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전몰 장병만을 위한 국군묘지 만들자
[논단] 전몰 장병만을 위한 국군묘지 만들자
  • 길도형 도서출판 장수하늘소 대표
  • 승인 2022.07.18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국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백전백승의 강철 같은 신념으로/안강에서 함흥에서 길주 청진 혜산진까지/피 흘려 싸워온 빛나는 수기사단

(후략)

- 수도기계화사단 사단가 1절 부분

수도기계화보병사단(창설 당시 사단명은 수도사단. 이하 수기사) 사단가 1절에는 6·25전쟁 당시 안강·기계의 낙동강방어전투 이후 함흥, 길주, 청진을 거쳐 압록강변 혜산진까지 북진의 전과가 그려진다.

가사에 등장하는 지명 중에 특히 안강은 영천전투, 신녕전투와 함께 국군이 거둔 낙동강 기계·안강전투의 그 현장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으로 나오는데, 당시 전투를 중심으로 보자면 영천과 접한 부분이다.

경상북도 안강읍 도음산 384지구 전투 당시 육군사관학교 1학년 재학 중 전쟁 발발과 함께 전장에 나선 스무 살 청년 황규만 소위가 소대를 이끌고 있었다. 7월 한 달을 낙동강 저지선에 가로막혀 지체한 북괴군은 연합군 참전 소식이 속속 전해지는 가운데 낙동강을 돌파하기 위한 총력전을 벌인다.

그러나 인민군의 기세는 낙동강까지 내려오는 동안 국군의 분전과 참전 미군 전투기들에 의한 공습으로, 남침 초기 10개 전투사단 13만 명의 병력이 5개 사단 약 6만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마저도 10만여 명의 예비병력을 지속 충원한 결과였다.

유엔군 참전이 본격화하고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국군의 전투력 또한 급속히 배가된 상태였다. 그러나 북괴군 지도부는 초조해진 김일성의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 독전에 밀려 국군 포로뿐 아니라 남한 청년들까지 강제로 끌어다 의용군이란 이름의 총알받이로 낙동강전선에 밀어 넣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안강·기계전선 도음산 384고지에서는 국군의 한 소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수도사단(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6연대는 북괴군 12사단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황규만 소위의 소대는 북괴군에게 포위된 채 전멸 위기에 빠졌고, 김○○ 소위의 소대가 급히 증원 투입된다.

급박한 전황 속에 통성명 겨를도 없이 김○○ 소위는 선봉에 서서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전투를 치른다. 혼신을 다한 수도사단 6연대의 분전으로 북괴군 12사단의 공격은 결국 돈좌(頓挫)되고 만다.

이천 호국원에 모셔진 6.25전사자 유골함. 분명하게 전남 곡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현충원이 아닌 호국원에 모셔져 있다./길도형 제공
이천 호국원에 모셔진 6.25전사자 유골함. 분명하게 전남 곡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현충원이 아닌 호국원에 모셔져 있다./길도형 제공

6·25 참전 장군, 사병 묘역의 전사한 동료 곁에 묻혀

북괴군을 격퇴했지만 수도사단을 중심으로 한 국군도 도음산 일대 전투를 통해 1500여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야 했다. 전사자들 가운데에는 선봉에서 돌격해 가던 김○○ 소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적의 기관총탄을 맞고 절명한 것이다.

황 소위는 자신을 구하러 온 김○○ 소위의 이름도,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유해를 임시로 땅에 묻고 표식을 해두고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찾아올 것을 약속하고 또 다른 전선으로 떠난다.

그리고 휴전 후 10여 년이 지난 1964년 황 소위는 고지를 찾아가 김○○ 소위의 유해를 찾는 데 성공했다. 황 소위는 유골을 수습하여 5월 29일 국립묘지에 안장했지만, 묘비에는 ‘육군 소위 김○○의묘’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

황 소위는 해마다 명절이면 김○○의 묘를 찾았고, 반드시 김 소위의 이름을 찾아내 묘비에 새겨주겠다고 다짐했다. 꾸준한 노력 끝에 육군보병학교(현 갑종) 1기 출신 라보현 대령(예편)을 만나게 되어 보병 1기 동기 명부를 바탕으로 마침내 김 소위의 이름을 찾게 된다.

김수영 1922년생.

처음에는 그의 이름을 넣을 생각으로 묘비의 이름을 공백으로 남겨뒀지만 후대에도 역사적 산물로 남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유가족 동의하에 묘비의 공백에 이름을 새기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1975년 준장으로 진급한 황 소위도 2020년 6월 21일 별세한다.

故 황규만 장군은 훗날 자신이 죽으면 장군 묘역이 아닌 김 소위의 옆자리에 묻어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래야 자신의 가족들이 자신과 함께 김○○ 소위도 함께 돌봐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지난 2020년 6월 25일. 그의 바람대로 그는 김수영의 묘 옆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로써 故 황규만 준장은 사병묘역에 안장된 두 번째 장군이 된다. 1950년 8월 안강전투에서 잠깐의 인연을 뒤로 하고 헤어져야 했던 두 전우는 국립묘지 사병묘역에서 영원한 만남을 이어가게 됐다.

