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전용 고급 세단의 진짜 노획 부대는?
김일성 전용 고급 세단의 진짜 노획 부대는?
  • 길도형 도서출판 장수하늘소 대표
  • 승인 2022.01.1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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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8일 원산을 점령한 국군 제6사단 선봉 제7연대는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원산에서 1박 했다. 유엔군사령부에서는 숨돌릴 틈 없이 평양 점령 명령을 하달한 상태였다. 10월 1일, 동해안을 따라 북상한 제3사단 23연대가 삼팔선을 넘으면서 시작된 북진 작전은 각 사단, 연대별로도 경쟁이 붙었다.

다른 사단들에 비해 뒤늦게 북진을 시작한 6사단은 7연대를 선봉으로 해서 10월 6일에야 춘천 북단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모진교를 건넜다. 모진교는 6월 25일 새벽 북괴군의 일제 남침이 시작되었을 때, 7연대 3대대 9중대 1개 소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당시 일요일 당직을 보고 있던 9중대장 이내흥 중위는 포성이 울리자 다리 관측소로 올라가 건너편 화천 방향을 주시했다. 그러기를 1분여, 이내흥 중위는 남침을 개시한 북괴군의 집중 조준 사격으로 즉사한다.

모진교를 방어하던 9중대 1개 소대원들은 필사적으로 적의 도하를 막아섰지만, 전차를 앞세우고 밀고 내려오는 적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며 모진교는 순식간에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105일여 만인 1950년 10월 6일, 7연대가 이번에는 모진교를 지키고 있던 소규모 적병의 저항을 가볍게 제압하며 북진을 개시했다. 화천읍을 돌파한 7연대는 산양에서 주파령을 넘어 금성천을 건너 김화까지 파죽지세로 내달렸다.

금성, 회양, 고산, 안변을 접수한 데 이어 1950년 10월 18일 원산을 점령했다. 제3사단 23연대도 같은 날 원산에 입성했다.

평양으로 진격 레이스

10월 19일 저녁 김종오 사단장에게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신속한 평양 점령 명령이 하달됐다. 그러나 사실 그 명령은 6사단뿐 아니라 북진 중인 전군에 하달된 명령이었다. 10월 20일 7연대가 이번에도 6사단의 평양 탈환 선봉에 섰다. 당시 전군을 통틀어 연대원 전원이 차량 기동이 가능한 부대가 7연대였다.

용산 전쟁기념관 2층에 상설 전시되고 있는 김일성 승용차전쟁기념관 안내판 설명 : 1948년 소련에서 생산된 ZIS-110리무진은 소련이 모택동과 김일성에게 준 차량이다. 6.25전쟁 덩사 1950년 10월 22일 국군 6사단 7연대(초산부대)가 평양 동북방 약 100km 지역인 청천강변에서 노획하였다. 1951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이 승용차를 미8군 사령관 워커장군의 부인에게 기념품으로 선사하였다. 워커장군 부인은 1951년 7월 1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차른 인수하고 고향인 조지아로 가던 중 고장이 나서 다른 승용차와 교환하고 말았다. (사)유엔한국참전국협회는 1969년부터 14년간 이 차의 행방을 탐문하던 중 1981년 미국 뉴저지 주의 자동차 수집상이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되찾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르고 미국으로 건너간 지 31년만인 1982년 10월 22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유엔참전국협회 지갑종 회장은 2013년 7월 12일 6.25 전쟁 정정 제 60주년을 맞이하여 이 승용차를 전쟁기념관에 기증하였다.

7연대의 길을 막은 10연대 

원산을 출발한 7연대는 1대대를 선봉으로 하여 낭림산맥을 넘었다.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다. 전쟁 초기부터 춘천과 원주 일대의 차량을 징발하는 등 준비가 잘 되어 있던 6사단 중에서도 7연대는 전 병력의 차량 기동이 가능했다.

그런 이점을 살려 사단장은 7연대를 선봉으로 삼아 원산과 평양을 잇는 평원가도平元街道를 따라 파죽의 기세로 진격해 갔다. 후퇴하는 적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분쇄하며 원산과 평양의 중간쯤인 양덕을 선점하고 성천으로의 진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곡산 방면에서 국군 제8사단 10연대 병력이 양덕으로 입성했다.

