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기] 금랑 선생은 이렇게 제자를 키우셨다
[추모기] 금랑 선생은 이렇게 제자를 키우셨다
  • 황우여 미래한국 편집고문·전 교육부 장관
  • 승인 2023.04.11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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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철수 서울대 헌법학 교수 1주기를 맞아

금랑 김철수 교수님은 한국 헌법학의 토대를 굳건히 해서 이 나라를 세계적인 헌법 국가로 만개하게 하셨다. 이러한 업적은 무엇보다 탁월하신 선생님의 학자로서 위대한 업적에 힘입은 바이나, 선생님이 수많은 제자를 키워내심으로써 제자들이 힘을 합해 선생님의 뜻을 받들면서 이뤄낼 수 있었던 모든 학문적 역량의 결정이기도 하다. 

그분의 수많은 쟁쟁한 제자들은 모두 선생님이 제자로 불러주셨고, 사랑으로 키워주셨으며, 값진 기회를 쥐여주시지 않았던들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없었다고 선생님의 영전에서 이구동성으로 고백할 것이다. 실로 수많은 영웅호걸이 있었지만 자신의 뜻을 이어나가는 후대의 제자, 아니 자식조차도 남기지 못함으로써 그 탁월한 능력이 당대에 그치고 마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생각할 때, 선생님에게 실로 배워야 할 최고의 가치는 후대를 준비하고 키워 후계자를 통해 당신의 뜻을 계승 발전하게 하는 후계 양성의 비법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대한민국이 배우고 힘써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과연 선생님이 어떻게 제자를 키우셨나를, 행복하게도 선생님 애제자의 한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나 자신의 수많은 일화 중 몇몇을 회상함으로써 함께 나누고자 한다. 

제자 선택

나는 선생님을 대학 4학년 공법 세미나 시간에 ‘기본권의 제3자적 효력’에 대한 발표를 하면서 만나 뵙게 되었다. 사법시험 준비 도중이라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못해 급하게 준비한 발표였는데도 선생님은 나를 불러 크게 칭찬하고 어디엔가 발표하자고까지 하셨다. 이를 계기로 평소에 헌법에 대한 애정이 컸던 터라 고향 선배인 최종길 교수님의 부르심을 마다하고 민법연구실을 떠나 헌법을 전공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사법시험에 합격한 다음 사법대학원 시절 선생님의 권유로 석사논문을 헌법으로 정해 ‘선거소송의 무효원인’으로 논문을 완성했다. 당시는 사법대학원이 폐쇄되는 급박한 상황이라 예상보다 빠르게 논문심사가 마쳐지게 되어 실상은 논문이 미완이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학위 수여를 미리 결정하고 당황해하는 나에게 졸업 전에 논문을 인쇄해 제출하면 된다고 허락하셔서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연이어 선생님이 베풀어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가 선생님과 깊은 사제의 정을 한껏 누리며 학위 논문을 헌법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제자 지도

선생님은 내가 법관을 지망할 것으로 생각하고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학위 논문을 쓰라 하셨다. 군사정권 시절이라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우려가 크던 때였으므로 이러한 논문은 참으로 중요한 논제였기에 나는 가슴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며 논문에 착수하고자 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잠을 이루지 못하며 번민하게 되었다. 일생 한번 학위 논문을 쓰는 것이고 그것도 첫 논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이 논문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나라에도 유익이 있는 논문은 무엇일까. 물론 사법부의 독립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로되, 막바로 내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쓸 논문 제목으로는 무언가 정곡을 찌르는 논문은 아니지 않은가 싶어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며 꼬박 밤을 새웠다. 

새벽이 되어 나는 마음에 그렇다, 국가와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모두에게 마땅히 갖춰야 할 국가와 교회의 모습을 헌법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문을 쓰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 내가 온 힘을 다해 논문을 쓰려고 달려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침 일찍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선생님에게 논문 제목을 바꿔 주십사고 청했다. 사실 선생님이 제목을 정해주기까지 하셨는데 이를 마다하고 자기가 쓰고 싶은 논문을 쓰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나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례를 무릅쓰고 선생님에게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이 논문 제목을 바꿔 주시리라고 확신하지 못한 채 송구스러워 모깃소리로 말씀을 드리면서도 내게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힘이 배어 있었다. 선생님은 잠시 내 눈을 응시하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공부해야지. 그렇게 하게나.”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면서 한없이 기뻐하며 선생님 댁을 나서면서 다시 한번 선생님의 하해 같은 도량과 제자를 키우시는 교육자로서의 철학을 깊이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공부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그후 나의 철학이 되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선생님의 말씀을 예화로 들면서 후배들이나 내 자식에게까지도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도록 권면했다. 그리고 교육부 장관으로 일할 때도 교육은 학생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잘 살펴 공부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임무라고 얘기하곤 했다. 
선생님은 아마 나뿐 아니라 모든 제자를 이러한 철학으로, 무엇이 제자의 재능이요 흥미인가를 살피면서 각자의 꿈과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수많은 제자가 구름떼같이 모여 헌법학의 큰 바다를 이뤘고 선생님의 큰 나무 그늘에서 학문의 양분을 공급받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생전의 고 김철수 교수. 2014년 4월 2일 ‘국회의장헌법개정 자문위원회’ 중간 결과 발표 당시 인사말 하는 모습. / 연합
생전의 고 김철수 교수. 2014년 4월 2일 ‘국회의장헌법개정 자문위원회’ 중간 결과 발표 당시 인사말 하는 모습. / 연합

