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안보] 한산대첩 현장을 가다 
[역사안보] 한산대첩 현장을 가다 
  • 고성혁  미래한국 군사전문 기자
  • 승인 2022.09.1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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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 극장가는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영화계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실내 집합 제한이 풀리면서 극장가에 관객이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다. 올해 개봉된 한국영화 중에는 마동석이 주연한 ‘범죄도시2’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1200만이 넘는 관객이 몰렸다. 그다음이 박해일이 이순신 장군 역을 맡은 ‘한산: 용의 출현’이다. 8월 말 현재 약 700만의 관객을 기록 중이다.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최초의 한국영화는 1971년 개봉한 ‘성웅 이순신 장군’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를 구가한 최고의 배우들이 모두 나오는 초호화 캐스팅이었다. 톱스타 김진규는 주연 겸 제작에 직접 관여했고 그 외에 신성일, 김지미, 최무룡, 이예춘(이덕화 선친), 허장강, 이대엽 등 내노라 하는 배우들은 모두 나왔다.

거액을 들여 블록버스터급으로 제작했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거북선이 나오는 해전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구현했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너무 조잡하고 화면에서 장난감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사실성과 현장감이 없다보니 흥행할 수 없었다. 

김진규는 1978년 또다시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였다. 그러나 역시 흥행에 실패했다. 뻔한 스토리와 관객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 영상제작기법이 원인이었다. 이로 인해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영화는 실패한다는 일종의 징크스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징크스를 깬 영화가 2014년에 개봉됐다.

배우 최민식이 주연한 영화 ‘명량’이었다. ‘명량’은 누적 관객 수 1760만을 기록하면서 한국영화의 기존 기록을 모두 경신할 만큼 엄청난 대성공을 거뒀다. 앞선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 수 없었던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실감 나게 묘사했다. 물론 그것이 역사적 고증에 맞느냐의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영화가 대성공을 거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역사적 사실과 고증으로 본다면 영화 ‘명량’은 사실 창작에 가깝다. 그러나 관객들이 좋아하고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한국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하겠다. 

영화 ‘명량’ 이후 8년 만에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산 : 용의 출현’이 지난 7월 27일 개봉되어 현재 누적 관객 수는 약 700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손해는 나지 않은 정도로 보인다. 관객 평점은 8.58로 준수하다. 기자도 이 영화를 개봉하는 날 봤다. 기자의 평점은 8점 정도 주고 싶다. 최민식 주연 ‘명량’은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역사적 고증이나 스토리 전개는 너무 작위적이었다. 이순신 장군역을 맡은 최민식의 카리스마에 너무 의존한 측면이 많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 ‘한산 : 용의 출현’에서는 반대로 주연을 맡은 ‘박해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너무 과묵하게 만든 탓이라고 본다. 표정으로 연기한다지만 주인공의 대사가 이토록 없는 영화는 처음 봤다. 그러다가 한마디 던진 대사는 ‘이 전쟁은 의와 불의의 전쟁이다’라고 말한다. 블록버스터 영상미에 철학적 대사가 ‘갑툭튀’,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고나 할까. 오히려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소라고 기자는 평가한다. 그래서 평점 8점을 줬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을 맡은 변요한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만큼 연기력이 대단했다. 이 영화에서는 왜군에 대한 복식 고증이 과거 영화와는 차원이 다르게 매우 정교했다. 왜군의 투구나 갑옷은 마치 일본 영화를 보는 듯했다. 아마도 일본 NHK 대하 드라마에 나오는 일본 사무라이 복식 영향이 있었던 것 아닌가 추측해본다.

왜군의 복식이 사실감 넘칠수록 영화의 현실감은 높아진다. 또한 남해안 일대에 축조된 왜성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사실감 있게 묘사된 것도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지금까지 우리 영화에서 일본 왜성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도 이번 영화가 처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영화 '한산 : 용의 출현' 포스터
영화 '한산 : 용의 출현' 포스터

학익진

영화 제목 ‘한산’이 의미하듯 이 영화의 역사적 소재는 ‘한산대첩’이다. 한산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승전지다. 한산대첩 당시 조선 수군 이순신(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원균(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전라우도 수군절도사)가 이끌었고 왜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끌었다.