지난 4월 중순경 어머니가 “이거 네가 보관해라” 하며 건넨 증서. 2016년 보훈처가 박근혜 대통령 명의의 ‘(참전)국가유공자증서’를 어머니한테 보냈는데 잊고 계시다 생각난 모양이다.

선친은 6·25전쟁 개전부터 신녕전투, 초산진격전, 사창리전투, 용문산-화천호전투, 김화 금성천과 교암산을 중심으로 한 2년여에 걸친 고지·산악전을 거쳐 1953년 6월 금성지구 전투를 끝으로 전 7월 27일 휴전까지 37개월 넘게 꼬박 국군 6사단 7연대가 치른 전투 현장에 있었다.

1955년 1월 이등중사로 제대. 16세 소년에서 갓 스물을 넘기기까지 소년은 전장에서 청년이 되어 갔다. 선친을 거쳐 간(?) 주요 지휘관만 김종오 사단장, 임부택 연대장, 이남호 대대장, 장도영 사단장, 백인엽 사단장…

51년 4월 사창리전투가 있기 직전 선친은 장도영 사단장 명의의 표창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부대원 전원이 개인화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후퇴하는 마당에 군장 속에 챙겨 넣었던 표창장을 챙겼을 리 만무했다.

사단장 표창장은 그렇게 사라졌지만 표창장은 이후 선친에게 대단한 자부심이 되어 줬다.

1974년부터 시행된 강원도 산간 지역 화전민 철거 사업 대상자가 되는 바람에 선친은 수시로 면사무소를 찾아가 담당 직원뿐 아니라 면장, 심지어는 횡성군수한테까지 좇아가 읍소도 하고 행패 아닌 행패도 부리며 항의했으나 정부 시책에 따른 결정을 일개 화전민이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가평으로 이주한 지 얼마 안 지난 1976년인가 면서기가 찾아와 선친에게 6·25 참전 사실을 확인하고 군청에 가서 훈포장 심사를 받으라고 전했다. 그러나 당시 선친은 인천에서 산업재해로 사업체를 말아먹은 데다 화전민으로 강제 이주까지 당한 입장이라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까짓 것 됐으니까 좇아댕기며 못 살게 굴지나 마, 이 자식들아!”

그렇게 훈포장이든 뭐든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선친의 똥고집으로 무산됐다. 그리고 내가 대학 다니던 시기, 한 번 더 기회가 있었다는 어머니 얘기로는 그마저도 네 아버지 똥고집으로 박차 버렸다는 것. 내 등록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지 모르니 심사받자고 종용했다가 부부싸움 횟수만 더 늘어났다.

선친이 1997년 5월 말 폐암 악화로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14년여가 지나 호국원으로 모시라는 통보를 받고 이천 호국원으로 이장한 때가 2011년 8월 16일. 그리고 잊고 지냈는데 5년여가 지나 박근혜 정부에서 어머니한테 국가유공자증서를 보내온 것이다.

내가 늘 바라던 게 국가유공자는 당사자가 신청하기 이전에 국가가 직접 발굴하고 조사하여 찾아가는 예우였다. 어머니가 얘기를 하지 않아 모르고 있었는데, 박근혜 정부가 선친에게 그리 한 것이다. 선친이 돌아가신 지가 아들 나이와 같다. 한 세대가 끝나갈 만큼 꽤나 많이 지났다.

이승만도 그렇고 박정희도 그렇고, 아무리 시절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휴전 후 양은 쪼가리 훈장이나 갱지 표창장 한 장 참전용사 전원에게 줄 생각을 안 했을까, 못 했을까?

전쟁 중, 장성을 비롯한 지휘관들과 그들이 상신한 장병 중 상당수가 훈포장을 받았겠지만, 그래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게 최전선에서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총포탄과 적의 총검을 무릅쓰고 돌격했던 모든 병사에게 양은 한 조각이 인색했던 대한민국에 대해서이다.

어른들이 밭일 나가고 아이들밖에 없는 집에 괴한처럼 찾아든 상이용사들은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에 거친 목소리로 먹을 것을 내오라고 한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괴한 같은 상이용사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

일 나가면서 아이들 먹으라고 쪄둔 감자며 고구마, 옥수수를 소쿠리째 내온다. 상이용사는 허겁지겁 몇 개 집어먹고 나서 물까지 한 대접 갖다 달라고 해서 마시고는 자루에서 바가지를 꺼냈다.

“뭐든 좋으니까 한 바가지 퍼오너라.”

당시 강원도 산골짜기 동네에 보리쌀도 귀한데 쌀이 있을 리 없고, 아이들은 건넌방에 보관 중인 알강냉이 한 바가지를 퍼온다. 상이용사는 아무 말 없이 바가지를 받아 자루에 쏟아부은 다음 등짝에 짊어진다.