양덕에 먼저 들어와 있던 7연대 병력은 10연대 병력과의 반가운 조우를 기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10연대는 7연대 병력이 배치된 진지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해 왔다.

오인 사격으로 여긴 임부택 연대장은 수색중대장을 시켜 아군임을 알리도록 명령했다. 수색중대장 윤수용 중위가 지프 차량에 탑승, 10연대 병력의 총격을 무릅쓰고 달려가 7연대가 먼저 양덕에 들어와 있음을 알리고 적이 퇴각했으니 사격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10연대 병력의 총격은 멈추지 않았다. 7연대 병력이 아군의 총격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는 동안, 10연대 병력이 지름길을 통해 성천을 향해 행군해 가기 시작했다. 전원 차량 기동이 가능한 7연대는 뜻밖의 상황에 길을 비켜 달라고 했다.

그러나 10연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 지휘관들에게 지체 없는 전진을 재촉할 뿐이었다. 이에 김종오 사단장까지 달려와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8사단장이 나서며 평양 선점의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차량을 이용해서 신속히 평양을 향해 진격할 수 있었던 제7연대는 도보로 전진하는 제10연대의 뒤를 따라 느릿느릿 따라가야 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7연대, 나아가 6사단으로서는 양덕에서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성천을 향해 진격해 갔으면 당일로 가장 먼저 평양을 선점할 기회를 놓쳐야 했다.

10연대와 7연대는 성천 삼거리를 지나면서 국군 제1사단이 평양을 선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김종오 사단장은 전 병력 성천에 멈출 것을 지시했다. 물론 8사단 10연대는 성천 삼거리에서 좌측 방향으로 길을 잡아 평양을 향해 계속 행군해 갔다.

성천 삼거리 공터에 예하 연대장들과 주요 지휘관들을 집합시킨 김종오 사단장은 평양을 이미 제1사단과 유엔군이 탈환한 마당에 굳이 평양 진격을 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얘기했다.

“7연대가 양덕을 점령하고 곧바로 평양으로 달려갔어야 했는데, 아쉽게 됐소. 이렇게 된 마당에 우리까지 굳이 평양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겠소.”

7연대장이 사단장의 말을 받았다.

“예, 맞습니다. 어차피 대통령께서 북진통일을 명령하신 만큼 우리는 곧바로 북진, 적을 추격 섬멸하는 게 통일을 한시라도 앞당기는 길입니다. 군단장님께 진격 명령을 요청하시지요?”

2연대장과 19연대장을 비롯한 예하 각 지휘관들도 같은 뜻을 내비쳤다.

무전병으로부터 수화기를 받아든 김종오 사단장이 군단 지휘부와 무전을 주고받았다.

통화를 끝낸 사단장이 부하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우회전해서 북진한다. 7연대는 전 병력 차량을 이용해서 순천을 점령한다.”

차량에 탑승하여 성천을 출발한 7연대는 1대대와 2대대가 차례로 순천을 향해 출발했다. 3대대는 예비대가 되어 연대본부와 함께 일정한 시차를 두고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에 이어 개천, 개천에서 희천으로 진격을 시작한 7연대는 1대대가 선봉에 섰다. 연대본부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가 열차를 이용해서 만포 방면으로 탈출한다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연대장은 1대대장 김용배 소령에게 전속력으로 추격하여 생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대용 대위가 이끄는 1중대가 전속력으로 달려 기차를 따라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간발의 차로 김일성은 기차를 탈출한 뒤였다.

차까지 버리고 도망친 김일성

김일성을 비롯한 지도부는 기차에 싣고 가던 소련제 리무진과 승용차들을 타고 65번 도로를 이용해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65번 도로를 잇는 화평참 부근 교량이 미군기 폭격으로 파괴됨에 따라 김일성 일행은 차량을 버리고 나룻배를 이용해서 강을 건너 도주한 것이다.

화평참까지 추격했지만, 강가에는 김일성 일행이 버리고 간 차량들만 흩어져 있었다. 1중대원들과 후속 중대원들까지 도착해서 차량을 도로 쪽으로 견인해 올렸다.

