 차용해 고급주택 위주의 택지지구로 판교신도시와 같이 개발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정치권 로비 혐의로 시행 개발의 핵심들이 구속되면서 개발이 좌초되어 보전녹지 지역으로 방치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 후보는 대장동을 민간 시행사들의 입장을 지지해 ‘한국의 비버리힐스로 만들겠다’며 민간개발을 지지하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판교테크노밸리 사업의 성공으로 판교 지역에 지속적인 거주 수요가 생기고,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판교 지역 지가가 폭등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대장동은 황금알을 낳은 기회로 재인식되었던 것. 그러나 이재명 후보는 철거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당선된 후 돌연 민간개발 공약을 취소하고 공공개발을 선언했다. 그리고 성남도시공사를 설립했지만 이는 처음부터 개발사업 1조를 시행할 수 없는 자본금 규모여서 불가능했다.

성남시의회의 보증도 처음부터 불가능한 공공개발이었다. 이재명 시장은 그러자 민관합작이라는 방식으로 주민들의 땅을 헐값에 매수하고 그 이익을 민간시행사에 특혜로 주는 이해할 수 없는 사업 방식에 사인했다. 여기에 자신의 심복인 유동규 성남도시공사 본부장이 700억 개발이익을 받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검찰에 의해 확인되기에 이른 것이다.화천대유 대장동 게이트 비리는 어느날 갑자기 터진 사건이 아니다.

성남시의 오랜 불균형 개발에 노출된 주민들의 갈등을 파고든 아수라 세력들을 총체적으로 잡아내야 이 사건의 전모와 여죄들과 실체들이 밝혀질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아수라의 중심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민주당의 후보 이재명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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