소쿠리에 남은 감자든 고구마든 몇 알을 호주머니에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불쑥 찾아들 때처럼 나갈 때도 한 마디 던지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훌쩍 저 건너편 골 초가를 향해 힘든 발걸음을 옮긴다.

6.25때 국군6사단 소속 참전 용사였던 고 길운하 일등중사(길도형 대표 선친)에게 국가 유공자증서는 2016년에서야 발급되었다./길도형 제공
6.25때 국군6사단 소속 참전 용사였던 고 길운하 일등중사(길도형 대표 선친)에게 국가 유공자증서는 2016년에서야 발급되었다./길도형 제공

전몰 장병만 안장하는 국립묘지 조성이 바람직

6·25 참전용사로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평생 불구가 되어도 휴전 후 근 사반세기 이상을 상이용사들은 또 다른 고통 속에 살았다. 더욱이 힘없고 빽없는 일반 병(兵) 출신 상이용사들의 삶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런 삶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직접적 외상을 당하지 않은 병 출신들도 평생의 트라우마를 홀로 감내하며 늙어 갔고 그렇게들 세상을 떠나셨다.

현충원도 장군 묘역 따로 있고 병사들 묘역 따로 있을 뿐 아니라 그 크기도 지극히 계급적인 현실에서 평생을 트라우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다 차라리 일찌감치 생을 마감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나라.

아닌 말로 양철 쪼가리든 헝겊 쪽이든 참전용사였다는 징표 하나라도 그들의 가슴에 달아줬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그 자식들이 운동권에 포섭됐겠으며, 좌경사상에 물들었을까? 더 많은 참전용사의 자식들이 그 아버지를 오히려 냉소했었을 거라는 이 불효 부덕한 생각, 과연 나만 그랬었을까?

그 냉소가 더 빠르게 나를 좌경 학생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현충원 사병묘역 김○○ 소위 묘지 옆에 안장된 황규만 준장의 사례가 특별해 보이는 것은 우리 현충원은 장군 묘역과 사병묘역이 분리되어 있고, 그 크기 또한 차이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사례에서 보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국립묘지인 알링턴 국립묘지는 남북전쟁 전사자를 비롯해서 1·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베트남전쟁의 전사자, 해외 파병 주둔 중 테러에 의해 희생된 군인들까지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고 그 형태와 크기는 일률적이다.

예외적으로 존 F. 케네디를 비롯한 두 명의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북전쟁과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안치했다는 점에서 국립묘지가 갖는 현대적 의미는 우리 전몰장병을 위한 롤모델로서 충분하다.

우리의 국립묘지는 1957년 준공 당시만 해도 그 안장 대상은 6·25 참전 전몰장병에 한했었다. 1965년 3월 30일 대통령령 제2092호 ‘국립묘지령’에 의해 국립묘지로 그 격을 높이면서 안장 대상자 범위도 국가에 공이 있는 민간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 안장 대상자 범위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①현역군인, 소집중의 군인 및 군무원으로서 사망한 자, ②군복무중 전투에 참가하여 무공(군사상의 공적)이 뚜렷한 자, 장관급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자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뒤 사망한 자로서 국방부 장관이 지정한 자,

③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장의(장례)된 자, ④국가 또는 사회에 공헌하여 공로가 뚜렷한 자 중 사망한 자로서 국방부 장관의 제청에 의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자, ⑤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향토예비군 대원과 임무수행 중 전사 또는 순직한 경찰관,

⑥대한민국에 공로가 뚜렷한 외국인 사망자 중 국방부 장관의 제청에 따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한 자 등.

한 마디로 대상자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었다. 국가를 위한 헌신과 노고에 어떤 차등을 두고 자격의 유무를 따질 수 있겠냐만 우리의 국립묘지령은 그 확장된 범위만큼이나 그 애초의 설립 취지와 목적으로부터 멀어진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여전히 이념적으로나 건국정신에 비춰봤을 때 국립묘지 안치의 정당성 논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특히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그렇다. 또한 별을 달면 무조건 주어지는 국립묘지 안장 자격도 거기까지 다다르지 못한 군인들과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징병된 사병들에 대한 엄연한 차별이다.

김대중 정권 이후 문재인 정권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라고 전몰장병들보다 ‘국가에의 봉사’라는 취지의 인물들이 더 주된 추모와 기억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닌지 6·25전쟁 72주년을 보내며 따져본다.

그럴 바에야 별도 입법을 통해서 대한민국이 치른 전쟁에서 전사한 전몰장병과 해외 파병 중 테러 등에 의해 희생들 군인들만 따로 모시는 국립묘지를 새로 건립하는 것은 어떨까?

크기와 형태도 일률적인 그런 전사자들의 ‘National Cemetery’ 겸 ‘Memorial Park’! 군인의 애국, 군인의 죽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국가에의 봉사’를 넘어선다.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받아야 할 분들이 전몰군인들인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