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경기동부연합 인맥은 1984년 재탄생한 성대련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1980년 만들어진 성대련이 단순히 성남 출신 대학생들로만 구성됐다면 1984년의 성대련은 각 대학 학우회의 대표성을 확보한 조직이었다. 이전까지 학술 문화 활동에 치중했다면 이때부터 가두시위도 벌였다.
성대련 초대회장은 이석기의 성일고등학교 후배로 2012년 4·11 총선 때는 피선거권을 잃은 상태였으며 총선 이후 이석기의 특별보좌관을 맡았다.
6월항쟁 이후 대중운동이 발전하면서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청년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남에서는 1988년 1월 성남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성학연이 터사랑청년학우회로 명칭을 바꾸기 1년 전의 일이다.
광주대단지 기억을 공유하는 성남 출신들의 모임이 성대련과 이후 터사랑청년회 및 성남청년회였다면 6월항쟁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억을 계승시키면서 청년회 조직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6월항쟁 앞뒤로 성남시 인근 대학의 학생들은 학교에 다닐 때는 노학연대 투쟁에 참여하면서 성남시와 관계를 맺다가 졸업한 뒤에는 성남 공단으로 취업하거나 청년회에서 활동했다.
1991년 말 전국연합의 출범과 함께 성남연합이 결성됐다. 1990년대 중반 민주당 선호 세력이 떨어져 나가면서 좀 더 급진적인 성향을 더해갔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는 운동가 중심의 활동을 대중 중심으로 바꾸면서 터사랑청년회를 시작으로, 성남청년회, 1993년에 생긴 분당청년회에서 청년학교를 개설했다.
1996년에는 세 단체에서 따로 운영하던 프로그램을 하나로 합쳐 성남청년대학을 설립했다. 성남청년대학은 2009년 4월 해체될 때까지 민노당 성남시당, 다시 말해 경기동부연합의 가장 큰 조직 기반이 됐다.
공고한 조직을 기반으로 1996년부터는 소위 경기동부연합의 ‘전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북한에 수재가 났을 때 성남연합에서 가장 먼저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전개했다. 회원 50여 명이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을 전개, 3개월 동안 무려 1만5000가구를 방문해 5500가구한테서 220가마의 쌀을 모았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이 벌어졌는데 이즈음 성남연합은 용인, 광주, 하남, 이천, 여주를 합쳐 경기동부연합으로 전환했다. 1998년 IMF 이후에는 실업자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쌀 모으기 운동 때처럼 집집마다 방문해 실태조사를 하고 운영비를 마련했다. 경기동부연합의 이런 노력은 나중에 선거에서 높은 득표율을 얻는 기반이 됐다.
경기동부연합의 공동체적 생활도 그들의 전설적 활동을 뒷받침했다. 6~7명 정도의 핵심간부들은 상근활동을 했기 때문에 새벽에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을 해 생계비와 활동비를 충당했다. 하루 일과는 새벽 3~4시 사이에 시작됐고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될 수 있었다.
PD 세력하고 비교해서 NL 세력이 집단 문화가 강하고 규율도 엄격하지만 경기동부연합은 다른 지역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군대를 방불케 하는 집단성과 일체감은 광주민중항쟁의 기억으로 단련된 남총련(전남총학생회연합)에 견줄 만했다. 경기동부연합은 개인의 삶을 철저하게 배제한 공동체적 삶 속에서 자주민주통일의 꿈을 키우고 집단의 기억을 더 강화해 나갔다.
한편 1989년부터 범민족대회 개최 등으로 통일운동이 무르익어가고 전국연합의 결성으로 NL계가 총결집한 1990년 초중반은 많은 학생 열사가 탄생하는 시기였다. 1991년 명지대 강경대 학생 타살 이후의 분신정국은 13명의 분신자를 포함해 모두 25명의 열사를 낳았다.
이중 성남 관련 인물은 4명이다. 경원대생 천세용이 분신했고, 유서대필사건과 관련된 김기설도 성남민청련 활동 중 분신했다. 외대 용인의 남현진은 군에서 의문사했고 노동자 윤용하가 분신했다.