김일성차 노획한 장소와  작전 토론 중인 임부택 7연대장(좌), 김종오 6사단장(우)
김일성차 노획한 장소와 작전 토론 중인 임부택 7연대장(좌), 김종오 6사단장(우)

1중대원들은 그 중에서도 소련제 최고급 리무진에 눈길이 갔다. 이대용 중대장과 뒤이어 도착한 김용배 대대장은 김일성 전용 세단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후속 부대가 사령부로 옮겨 갈 수 있게 조치했다. 연대장은 예비대로 연대본부와 함께 움직이던 3대대장에게 1대대가 노획한 차량을 수거해 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3대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도로에 견인되어 있다던 20여 대의 고급 승용차들 가운데 소련제 고급 세단은 보이지 않았다. 현장을 지키고 있던 몇 명의 1대대 본부대원 말로는 2연대장(함병선 대령)이 수행 부관들과 함께 현장을 지나다 끌고 갔다는 것이다.

그 날 김일성 전용 세단 노획과 관련해서 임부택 연대장은 ‘6.25 실전비록’ 『압록강아 말해다오』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제7연대의 추격을 받은 인민군은 파괴된 몇 대의 차마저 제거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우회하여 강을 건너려다가, 수심이 깊어 차가 물에 빠지자 그대로 버려둔 채 강을 건너 도주하고 말았다.

이 노획 차량 가운데 승용차는 대부분 일반 시중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 세단차였으며, 그 중 최고급 차량은 김일성이 사용했던 차로 알려져 사단으로 후송되었다가, 그 후 이승만 대통령께 증정되었다.

당시에 이 차를 버리고 간 무리들은 북괴의 각료급이 아니면 적어도 고급 간부들인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또한 이들이 희천 방면으로 후퇴하였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을 알게 된 대대장(김용배 소령)은 한시라도 빨리 희천을 탈환하기 위하여 노획품을 수획 부대에게 정리하도록 위임하고, 통해에 장애가 되는 차량만 밀어낸 다음 청천강을 도하하였다.’

훗날 알려진 바로는 7연대 1중대가 김일성 전용 세단을 노획하고 후속 수획 부대에 맡겨 놓고 청천강을 도하 희천을 향해 북진해 가는 동안, 사단 예비대로 후방에 있던 2연대 함병선 대령이 외가가 있는 덕천 맹산을 부관 몇 명을 동행하여 방문했다고 한다.

방문 후 돌아가는 길에 7연대 1대대 본부중대원들이 지키고 있던 차량을 발견했고, 부관들을 시켜 몰고 갔다는 것이다. 노획물에 대한 일종의 무단 점유를 한 셈이었다. 그렇게 김일성 전용 세단은 2연대장 함병선 대령에 의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증정하는 형식이 되었던 것이다.

<세 번의 혁명과 이승만> 크라우드 펀딩, 후원 독자 참여 기다려

 

이승만도 돌계단을 올라 배재학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 순간이 한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승만은 상상도 못 했다. 건물 안 넓은 복도에는 스무 개의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프롤로그; 189542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팩트로 추적하는 신간 <세 번의 혁명과 이승만>이 출간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독자들의 후원을 기다리고 있다. 저자 오정환(MBC 보도본부장, 이승만학당 6기 모임 회장)은 오랜 경력의 프로페셔널 언론저널리즘 정신으로 시중에 회자되는 이승만에 대한 오해와 진실들을 팩트 체크를 통해 바로 잡으며 이해하기 쉽게 제시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학자나 전문 연구자들의 이승만 연구서들과는 또 다른 미덕을 갖추고 있다. 출판사 장수하늘소는 출간을 위해 후원 독자들이 참여하는 크라우드 펀딩을 열었다. (후원 참여 문의 : 010-2864-4149 길도형 대표)

 

주요 내용

 

<이승만은 이런 사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이승만이 주도했다

상해임시정부의 처음과 끝이었다

여성 교육과 양성평등의 선구자

광복군을 창설하고 이끌다

김구를 끝까지 챙기다

 

<오해와 진실>

교포들의 성금을 함부로 사용했다?

프란체스카는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다 이승만을 만났다?

소련군이 해방군이라고?

미군정이 아니었으면 인민공화국이 건국 주체가 됐을 것이다?

이승만이 서울 사수 녹음을 하고 달아났다고?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이자 친일파다?

미국 망명인가, 하와이 요양인가?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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