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근도 분재사랑곳 대표 겨울 분재원에 자라는 희망
심근도 분재사랑곳 대표 겨울 분재원에 자라는 희망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3.02.13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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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사진 고성혁 미래한국 기자

용인시 기흥구에 위치한 분재 전시장 ‘사랑곳’. 

약 190㎡(600여평) 규모의 거대한 전시장에는 새봄을 기다리는 1만여 점의 앙증맞은 분재들이 잎을 모두 떨구고 줄기만을 드러내며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한겨울에 잎도 꽃도 없는, 오로지 줄기와 가지들만을 보여주는 분재들의 모습이야말로 조형미를 감상하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회장님! 어디 계세요? 손님 오셨어요!”

직원들이 고함을 치지만 회장님으로 불리는 심근도 분재사랑곳 대표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넓고도 넓은 분재원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종종 실종되는 것 같았다. 1만여 점의 분재를 일일이 살펴보는 일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심근도 대표는 40여년 전부터 명자꽃, 소나무, 벚나무 등 150여 종의 분재를 가꾸고 있다. 20여년 전 명자꽃의 매력에 빠져 이곳에서 명자꽃 분재를 주로 다루고 있는 그는 국내에 유일무이한 명자꽃 분재 전문가다. 드디어 나타난 심근도 대표에게 먼저 왜 이렇게 많은 분재들을 가꾸는지 물었다.
“분재의 대중화가 필요하죠. 분재를 값비싼 고급, 예술 작품으로 인식하는 문화에서 우리 일상의 원예 취미로 대중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저변이 확대되고 가정에서 재배하는 기술도 늘어납니다. 저는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감상할 수 있는 분재를 많이 보급하려고 해요.”

심근도 대표의 말은 다소 의외였다. 분재라고 하면 예술적 취미가 있는 이들의 고급 취향이 아닐까 생각됐기 때문이다. 한 품에 안을 수 있는 작은 화분에 심어 눈으로 자연의 웅장함을 즐기는 분재는 화초나 나무를 화분에 심어 가꾸는 원예기술을 총칭하는 말이다. 특히, 소나무나 철쭉나무, 단풍나무 등 나무를 화분의 크기에 맞게 작게 축소하면서도 고목다운 운치를 풍겨야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원예를 넘어 예술로 인정받기도 한다.

‘분재’라는 미래의 반려식물

하지만 심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국내 분재시장의 침체에는 고급, 예술 작품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일반인들에게는 까다로운 분재 관리 실패가 분재시장의 확대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는 것. 대중적 저변이 넓어져야 고급품의 시장도 커진다는 생각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문화는 향유하는 자의 것이기에 저변이 넓어야 고급도 등장한다는 원리를 ‘저는 농고밖에 못나왔다’고 말하는 심근도 대표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합천에서 농고를 졸업하고 과수원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원예잡지에서 분재에 대해 알게 됐지요. 그게 돈이 된다고 해서 살펴보니 나무를 가지고 하는 것인데, 나무라면 제가 과수원하면서 잘 알았거든요. 그래서 시작했어요. 그렇게 40년 생업이 됐습니다. 분재는 앞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반려 문화가 될 겁니다.” 

심 대표는 농고를 졸업하고 고향인 합천에서 과수원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농민 잡지 <전원생활>의 전신인 <새농민>을 통해 분재를 처음 접했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과 정열을 가진 청년 심근도는 잡지에 실린 글을 읽고 산에 다니며 나무를 채취해 와서는 삽목·취목 등을 해가며 번식을 시작했다.
“군대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지요. 과수원과 병행하다 분재원을 시작한 건 서른 두 살 때입니다. 과수원 한 귀퉁이의 매화·자두·배나무에 취목을 해놓고 하루에 두 번씩 물뿌리개를 들고 산비탈을 오르내리고,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부분을 공략할 요량으로 찔레·수양버들 등에 집중했습니다. 그 시절 돌을 줍기 위해 고향 인근의 시내와 개천을 수도 없이 헤매고 다녔지요.”

심 대표는 분재와 관련된 전문 서적이 거의 없던 때라 일본 원서를 보기 위해 일본어를 독학하고, 푸른회라는 동호회를 만들어 분재 연구에 몰두했다. 1989년 용인으로 터전을 옮길 때까지 심 대표는 동호인들과 아홉 차례 전시회를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땅을 빌려 분재원을 했는데, 주인이 그 땅을 팔아버린 겁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서울 근처로 가자고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분재도 다른 화훼 산업처럼 대도시 근처에서 해야 경쟁력이 있으니까요.” 

용인으로 온 이후 심 대표의 행동 반경은 더 넓어졌다. 한국분재협회, 한국분재조합, 한국화훼협회 등 그가 몸담았고, 현재 몸 담고 있는 조직이 한두 개가 아니고,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연암축산원예전문대 분재강사교육과정, 안성산업대 농업경영인과정을 이수하는 등 기술과 이론을 겸비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심 대표는 분재시장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실제로 국내 원예시장은 홈가든 열풍에 힘입어 크게 확대됐다. 여기에 분재는 상품과 작품의 경계를 넘나들며 개인의 노력에 따라 취미와 투자를 겸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려면 일단 가정에서 분재에 대한 이해와 관리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대중성 있는 분재들이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심 대표의 생각인 것이다. 여기에 심 대표는 의미 있는 설명을 더했다.