1992년부터는 학생운동 관련 대학생 자살자 수가 1995년 1명, 1996년 5명, 1997년 1명으로, 7명 중 4명이 용성총련 소속이다. 한국 사회에서 열사가 본격적으로 출현하는 1980년부터 헤아리면 1980년 김종태의 분신을 시작으로 모두 17명이 자살하거나 의문사했다. 매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추모제는 경기동부연합의 집단성과 일체감을 더 강화시켰다.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민노당)이 창당했다. PD계가 주도해 창당한 민노당에는 NL계의 전국연합과 민주노총 등 다양한 사회운동 세력이 결합했으며 경기동부연합은 창당 준비 과정에 결합해 몇 년 뒤 당내 최대 정파로 성장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사태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진보 진영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됐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사태 때문이었다. 부정선거는 경기동부연합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지만 ‘국민의 눈높이’와 다른 비상식적인 대응을 하면서 오히려 부정선거의 주범으로 몰렸고 보수 진영뿐 아니라 진보 진영한테서도 집중 공격을 받았다.
비례대표 사태에서 경기동부연합은 민노당 시절의 패권주의와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는 자기 보존 의식이 극대화된 모습을 보였다. 경기동부연합은 ‘나머지 전부’와 자신들을 극단적인 진영 논리로 구분하고, 한편으로는 ‘나머지 전부’한테서 자신들을 방어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머지 전부’를 공격했다.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국가주의, 군사정권, 마녀사냥꾼으로 규정하고, 배제당한 자신들은 유대인이자 “불가촉의 적대집단”이며, 대심문관의 판결에 따라 화형을 당한 이단자이자 마녀가 됐다. 이런 극단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진영 논리 속에 당권파는 국민을 향해 사과하는 대신 단상을 점거하는 폭력을 선택했다.
경기동부연합이 단상을 점거하는 순간 세상과 당권파 사이에 선이 그어졌다. 진보 정치 세력에서 나온 기이하고 일탈적인 회의 진행과 소음, 얼마 전까지 같은 편이던 사람들에게 휘두른 폭력, 급기야 분신까지 하게 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는 거꾸로 경기동부연합을 부정선거의 주범으로 확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경기동부연합을 향한 공포가 생겨났다. 경기동부연합은 국민의 눈높이와 상식의 건너편에 있는 ‘나머지 전부’와 다른 한국 사회의 타자가 돼 버렸다. 광주대단지의 8·10 사건이 외부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듯이 말이다.
비례대표 사태 과정에서 경기동부연합은 자기를 규정할 세 번째의 기억과 세 번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그것은 바로 부정선거의 주범으로 몰리며 10여 년의 진보 정당 운동과 수십 년의 자민통 운동이 한꺼번에 부정당한 기억과 스스로 말하지 못한 채 분신한 박영재 당원의 죽음이다.
세 번째 기억은 “세계정당사에 유례가 없는 탄압 속에서도 동지애로 철통같이 무장해, 그 탄압을 정면으로 뚫고” 나온 기억이 됐다. 그리고 세 번째 죽음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위해, 동지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내던”진 사건이 돼 통합진보당을 “활활 타올랐던 박영재 동지의 넋이 살아 있는 정당”으로 만들었다.
범경기동부연합의 계급적 특성은 주사파 학생운동 출신과 기층민을 중심으로 해 새롭게 부상하는 일반 노조의 만남이고 인적 재생산 역시 이들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1996~1997년 한총련 위기 때 용성총련을 포함한 경기동부총련의 노학연대 선봉대는 남총련의 비선계에 맞서 혁신계를 이끌었다. 혁신계는 1990년대 말부터 서울 지역 대학에 파고들어 주요 대학에 반미구국 노학연대 선봉대를 발족시켰다.
2005년 한대련 출범한 뒤에는 학생운동 지도부와 경기동부연합이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한 대련의 7기 의장 박자은, 8기 의장 정용필 등 한대련 간부들이 통진당 중앙위에 참여했으며 김재연은 2010년과 2011년에 한대련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일반 노조는 경기동부연합이 민주노총에서 세력을 키운 주요 통로였다. 특히 저소득층이 많으면서 대규모 공장이 거의 없는 성남시의 지역적 환경을 고려하면 일반 노조를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유리했다.
일반 노조 중에서도 건설 노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성남시는 건설 노조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다. 또 서민 생활과 밀착된 경기동부연합의 운동 방식이 일반 노조 운동과 비교적 쉽게 결합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자행된 두 가지 차별을 대표하는 두 개의 광주가 만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범경기동부연합의 핵심 세력은 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이다. 두 연합의 만남은 유신체제의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배제됐던 지역과, 신군부 시절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봉쇄하려고 신군부가 우선적으로 희생시켰던 지역 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1970년대의 광주(廣州)와 1980년대의 광주(光州)는 각각 그 시대의 가장 강력한 차별과 배제, 그것 때문에 일어난 죽음의 기억을 갖고 있다. 경기동부연합의 조직적 기원인 성대련이 5월 광주를 계기로 두 개의 광주가 만난 일이라면 범경기동부연합은 또 다시 두 개의 광주가 만난 일이라 할 수 있다. 첫 만남이 기억들의 만남이라면 다음 만남은 두 지역 세력의 실체적 만남이다.

