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 간 27분의 왕이 통치했던 나라이다. 이 중에서 후대가 추앙하는 성군(聖君)이 과연 몇 분이고 또 누구일까? 강연 때 자주 이 질문을 하면 예외 없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왕이 세종대왕이고 그 다음은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정조가 언급되고 끝나버리기가 일쑤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 이래 74년 동안 모두 12분의 대통령과 한 분의 총리가 나라에 봉사했다. 이들 13분 중 누가 성군에 해당될까? 세계가 우러러보는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과연 몇 분이고 누구일까?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성군으로 칭할 임금이 잘 해야 2분밖에 없는데 대한민국이 지난 74년 동안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지도자를 두 분이나 가졌으니 우리는 얼마나 축복 받은 민족인가?
좌파들의 회칠과 덧칠에 따라 역사가 왜곡되어 있으나 건국의 아버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참 애국자 대통령 박정희 장군은 세계가 우러러보는 그리고 부러워하는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지도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천재 중의 천재로 한반도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았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전적으로 이승만 대통령 덕분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도자로서 최고 최상의 덕목을 가진 분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애국심 하나로 나라를 살리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 대한민국에 천지개벽을 일으켰다고 확신한다. 서독의 에르하르트 총리가 라인강의 기적을 만든 것 이상으로 한강의 기적을 창출했다.
에르하르트 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적을 창출했다. 시대적으로 보면 라인강의 기적이 앞서나 전체적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양과 질에서 한강의 기적은 라인강의 기적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세계의 지도자들과 학자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찬사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는 차고 넘친다. 대표적 사례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의 목표는 자립경제력을 갖춘 현대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는 성공했고 세계는 놀랐다. 박정희에 관해 모든 자료를 수집하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는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
“많은 지도자들은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데 관심과 정력을 소모한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적 심판에 맡긴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
“박정희 대통령은 대기업을 일으켜 부유한 나라로 만든 훌륭하고 매우 강한 지도자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러시아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다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잘 알고 있잖은가? 박정희의 판단이 옳았음이 뚜렷이 증명되었다.”
“박정희의 판단은 언제나 옳았다. 그리고 그가 손대는 것마다 성공하였다. 가히 마법의 손이다.”
리처드 스틸웰 전 유엔군사령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나의 인식과 평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립된 것이다. 하나는 그의 탁월한 정치적 경륜과 철학에 근거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훈훈한 인간성에서 느껴진 것이다. 그에게서 느낀 나의 감정은 자기 조국을 위해서 저처럼 노심초사하는 정치인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을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로 지칭하는 데 조금도 인색할 수 없다.”
피터 드러커 미국 경영학자
“2차 세계대전 후 인류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박정희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경제 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이다.”
엘빈 토플러 미래학자
“민주화란 산업화가 끝나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자유화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된다.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매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이 새마을운동으로 불과 20년 만에 세계적인 무역국가가 되었음을 경이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개발도상국 중 대표적 승자로 한국의 박정희 시대를 지목한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박정희는 진정으로 국력을 키웠다. 그는 다른 후진국 지도자와 달리 결코 부패하지 않았다.”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
“한국이 하나의 거대한 기업체라면 박 대통령은 CEO처럼 국가경제를 관리했다. 조국 근대화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비전을 바탕으로 개혁을 단행했으며 그것도 매우 창의적이고 능률적이었다. 그는 조직 운영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어느 지도자가 박정희 대통령만큼 이렇게 다양한 내용으로 찬사를 받은 경우가 있을까? 그는 무에서 유를 창출했다. 이런 대통령을 대한민국이 갖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공사 구분이 분명하고 청렴한 성품
박정희 대통령은 뛰어난 지능을 가졌고 무엇이든 신속히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었다. 모든 것을 잘 파악했고 확실하게 장악했다. 집념이 참으로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지도자였다. 사심(私心) 없는 자기희생적 지도자로서 생전에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방종에 빠지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으며 검소하게 살았지만 비전은 원대했다. 청렴했고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없다. 박 대통령은 집권 18년 동안 단 한 번도 친인척이 서울에 올라오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또한 청와대로 초청한 적도 없으며 단 한 푼의 재산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며 특혜도 베풀지 않았다. 사후 남긴 것은 5·16혁명 당시 소유하고 있던 집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와 청렴성과 관련해 많은 사례가 회자되지만 각기 한 사례를 소개한다.
박 대통령에게는 자신을 어머니 같이 키워 주신 누나가 있었다. 당시 누나는 경제적으로 무척 어렵게 살아 육영수 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비서관을 통해 박 대통령 모르게 누나의 아들인 조카에게 택시 3대로 먹고 살도록 주선을 해 줬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박 대통령은 친구이기도 했던 담당 비서관을 파면하고 택시를 처분함과 동시에 누나와 조카를 고향으로 내려 보냈다. 누나의 원망을 들은 박 대통령은 ‘누님 제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때 잘 모시겠습니다“ 하고 냉정하게 외면했다고 한다.