“일본에 분재 기술을 전수한 것은 우리인데, 기술이며 이론이며 우리나라가 일본에 많이 뒤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분재 용어부터 우리말로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뜻 있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bon-sai라고 불리는 일본 분재
bon-sai라고 불리는 일본 분재

日에 뺏긴 분재 종주국 되찾을 것

심 대표는 자신의 분재 사업이 단순한 ‘장사’가 아니라 우리 것을 되찾는 문화적 운동성을 가진 사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40년간 분재를 연구해 온 심 대표는 일본의 분재(bon-sai)가 백제~고려 시대 전파를 통해 세계화를 이룬 것에 대해 종주권의 회복을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과 실천을 견지하고 있다. 실제로 분재는 중국의 후한 시대에 발생해 당,송 시대에 한반도에 유입됐다. 백제에서는 ‘반경’이라는 원예기법으로 분재를 왕실에서 다뤘고 고려시대에는 이미 분(盆)이라는 기법으로 분재가 이뤄졌다. 

눈 쌓인 산 흐린 햇빛에 희미할 텐데 / 雪嶺迷煙日
어찌하여 이 와분에 와 있단 말인가 / 胡然在瓦盆
작은 먼지가 국토를 포함한다더니 / 微塵含國土
이게 바로 완연히 한 개 천지로구나 / 宛爾一乾坤

위 시는 고려 말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시고, 제19권>에 나오는 시이다. 시 제목은 ‘영분송(詠盆松)’인데 일본식 용어인 분재(盆栽)에 대해 고려는 분(盆)이라는 개념을 먼저 확립하고 있었던 것. 이러한 기법이 일본에 전수되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일본식 분재로 발전한 것은 1800년대 경이다. 그런데 이 시기보다 좀 이른 18세기에 조선에서는 엄청난 원예바람이 불었다. 

당시 문인들 사이에서 꽃과 분재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가 일어났는데 14세기 조선시대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분재에 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번식법, 배양 관리법, 감상법 등이 총 망라되어 있어 현재도 참고가 될 정도이다. 이후 18세기경 조선에서는 분재를 생업으로 하는 이들도 생겼고 장터에는 꽃과 분재들을 파는 노점들이 즐비했다. 이러한 조선의 수요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오늘날 ‘bon-sai’라고 하는 일본식 분재가 근대 이후 서구에 전파되면서 일본이 분재의 종주국화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저는 우리 분재 기술이 일본을 넘어서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가능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일부 영역에서는 우리 분재 기술이 일본보다 낫습니다.” 

심 대표는 올해로 일흔을 넘기지만 열정에 있어서는 여전히 청년이었다. 그런 심 대표의 열정은 젊은 시절, 고향인 합천에서도 유감없이 발현되었다.

“청년 시절 영농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의미 있고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저는 집안과 친척들에게 그렇게 배웠어요. 공동체를 위해 좋은 일을 하라고 말이죠. 그때 고향 합천에서 관료들이 하는 행정에는 모순이 많았죠. 그래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내고 추진도 해봤지만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자고 결심했고 나이 서른에 고향을 떠나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 용인입니다.”   

마을 고목들에 희망을

심 대표는 분재로부터 시작했던 관심을 전국의 기념수로 확대해 가고 있다.
 “나무에 관해 잘 알게 되다 보니 우리나라 천연기념수에 대한 관리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천연기념수들이 대개 고목인데 여기에 지주대를 받치는 걸로 관리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나무는 기형이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는 톱으로 가지를 썰어 버려요. 갈라진 틈에는 시멘트를 채워 넣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나무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무를 아는 외국의 전문가들이 보면 정말 기가 찰 일입니다. 

일본에 가보세요. 우리처럼 하는 곳이 어디 있나. 가령 고목의 가지는 오래되면 찢어져 내리게 되는데, 그것을 톱으로 썰어내면 자연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오래된 나무는 오래된 나무 그 자체로 보이는 자연미를 보존해 줘야 하는데 이걸 지주로 받쳐 기형을 만들고 가지를 톱으로 잘라내고 하는 식으로는 정말 창피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천연기념수를 고목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관리할 수 있는데 말이죠.” 

심 대표는 전국의 기념수들에 대한 관리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대단히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마을에는 당산나무들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런 나무들이 시골 마을에 하나 둘씩은 있지요.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에게는 그런 나무는 유년기의 추억이고 고향의 상징입니다. 지금은 당산제가 거의 사라졌는데, 마을의 나무를 기리는 고향 축제를 다시 되살리면 도시로 나갔던 이들이 고향을 찾아 오게 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당일로 다녀올 수도 있고요. 숙박이 필요하다면 마을에서 야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고향을 떠났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고향을 찾아 방문할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죠.”

고향을 떠났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 고향을 방문할 기회, 그것을 마을의 나무로 삼자는 그의 생각에서 문득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일화가 머리에 그려졌다. 하지만 심 대표의 스토리는 이와 반대다.

실버스타인의 나무는 소년이 노인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내주고 그루터기로 남았어도 행복했지만, 심 대표는 어린 나무를 돌봤고 그 나무가 이제 고목이 되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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