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새해 경제의 화두는 단연 ‘디레버리징’이다. 디레버리징은 가계와 기업들이 부채를 상환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 금리가 낮았던 시기에 빚을 내서 자산에 투자하는 기법인 레버리징의 반대 개념이다. 고금리에는 빚부터 정리하는 것이 합리적 의사결정이다. 그러나 디레버리징 과정은 고통이 수반된다.
“제가 IMF(국제통화기금)에 있을 때 관심이 많아서 계속 유심히 들여다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위기를 겪지 않고 디레버리징(delevera-ging·부채 축소)을 한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지난해 3월 가계부채 문제가 주요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간담회에서 한 발언이다. 이 총재의 이러한 디레버리징 언급은 ‘금융시장 충격 없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낮추는 데 성공한 나라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가계나 기업이 빚을 갚게 되면 가계는 가처분소득이 줄고, 기업은 순익이 감소하면서 투자 여력이 줄어든다. 한마디로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수요와 고용 감소로 이어지는 ‘침체된 경제’를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을 회피하는 경제 주체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 결과 부채 상환에 실패하면서 담보화된 부동산들이 경매로 넘어가는 소위 ‘반대매매’, ‘깡통 매매’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금융시장과 부동산 시장에 큰 충격이 오게 된다.
디레버리징은 고통 수반
하나은행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지난 1월 4일 발표한 ‘대한민국 금융소비자 보고서 2024’에 따르면 지난해 월평균 가구 소득은 511만 원으로 2022년(489만 원)보다 22만 원 증가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금융소비자들의 월 소비·지출액은 지난해 평균 243만 원 수준으로 2022년(241만 원)보다 2만 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지출이 증가했다고 응답한 항목은 식비, 공과금, 경조사 등이었다. 의류·잡화, 명품 구매 비용, 국내 여행 경비 등은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응답이 많았다. 그만큼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것이다. 문제는 가계부채다.
지난해 대출 보유율(49.2%)은 2022년(50.4%)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평균 대출 잔액(4287만 원→4617만 원)은 더 늘었다. 대출 보유자 가운데 최근 1년 내 대출을 중도 상환한 비율은 61.1%(전액 중도 상환 20.6%·일부 중도 상환 40.5%)로 집계됐다.
연구소는 “최근 2∼3년 전만 해도 ‘빚투’, ‘영끌’처럼 대출 레버리징을 통한 자산 증식이 성행했으나 올해는 투자보다 대출 상환을 먼저 고려하는 디레버리징 의향이 높게 나타났다”고 강조했다.
빚 갚기는 기업들로서도 최대 화두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들도 재무 건전성을 우선 순위에 놓고 빠듯한 경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자본시장 전문 매체인 ‘매일경제 레이더M’이 국내 37개 대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재무담당 임원을 대상으로 ‘자금 운용 계획’에 대해 설문을 진행한 결과에 의하면 국내 대기업 10곳 중 6곳은 올해 자금 상황이 작년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재무건선정 제고’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경영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나타났다. 12개 기업(32.4%)은 유동성 위기 상황 등에 대비해 현금성 자산을 늘리겠다고 응답했다. 또한 답변 기업 중 73%(27곳)은 투자기회와 재무개선기회가 동시에 찾아오면 우선 순위를 빚 갚는 데 두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빚 갚기, 디레버리징은 202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2022년 은행 가계대출이 감소세로 전환되면서 디레버리징 시대에 진입한 우리 경제는 은행권을 시작으로 비은행권에서 가계대출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준금리의 급격한 상승으로 저금리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지난 10여년 동안 이루지 못한 가계대출 관련 정책 목표를 단 1년 만에 달성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이러한 디레버리징 기조는 정부의 2024 경제정책 운용에서도 선언됐다. 윤석열 정부는 2027년까지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100% 아래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현 정부 임기가 끝날 때 가계부채 비율을 지금보다 소폭 아래인 수준으로 하향 안정화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셈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GDP 대비 101.7%(지난해 2분기 기준) 수준으로 세계 최상위권에 속한다. 지난 2021년 105.4%까지 치솟은 가계부채 비율은 금리 인상 등의 여파로 2022년 104.5%까지 내린 뒤 하락세를 보였지만 여전히 100%를 상회하는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가게부채 축소 기회 놓치지 말아야
우리 경제는 그 동안 위기 극복 과정에서 부채를 통한 성장 정책을 추구해 오면서 가계부채 조정이 없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부는 가계부채 문제 해결에 있어 디레버리징보다 미시적 관점에서 건전성 규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으나 결과적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장기간에 걸쳐 디레버리징을 가속화해 왔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부실 처리 과정에서 디레버리징이 시작되었으나 최근까지 상당 기간 장기간 진행되어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145%(2007년)에서 101%(2021년)까지 감소했으며 영국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중도 2007년 당시 174%를 기록할 정도로 높았으나 2021년 현재 148%로 낮아진 상황이다.
이러한 디레버리징은 대출을 쉽게 생각하는 문화를 개선하는 데 긍정적 효과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외환위기 이후 부채를 통한 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출에 대한 관대한 문화가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위기 극복 과정에서 민간대출은 경기회복의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나 대출을 쉽고 가볍게 생각하는 문화가 관행으로 정착된 것은 큰 문제점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경기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를 활용한 내수 활성화에 집중하면서 차입소비 문화가 확산되었으며 현재까지 신용카드 결제의 보편화로 이어진 상황은 바로 레버리지 문화가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 자산 가격이 상승해 이자 상환을 충분히 커버할 정도로 자산 가격의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투자를 위한 부채의 위기의식이 약화된 점은 우리 경제 체질에 근본적인 위기를 심어 줬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따라서 이제 디레버리징에 대한 문화 정착을 통해 복합위기를 부채 조정의 기회로 적극 활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동안 각종 가계부채 대책에도 불구하고 해결하지 못한 가계부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한 것이고 1997년과 2008년 2번의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누적된 ‘금융불안의 뇌관’인 가계부채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적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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