한산대첩 하면 바로 나오는 것이 바로 학익진(鶴翼陣)이다. 학이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적을 포위 섬멸하는 진법이다. 영화에서도 학익진의 모습은 매우 장엄하면서도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학익진은 해군의 대표적 전법이다.

서양에서는 ‘T’자형 전법(Crossing the T)라고 한다. 일렬종대로 오는 적의 함대를 횡대로 가로막는 진형이다. 이렇게 하면 아군 함대의 함포는 가로 배치가 되면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반면에 적의 함대 함포는 전방만을 보기 때문에 극히 제한된다. 이러한 진형으로 대승을 거둔 해전이 바로 1905년 5월 27일 ‘쓰시마해전’이다. 일본 도고헤이 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 ‘로제스트벤스키’가 이끄는 발틱함대를 ‘T’자형 포메이션, 일종의 학익진으로 궤멸시켰다.

태평양 전쟁 당시 필리핀 1944년 10월 레이테만 해전 중 ‘수리가오 해협’ 전투는 한산도 해전과 흡사하다. 미 해군 올덴도프 소장이 이끄는 전함함대는 수리가오 해협을 빠져 나오는 일본 함대를 ‘T’자형 진형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니시무라 쇼지 중장이 이끄는 7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남방군 니시무라 함대’는 말 그대로 미 해군의 덫에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 일본 니시무라 함대는 전함이 모두 격침되고 말았다. 레이테만 해전은 해전 사상 마지막 전함의 해전이었다. 

정왜기공도권. 명나라 황실의 임진왜란 종군화가가 그린 순천왜성 전투도. 순천성 전루는 정유재란 마지막 전투로서 두달에 걸친 조명연합군의 수륙공격에 왜장 고나시 유키나가가 방어한 전투다.
정왜기공도권. 명나라 황실의 임진왜란 종군화가가 그린 순천왜성 전투도. 순천성 전루는 정유재란 마지막 전투로서 두달에 걸친 조명연합군의 수륙공격에 왜장 고나시 유키나가가 방어한 전투다.

웅치 전투

영화 속에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해로가 막힌 왜군은 육로를 통해 전라도 지역을 공략하려 한다. 이때 조선 의병들이 험한 고갯길에 진을 치고 왜군의 진격을 막는다. 그 전투는 바로 ‘웅치 전투’다. 전북 진안과 전주의 경계인 웅치고개 전투의 승리가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를 사수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1592년 7월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 안코쿠지 에케이가 1만 군사를 이끌고 전주성을 목표로 웅치고개로 향했다. 이에 전라도 의병과 관군 1000여 명이 웅치고개에 진을 치고 결사항전을 했다. 10:1의 중과부적으로 조선 의병은 거의 전멸했다. 왜군도 피해를 입고 결국 금산으로 후퇴했다. 기록에는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주고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해안 일대의 왜성

임진왜란 기간 동안 왜군은 남해안 일대 30여 군데 이상 왜성을 축성했다. 울산부터 시작해서 순천까지 주요 수로와 거점마다 왜군은 성을 쌓았다. 왜성 중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 울산왜성과 순천왜성이다. 울산 왜성은 정유재란 당시 1597년 가토 기요마사(加淸正)가 축성했다.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에 등장한 왜성은 바로 울산왜성을 모티브로 삼았다. 울산왜성 전투는 일본에서 매우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3대 승전지는 울산왜성 전투, 벽제관 전투, 사천성 전투다. 

이들 전투의 공통점은 왜군이 압도적인 조명 연합군의 공격에 끝까지 버텨 낸 전투다. 왜군 제1의 맹장 가토 기요마사는 조명 연합군 5만의 공격에 완전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에 놓였다. 식수와 식량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약 보름간의 포위는 남해안 일대 왜군이 배를 몰고 울산으로 집결하면서 풀렸다. 