두 개의 광주가 유신체제와 신군부의 가장 큰 억압을 받은 지역이라면 새롭게 결합한 일반 노조는 자본의 억압을 가장 심하게 받는 집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동부연합은 지역적으로, 계급적으로, 중첩된 차별을 경험한, 경험중인 집단이다.
광주의 죽음은 1970년대 반미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였고, 동시에 급진적 사회 변혁 운동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다. 광주의 죽음은 죽지 않으려면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모든 운동은 정치 운동이 됐고, 모든 운동가는 정치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일이다. 국가라는 틀 안에서 적과 내 편을 갈라야 한다. 단일한 전선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진영 논리가 최우선이 되는 운동이 시작됐다. 1980년대 중반부터 확산된 주체사상은 이런 진영 논리를 한층 강화시켰다.
주사파를 통해 북한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은 남한의 대표적인 저항이데올로기가 됐다. 주사계 운동조직의 비민주성, 조직 내부의 억압과 강제는 바로 통치의 도구를 아무런 여과 없이 저항의 수단으로 수용한 데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사파가 대중으로부터 괴리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배이데올로기를 저항이데올로기로 수용하면서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죽음은 남한 정부를 부정하게 만들었고 북한을 민족 유일의 민족적 정통성을 가진 국가로 받아들이게 했다.
왜곡되고 차단된 정보 속에 알게 된 김일성과 북한의 실체에서 비롯된 역편향이었다. 그리고 유신의 아이들은 광주의 죽음을 거쳐 주체의 아이들로 바뀌어 갔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남한은 여전히 정상국가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통일운동을 탄압했고 1992년 윤금이 씨 살해사건, 2002년 여중생 사망사건처럼 미군범죄도 여전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부는 운동권을 계속 탄압했고 주사파 운동권은 여전히 미국은 적으로, 북한은 대안적 국가 모델로 간주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북한을 더 이상 대안으로 여길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고 주사파의 존립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남한 정부와 민중 간의 적대적 전선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북한에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실상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1998년에는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로 남한에 드디어 민주적 근대국가가 성립한 것이다.
남한 정부 밖에서 자신을 구성했던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주사파에는 이탈자가 늘어났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에게 남한 정부와 민중은 여전히 적대적 단일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관계였다.

남한 정부의 정상화와 북한 체제의 위기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돌아갈 곳이 없게 됐다. 남한 정부는 스스로 외면했고 북한이 여전히 대안이라 주장해도 믿어줄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그리고 국가를 기획한 근대로부터 배제되고 말았다. 국가와 근대의 밖에 존재하는 하위주체가 된 것이다.
진영 논리는 밖으로 적대성을 강화하고 안으로 이견을 봉합한다. 적대성은 진영 논리의 존재 기반이다. 적대성이 커질수록 내부의 단결은 강조된다. 단결이 강조될수록 내부의 이견은 단결을 해치는 요소로 간주되면서 봉합돼 버린다. 사고와 운동은 정지된 채 사람들은 깃발의 노예가 된다.
진영 논리는 집단기억을 매개로 배가된다. 집단기억은 기억을 고착시킴으로써 집단 내부를 통합하고 배타성을 강화시킨다. 경기동부연합은 차별과 배제의 기억뿐만 아니라 승리의 기억 또한 매우 강하다. 경기동부연합의 헌신과 열정이 만들어낸 전설과 기적 같은 성과는 경기동부연합을 더 강고하게 결합시키는 힘이면서 동시에 자신들만의 기억에 갇히게 하는 요인이 됐다.
고착된 기억은 경기동부연합이 과거의 전선을 여전히 현재의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강한 결속력과 군사 조직과 유사한 규율로 자신들을 무장했다. 안으로는 비판 없는 시간이 계속됐고 밖으로는 패권주의가 날로 강화됐다.
강한 결속력은 민노당 시절 패권주의로 나타나면서 당악을 장악하는 기반이 됐지만 비례대표 사태에서는 고립의 이유가 됐다. 집단의 결속력이 강할수록 작은 상처도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은 부정선거를 반성하고 사과할 수 없었다. 부정선거를 인정하는 순간 상처가 나고 균열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다. 바로 ‘집단의 덫’에 빠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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