미국 한 방위산업체 사장이 한여름에 박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집무실에 에어컨을 켜지 않고 일하는 모습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자기 회사의 무기 구입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고 작은 성의라 하며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의 내용을 확인 한 후 대통령은 “사장님 하나만 물읍시다.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이 돈의 가치만큼의 무기를 가져오시오”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성공적 나라 운영의 핵심은 그의 용병술에 있다.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었고 발탁한 사람들 하나하나가 나라 운영의 기둥으로 역할을 했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썼고, 기용한 사람은 믿고 맡겼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늘 듣는 자세를 가졌다. 특히 친인척이 이권이나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철저하게 막았다.
모든 정책이 사전적으로 잘 준비되었을 뿐 아니라 상호 일관성을 유지했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란 말이 대통령의 입을 통해 언급된 적은 없지만 경제정책의 경우 결과적으로 볼 때 사유재산권의 확립과 선택의 자유를 바탕으로 민간의 창의성을 존중했다.
경제 발전을 위해 기업가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목표달성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총동원하고 정부-기업 협력 네트워크를 구성해 장애 요소를 과감히 제거해 줬다. 기업가들을 격려하고 도와줬으나 뇌물을 받지 않았다. 그는 현장주의자였다.
박정희란 CEO의 현장주의 원칙은 ‘명령은 5%, 확인과 감독은 95%’로 확인된다. 최대 공로는 ‘하면 된다는 정신(can-do-spirit)’을 심어준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한강의 기적이 창출되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치세를 국가주의(statism)나 개입주의로 지칭하나, 이는 표피적 관찰이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괄목한 고도성장과 새마을운동의 놀랄 만한 성공의 배경에는 자율화 개방화의 논리가 구석구석에 배어 있으며 채찍(stick)과 당근(carrot)을 적극 활용한 시장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세계 최빈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나라로 탈바꿈
5~8대에 걸쳐 18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건국 초기 초라하기 짝이 없었던 최빈국 대한민국을 인류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자랑스러운 나라로 탈바꿈시켰다.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미국이 2% 정도 성장한 데 비해 서독이 6% 정도 성장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박 대통령 집권 18년 동안 1인당 소득이 실질적으로 10배 증가했으니 라인강의 기적은 한강의 기적에 비견할 바가 전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임기 중 3차에 걸린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는 바 여러 지표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1차 5개년 계획(1962-1966) 기간 중 한국경제는 평균 8.3% 성장, 2차 5개년 계획(1967-1971) 기간 중 11% 성장, 3차 5개년 계획(1972-1976) 기간 중 9.6% 성장했다.
1961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이 82달러였는데 1546달러로 증대했고, 국민총생산의 경우 1961년 20억 달러에서 1979년 630억 달러로, 수출은 같은 기간 중 4100만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증대했다.
남과 북의 1인당 GNP가 82달러 대 320달러로 북한이 월등히 앞섰으나 박 대통령 집권 9년 만인 1970년 남북의 1인당 GNP는 역전됐다.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세계의 독립국가 125개국 중 101위로 우간다,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토고, 파키스탄과 엇비슷했고 북한의 320달러는 50위였다.
일부 식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이 “우리는 먼저 ʻ산업화ʼ에 성공했고 이어 ʻ민주화ʼ에 성공했기에 이제 ʻ선진화ʼ를 지향하면 된다ˮ고 주장한 이래 언론이나 일반인들도 이러한 역사 인식과 시대 구분을 그대로 수용하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이렇게 인식하고 개념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에 이러한 개념과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정책을 논의·전개하게 되면 자칫 정책을 그르칠 염려가 매우 크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가 아니 어쩌면 우리 5000년 역사가 민주화의 역사고, 산업화의 역사고, 선진화의 역사가 아닌가? 셋 중 어느 하나도 아직 완결 완성된 것이 없으며 모두 현재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산업화·민주화·선진화의 세 단계로 인식하는 것은 역사학파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발전 단계론적 사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인류사회가 원시 공동사회-고대 노예사회-중세 봉건사회-근세 자본주의사회-공산주의사회로 발전해 나간다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세계관이 참으로 순진한 그리고 잘못된 견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최근 역사를 산업화·민주화·선진화라는 세 발전단계로 인식하면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한국 민주화를 특정 세력들이 자신들의 전유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큰 문제이다. 한국 민주화는 각기 다른 시점에서 많은 다른 집단이나 사람에 의해 진행된 것이지 80년대 민주화 세력의 기여 정도는 일반적 인식보다는 훨씬 작다.