제자 사랑

하루는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선생님이 몸져누워 계셨다. 사모님이 제자 중 한 사람의 ‘공공복리’라는 석사논문이 심사에서 통과가 되지를 않았는데 선생님 보기에는 석사논문으로서가 아니라 박사논문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관계 심사 교수님을 설득했는데도 결국 통과가 되지 않아 몸져누우셨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니 아무리 제자를 아끼셨어도 일개 석사논문이 통과되지 않은 것을 두고 선생님의 제자에 대한 사랑이 가슴에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한 제자, 한 제자를 마치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해 이토록 가슴 아파하는 선생님 같으신 분이 세상 어디에 계실까. 선생님에게 수많은 지식을 가르침 받은 것보다, 이렇게 제자를 자신의 분신으로 사랑하는 선생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아랫사람을 품으시는 불같은 모습을 직접 보면서 자랐던 행복한 학창 시절은 나의 그후 정치 생활에서도 사표가 되어 크나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아무리 적은 사람일지라도, 내 앞에 나와 함께 하는 사람과 내 앞에 닥치는 일에 모든 힘을 다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선생님의 모습이 마음속 깊이 늘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 김철수 교수는 1998년까지 서울대 법대 교수로재직하며 국내 헌법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그림은 EBS 시대와의 대화 캡처.
고 김철수 교수는 1998년까지 서울대 법대 교수로재직하며 국내 헌법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그림은 EBS 시대와의 대화 캡처.

제자 훈련

선생님은 늘 힘겨울 정도로 한발 앞서서 한치 높은 곳으로 나를 이끄셨다. 선생님이 하버드대로 연구차 출국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서울 문리대 헌법 강의 시간을 나에게 맡기셨다. 나로서는 힘겨운 고난도의 강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게 해낼 수 있으니 해내라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늘 나로서는 이 정도 아닐까 하면 선생님은 그보다는 한층 높은 것을 해내라는 뜻이 담긴 일을 하도록 나의 등을 떠미셨다. 

통 야단이라고는 친 적이 없으신 선생님에게 한번 꾸중 들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학위 논문 제출 한계 연한이 다 차갈 때였다. 판사로서 매일 판결문에 매달려 있는 나에게 게으르다고 하셨다. 이때부터 나는 아무리 바빠도 눈을 지그시 감고 논문을 우선시하였다. 독일 유학을 하면서 논문을 그곳에서 반 이상을 마쳤고, 귀국하여서도 낮에는 판결문을, 밤에는 논문을 쓰는 강행군을 해냈던 것은 선생님의 무거운 꾸지람 덕분이었다. 할 수 있는데 못하는 것 그것은 게으른 것이라는 선생님의 가르침 또한 평생 나 스스로 다그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사실, 학위 논문 제목을 허락받기는 하였으나 국내에는 이에 대한 저서는 물론 논문조차 전무한 것을 뒤늦게 알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연이어 독일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독일에 가니 법과대학과 신학대학에 모두 국가교회법 연구소들이 설치되어 도서가 가득했던 것을 보고는 마치 천국에 온 듯한 행복감 속에서 논문을 작성해 나갔다. 

계획은 원래 독일의 국가와 교회를 연구하고 다시 미국의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의 국가와 교회를 연구한 결정판을 내리라고 계획하고 결심했으나 아직 이를 마치지 못했으니 선생님의 게으르다는 꾸중을 하늘나라에서 선생님 다시 뵐 때 다시 들을까 걱정이다. 그후 헌재가 창설되고 헌재로 가서 초대 헌법연구부장으로 일하면서, 사실 대법원에서는 헌재의 강화를 달갑게만 생각하지 않았을 때였기에 헌법재판소를 헌법위원회 격이 아니라 헌법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최고기관으로 정립하는 데 대법원 파견 법관으로서 한계를 의식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평소의 지론대로 헌재 강화에 전력을 다했다. 

그후 1년이 지나면서 선생님은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에서 한국 헌법재판에 대해 발표하라면서 학회에 동행해 주셨다. 나는 발표 도중 선생님과 눈길이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흐뭇해하시는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은 제자가 헌재에 투신해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을 매듭짓는 일을 하고 있고, 이제는 일본에서까지 그 성과를 알리게 된 데 대해 크게 만족해하셨던 것이리라. 우리 헌재는 선생님의 헌법재판에 대한 학문적 업적을 힘입어 이를 구현해 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소회를 마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은 짧은 인생이 어떻게 하면 세대를 뛰어넘어 이상과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제자를 양성하는 일임을 일찍이 깨달아 이뤄내신 분이심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는 국민의 우려가 그치지 않는데 이에서 벗어나는 길도 정치가들이 자신의 이상과 업적을 후배들이 계승 발전하도록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을 본받아 정치 분야에서도 제자를 사랑으로 키워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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