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농업에 대기업 참여를 許하라
[논단] 농업에 대기업 참여를 許하라
  • 길도형 타임라인 대표
  • 승인 2022.09.3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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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열무국수 한 그릇 먹고 들어오는 길에 논 두 곳에서 각 한 포기씩 벼이삭을 끊어왔다.(논주인들께 죄송) A논의 벼이삭은 170개의 낟알이, B논의 벼이삭에는 180개의 낟알이 달려 있다. 배가 들지 않은 쭉정이까지 하면 176~185개에 이른다. 이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농촌에서 자라면서 농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사람들은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국민학교 다니던 1970년대 중반 무렵, 당시 강원도 홍천이나 횡성 산골 다랑논에 심던 벼는 전형적인 재래종 벼였다. 키가 크고 나락마다 까락이 나 있어 벼타작을 할 때면 보리 타작만큼이나 까락(까끄라기)이 날려 살갗에 달라붙어 따끔거리게 했다. 

이삭당 낟알이 보통 70~80개씩 달렸는데, 풍수해와 냉해, 병충해에 다 취약해서 7~8월 기상상태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쭉정이가 많이 나고 비바람에 잘 쓰러져 200평 1마지기당 나락으로 6~7가마니를 수확해서 도정하면 쌀 3가마(1가마 80kg) 나오기 빠듯했다.

그러다가 70년대 후반부터 통일벼가 적극 보급됐는데, 이 품종은 대가 짧고 굵어 풍수해에 강하고 병충해에도 강했다. 이삭당 낟알이 100~120개씩 달려 수확량이 크게 늘었으나 맛이 없고 수확시 낙곡이 많은 단점이 두드러졌다.

벼가 익어가는 일산 파주 일대 들녘. 경기 북부지역은 일찍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호남이나 영남지역보다 가을걷이가 빠르다.
벼가 익어가는 일산 파주 일대 들녘. 경기 북부지역은 일찍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호남이나 영남지역보다 가을걷이가 빠르다.

농생명 기술로 이룬 녹색혁명

재래종 벼와 통일벼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수원을 비롯한 각 지역의 종묘사업장 농생명과학자들의 노력과 열정에 힘입어 80년대 중반부터 밀양, 동진, 남평 등 지역명을 딴 벼 품종들이 잇따라 개발 보급되며 1988년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610만 톤에 이르는 쌀을 생산한다. 당시 밀양, 동진, 남평, 상주 계열 등의 70년대 중반부터 품종 개량을 시작한 벼들의 이삭당 낟알이 120~130개에 이르렀다.

그러던 것이 벼 재배 면적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대신 벼 품종 개량은 더 활발해져 백진주와 신동진, 오대 등의 벼 품종들이 80년대 후반부터 보급을 시작하여 90년대 중후반부터는 각 지역에 맞는 품종들이 자체 개량에 지속 성공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산 외곽 사무실 주변의 논. 누렇게 벼가 익어간다. 일산은 한강 하류 퇴적토로 이뤄진 비옥한 경기평야의 중심이다.

경기평야의 중심인 일산과 파주의 논에서 주로 재배하는 벼 품종은 같은 한강계인 여주 이천에서 주로 심는 수라미와 백진주 등인데, 오늘 채취한 벼이삭도 그 계통이다. 두 논에서 각 이삭 하나씩 끊어 샘플로 삼았는데 170~180개의 낟알이 달려 있다. 그것도 쭉정이가 아니라 알이 꽉 찬 나락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직접 다시 확인해 보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비록 직접 농사 짓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7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으니까 반세기도 안 되어 대한민국은 어마어마한 농업혁명, 즉 녹색혁명을 이룩한 것이다. 벼 줄기도 튼튼하고 나락도 튼튼히 달려 있어 낙곡도 거의 없다. 선진 시비(施肥)가 이뤄지니 영양 상태가 좋아 병충해에도 강해 최소한의 농약 살포만 이뤄지거나 아예 하지 않는 곳도 많다. 낟알 자체도 과거에 비해 굵어졌다. 