외형만 관찰하면 한국에서의 민주화는 첫 번째 건국한 해인 1948년, 두 번째 4.19민주혁명이 발생한 1960년, 세 번째 5.16 후 2년여 지속된 군정이 마감되는 1963년, 그리고 네 번째 6월항쟁에 뒤이어 6.29선언이 발표된 1987년 등 네 차례 이뤄졌다. 실질적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이승만 대통령, 4.19 학생의거, 80년대 민주화 세력의 노력으로 성취되었다.
건국과 전쟁의 와중에서 이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분들의 노력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기초로 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자체가 우리의 5000년 역사에서 첫 초석이고 가장 큰 민주화 작업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정점(頂點)에 달했던 2차 세계대전 직후 그 극심한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위업이 없었다면 1980년대 민주화가 가능했겠는가?
정부 수립 후 3년이 안 된 시점에 공산세력이 6.25사변이란 무력도발을 했을 때 이를 격퇴시킨 고군분투가 건국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의 두 번째 초석이다. 이승만 시기의 반공주의가 없었더라면 민주주의는 커녕 과연 대한민국 자체가 수호될 수 있었을까?
80년대 민주화는 세 번째 방점이다. 유신체제로 대표되는 굴곡된 비(非)민주적 통치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우리는 ʻ민주화 운동ʼ이라 불러왔다. 이 과정에서 ʻ닭장ʼ과 ʻ철창ʼ을 오간 사람들을 ʻ민주화 투사ʼ라 부르고 이들에 의해 민주화가 완성된 것으로 생각들 한다.
80년대 민주화 투사들은 참으로 고생을 했으며 그들은 큰 역할을 했다. 80년대 민주화 투사들의 공로를 인정하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그들이 민주화에 대한 보상을 받아 챙긴 것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불명예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한국 민주화의 초석을 놓은 지도자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안했느니, 독재자니 뭐니 따지는 것은 본질에서 한참 빗나간 비판이다.
CSP(Center for Systemic Peace)에 의하면 1946년에서 2010년까지 전 세계에서 750회의 쿠데타가 발생했는 바 그 쿠데타들 중 1923년 터키에서 일어난 케말 파샤의 쿠데타,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 쿠데타, 1961년 한국의 박정희 쿠데타가 세계에서 성공한 3대 쿠데타로 꼽힌다.
케말 파샤와 나세르는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정을 건설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산업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은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한강을 건너온 것이 아니고 빈곤퇴치 사회개조 조국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산업화를 달성했다.
정치학자 로버트 달에 의하면 참다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하려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산업적 기반과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중산층의 형성, 그리고 국민들의 민주시민 의식이 필수적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성공에 따른 중산층의 형성과 시민의식의 고양이 민주화의 인프라를 구축했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민주화란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산업화는 반드시 민주화를 가져오지만 자유민주선거가 되풀이된다고 해서 후진국 경제가 발전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필리핀과 인도와 홍콩이 좋은 사례이다. 필리핀은 미국의 영향으로 그리고 인도는 영국의 영향으로 민주주의가 오래 전에 도입되었으나 산업화는 이직 초기이다. 홍콩은 자유와 시장경제로 산업화에 성공해 이제 민주화를 기대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성공적으로 이룩한 산업화 때문에 산업화를 위해 자신이 구축한 유신체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내부적 모순을 안고 살다 서거했다.
1998년 건국 50주년을 맞아 7월에 한국갤럽에서 건국 이후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고 어느 대통령이 추진한 것인가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10대 업적 중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것이 4개나 된다.
대한민국 50년 역사상 제일가는 큰 업적은 박정희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였던 새마을운동이고, 이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대한민국 50년 역사상 세 번째 위대한 업적이었으며,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7위, 그리고 5.16혁명 이후의 행정개혁이 9위로 나타났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대한민국 50년 역사상 일곱 번째 위대한 업적이다. 빈곤 탈출과 자립경제를 소망했던 대통령으로서는 집중과 선택을 위한 청사진이 경제개발5개년계획이었다.
5개년 개발계획의 구체적 내용도 중요하지만 국내외 정치 상황과 경제 사정이 변함에 따라 근원적인 정책 변화가 수시로 이뤄진 사실은 주목을 요하며 서거하기 6개월 전에는 성장의 화신이었던 대통령이 자신의 성과와 성취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정책을 수용했다.
박정희 대통령 통치 18년간은 통상의 대통령의 통치가 아니고 혁명가 박정희가 자신의 일생을 조국을 위해 바친 기간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의 진면목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통상적 기준이 아닌 혁명가 박정희 전제로 하여 평가될 때만이 올바르게 이뤄질 것이다.
촛불혁명이라는 명목으로 새 정부가 들어섰고 대한민국을 구석구석 파괴한 세력들이 왜곡 폄하한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을 반듯하게 반드시 회복시켜야 한다. 그 첩경은 3.9 대선에서 우파가 정권을 탈환하는 것이다.
※ 이 칼럼은 경제개발5개년계획 60주년 기념 컨퍼런스 기조연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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