일본으로 돌아간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에 성을 쌓으면서 울산성의 교훈을 적용했다. 성 안에 우물을 많이 파서 식수를 해결했다. 그리고 다다미는 비상식량용으로 고구마 줄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순천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쌓은 성이 있다. 성의 천수각이 있는 곳에 올라서면 순천만 일대가 훤히 내다보이는 천혜의 지역이다. 왜성은 조선의 성과 달리 매우 견고하고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다. 배가 접안할 수 있는 부두가 있고, 성 외곽에는 일본성의 특징인 해자로 1차 방어로 삼는다. 그리고 목책이 둘러쳐지고 외성을 겹겹이 축성했다. 

내성까지 가려면 꼬불꼬불 여러 방어 시설을 돌파해야 한다. 이러한 왜성의 방어 구조를 조명 연합군은 돌파하지 못했다. 그렇게 임진왜란 기간 동안 축성된 왜성은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울산왜성이나 순천왜성, 사천왜성 등은 지역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여타 왜성은 민가의 축대나 공원의 계단등으로 이용되면서 훼손되었지만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남해안 일대 왜성의 분포.
남해안 일대 왜성의 분포.

거북선

이순신 장군 하면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거북선이다. 임진왜란에 나라를 구한 거북선. 조선 수군의 주 함선인 판옥선에 철갑 덮개를 씌운 함선이다. 왜군의 주력 함선 ‘세키부네’는 판옥선보다 작지만 바이킹 선처럼 배 앞머리와 바닥이 뾰족한 침저선이다. 조선의 판옥선보다 속도가 빠르고 대양 항해에 적합하다.

왜군은 조선 판옥선에 배를 가까이 붙여 배위로 옮겨타서 근접전을 하는 데 능했다. 당시 해전은 그랬다. 영화에서 해적선이 싸우는 그런 방식이다. 그래서 거북선은 왜군이 배에 올라타는 것을 막기 위해 덮개를 씌우고, 근접전을 피하는 대신 함포로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해지는 내용은 모두 제각각이다. 대표적으로는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현재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진 거북선이다. 그런데 이것조차 17세기 이후 그려진 것이다. 따라서 여러 곳에서 거북선을 복원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복원이 아니라 추정이다.

또 복원된 거북선이 바다에서 운항이 가능한지는 아직 검증조차 되지 않았다. 돛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또 노는 어떤 방식으로 저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추정일 뿐이다. 다만 군사적으로 거북선 함포 운영에 대해서는 대략적 유추가 가능하다. 

서양의 근대 해전에서 함포로 무장한 전열함의 해전은 주로 근접전이었다. 당시 함포의 성능이 원거리에서 조준해서 타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접한 가운데 함포를 쏘아야만 적 함선을 맞출 수 있었다. 이것만 해도 해전의 방식은 진일보한 것이다. 함포 등장 이전에는 적 함선에 올라타 육탄전으로 배를 점령하는 것이 해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북선 역시 같은 방식으로 함포를 운영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순천왜성의 외성 성문지 입구. 전형적인 일본성의 구조를 보인다.
순천왜성의 외성 성문지 입구. 전형적인 일본성의 구조를 보인다.

이순신과 원균

이순신 장군과 대별되는 이가 바로 원균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왜군에 바친(?) 패장으로 역사에는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단편적으로 보는 것은 원균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원균은 역사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 조선 당쟁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조선 선조 때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극심했다.

동인세력은 이순신 장군을, 서인세력은 원균을 밀었다. 지금도 보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군대 내 장군 진급에 영향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뻔히 질 전투에는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길 수 있는 전투에만 나간 것이 이순신 장군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도 부산의 왜군 수군 본진을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닦달과 권율 장군의 책망으로 원균도 어쩔 수 없이 출진한 전투가 바로 칠전량 해전이다. 난중잡록에 의하면 권율 장군은 원균에 곤장을 치면서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라 하고 곧 도로 보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 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했다고 전한다. 전쟁 후 조정은 이순신 장군에게는 충무공 시호를, 원균에게는 선무공신 1등에 봉했다. 
이순신 장군은 영화에서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영원한 충무공으로 남는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이순신 장군은 가장 불행한 군인이었다. 전란 속에 나라의 그 어떤 지원도 못 받고 혼자 감당해야 했다. 모함도 받고 백의종군까지 해야 하는 장군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고 살았다면 과연 오늘날 충무공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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