최대의 쌀 생산량을 보였던 1980년대 후반에 비해 현재 벼 경작지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태에서도 2020년 기준 380만 톤에 이르는 쌀이 생산됐다. 단순 계산으로 경작지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어도 품종 개량과 생육 조건의 지속적 개선을 통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은 것이다.

농생명과학기술인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하는 이유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벼꽃은 꽃받침이 없다. 이삭이 나오면서 배가 차지 않은 낟알 끝에 잘 보이지도 않는 누르스름한 꽃이 핀다. 바람이 불면 그 꽃에서 나노급의 꽃가루가 날린다. 

농생명과학자들은 그 꽃가루를 채취해서 다른 품종 벼 이삭 낟알들에 일일이 교배시킨다. 동형접합체보다 이형접합체가 생장이 우수하다는 잡종강세를 반복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백진주든 신동진이든 오대벼든 170~180개에 이르는 이삭당 낟알 개수를 얻게 된 것이다.

조만간 이삭당 낟알 개수가 200개를 넘긴다는 얘기다. 품종 개량을 하지 못한 조선벼의 한계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개량이 없는 단일 품종의 반복적인 파종과 수확은 종의 퇴화로 이어진다.

일본 쌀이 맛있네 캘리포니아 쌀이 맛있네 하는 말들이 있지만, 오늘날 국산 쌀이야말로 자포니카 품종 중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맛과 품질을 보장한다. 대한민국은 어느새 농업선진국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6·25전쟁 후 5,60년대의 처절한 가난, 보릿고개를 넘어서고자 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잘 계승한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의 정치력도 큰 몫을 했다. 쌀뿐 아니라 주요 과일과

야채류를 자급할 수 있게 된 데는 첨단 시설농법으로의 지속적 혁신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 농업은 녹색혁명의 이면에서 산업으로 진보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농민은 농민대로 각종 보조금과 지원금이 관행화되어 그 자체가 지대(rent)가 되어 버렸다.

농지를 소유하고 농사짓는 시늉만 해도 보조금과 지원금이 쏟아지는데 혁신 농업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 자체가 없다. 게다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의 농민단체와 환경단체, 그들과 연대한 좌파 시민단체와 노동조합들이 기업들의 농업 진출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다.

지속적인 품종 개량으로 단위면적당 쌀 수확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 단위면적당 소풀량이 절반에 불과하다. /길도형 제공
지속적인 품종 개량으로 단위면적당 쌀 수확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 단위면적당 소풀량이 절반에 불과하다. /길도형 제공

투자 규제로 농업 첨단화 어려워

첨단 농업기술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특정 규모 이상의 투자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한국은 토지개혁의 명분으로 내세운 경자유전 원칙이 여전히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다. 사실상 1970년대 초 개헌을 통해 폐기되었어야 할 조항이다. 경자유전의 정서를 근거로 삼아 대기업의 농업 진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형국이다. 

성공 가능성을 보고서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는 기업가 정신이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의 DNA였다. 그 기업가 정신이 대한민국을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성취의 과정이 농업 부문에서 발현되지 못하는 현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기업 반시장을 노골적으로 앞세운 전농을 비롯한 좌파 세력이 대척점에서 이런 왜곡된 현실의 연장을 집요하게 강요한다. 이런 모습은 한국이 사실상 여전히 근대와 전근대 사이에서 내전을 치르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게 됩니다. 한국 농업은 근대와 전근대 사이의 내전이 벌어지는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만시지탄이지만, "대통령 직을 걸고 쌀 시장 개방을 막겠다"는 지극히 편협하고 미래 비전이라고는 없었던 1991년 김영삼의 대선공약은 그런 의미에서 1993년이라는 시점이 한국현대사의 중요 변곡점이 아니었음을 짐작게 한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의 정치적 부침 속에서도 지속해 가던 한국 농업의 혁신은, 녹색혁명의 이면에서 김영삼 정권에 의해 사실상 좌초되고 이후 갈피를 못 잡고 헤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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