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말 북파공작원으로 잘 알려진 국군정보사의 해외·대북첩보요원 명단 전체가 북한에 넘어간 사실이 알려졌다. 이어 8월 초에는 정보사령관과 공작담당 여단장이 서로 고소를 한 사실도 드러났다. 고소장에는 해외비밀공작 암호명과 외부조력단체, 서울시내 안가 위치까지 모두 노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들은 비밀부대인 정보사의 이런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정보 관계자들은 김대중·노무현 때부터 시작된 비밀공작 홀대가 쌓여 내부 불만이 누적된 결과가 이번에 터진 것이라고 풀이한다. 문제는 정보사뿐만 아니라 국가정보원 등 정보계 전체가 현재 사실상 무력화돼 있다는 점이다.
지난 7월 28일 <매일경제>는 “정보사 군무원이 정보사의 공식요원(화이트)과 비밀요원(블랙) 신상 정보 수백 건 이상이 북한으로 유출된 정황이 포착됐다”고 보도했다. 해당 내용은 처음에는 관련 제보를 받은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들이 국방부에 자료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고 알려졌으나 이후 국정원 해커가 북한군 내부망을 해킹하는 과정에서 이 명단을 찾아낸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보도에 따르면 지난 6월 국정원 해커가 북한군 내부망을 해킹하는 과정에서 정보사 요원 명단뿐만 아니라 해외·대북 비밀공작 암호명, 활동 거점, 위장 업체 등이 북한군 서버에 보관 중인 사실을 찾아냈다. 국정원은 놀라서 바로 방첩사령부에 통보했고, 방첩사령부가 다시 정보사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 역추적을 통해 정보사 5급 군무원 A 씨가 관련 정보를 넘긴 사실을 확인했다. A 씨는 과거 해외공작요원이었고 구속 전까지 해외공작부서에서 근무했다.
A 씨는 구속된 뒤에도 자신의 개인 노트북에 관련 정보를 보관했다가 북한에 해킹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보사 요원 신상정보와 비밀공작 관련 정보는 인터넷과 분리된 정보사 내부 서버에만 보관한다. 이는 사령관조차 함부로 열람할 수 없다. 때문에 방첩당국은 A 씨가 정보를 빼돌렸을 가능성을 크게 봤다.
군 소식통들은 우선 A 씨의 개인 노트북을 통해 유출된 정보사 해외·대북 첩보요원 신상정보가 최대 1000여 명 이상이라는 점을 두고 내부 고위급 조력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강력히 제기했다. 정보사 안팎에서도 “열람하기도 어려운 기밀이 모두 넘어간 것을 보면 내부에 조력자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실제 화이트 요원은 각국 파견 공관 무관부 파견 인력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블랙 요원은 신분을 완전히 숨기고 활동하는지라 신상 정보는 최상위 기밀로 철저히 보호 받는다. 5급 군무원이 이런 기밀에 접근한 것 자체가 수상하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A 씨는 7월 29일까지 구속되지 않고 불구속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심지어 사무실로 버젓이 출근까지 했다. 이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방첩사가 더 많은 증거와 자료를 확보하면서 7월 30일 결국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뿐만 아니라 기소 혐의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에 형법 상 간첩죄까지 더했다.
이후 A 씨가 조선족 중국인 여성에게 관련 기밀을 건넨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이 조선족은 여성으로 A 씨와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A 씨가 건넨 기밀이 북한군에 넘어간 것을 확인한 정보 당국은 이 조선족 여성이 북한에 포섭된 공작원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방첩사령부 수사에 따르면, 이번 사건 용의자인 군무원 A 씨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블랙요원의 실명 등 신상정보뿐만 아니라 현재 활동 국가, 정보사 전체 부대 현황 등 2급과 3급 기밀 5~6건을 조선족 중국인에게 파일 형태로 유출했다.
국군정보사 비밀요원 신상정보 최소 1000건 이상 北으로 흘러간 정황 포착
정보 관계자들은 다른 심각한 문제도 있다고 지적한다. 북한은 외부와 연결된 인터넷망을 아무나 사용할 수 없다. 다만 노동당 소속 기관이나 인민군 보위국, 보위성 등은 예외다. 한국과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이 네트워크를 통해 북한 내부망에 침투한다. 과거 오바마 정부 시절 북한 탄도미사일 개발을 방해했던 ‘발사의 왼편’ 작전도 이런 경로로 이뤄졌다. 즉 국정원 해커가 북한 내부망에서 정보사 요원 명단을 발견했다면 미국 등 서방국가는 물론 중국, 러시아 정보기관까지 그 명단을 이미 입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보사는 기밀이 유출된 줄도 모르고 해외·대북 비밀공작을 계속 해오다 방첩사령부의 수사가 시작되자 부랴부랴 요원들을 철수시켰다고 한다. 북중 접경지역을 포함한 중국은 물론 러시아, 몽골, 캄보디아, 이란, 중앙아시아 등에서 활동하던 정보사 비밀요원들도 기밀 서류를 소각한 뒤 현지 거처와 차량, 운영하던 업체까지 그대로 놔두고 제3국을 통해 긴급하게 귀국했다고 한다. 해당 국가들은 모두 북한 대남공작기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다.
군 소식통에 따르면 정보사 비밀요원과 접촉하던 북한 내부 협력자들의 생사 확인도 되지 않고 있다. 일부 정보관계자는 북한 내부 협력자들이 북한 당국에 의해 대거 숙청·처형됐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국방부와 각 군 본부, 합동참모본부 등 주요 시설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만 해도 USB를 함부로 꽂아 정보를 옮길 수 없게 돼 있다. 옮기려는 순간 경보가 작동한다. 정보사를 비롯한 기밀부대 컴퓨터는 아예 USB를 꽂을 포트마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현실에서 A 씨가 비밀요원의 신상 정보와 활동 지역, 부대 현황 등을 개인 노트북에 옮겨 담으려면 내부망에 접속해 정보를 열람하며 그 화면 휴대전화로 찍거나 손으로 직접 작성한 뒤 다시 노트북으로 작성하는 방법밖에 없다. 2018년 6월 검찰에 기소된 전직 정보사 공작팀장의 기밀 유출도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2018년 6월 당시 검찰 발표에 따르면 퇴직한 정보사 간부 황 모 씨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정보사 블랙 요원 명단을 돈을 받고 중국에 넘긴 적이 있다. 이때 황 씨는 현직 요원에게 부탁해 기밀자료 화면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넘겨받았고, 이를 중국 국가안전부 요원에게 넘기고 돈을 받았다. 받은 돈은 나눠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 일이 적발되면서 정보당국이 현지 요원들을 급히 철수시켜 인명피해는 없었다.
법정 분쟁으로 번진 육사 50기 투스타와 육사 47기 원스타의 설전
정보사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7월 초 정보사령관 M 소장(육사 50기)과 해외·대북비밀공작을 담당하는 여단장 P 준장(육사 47기)이 서울 충정로에 있는 안가(Safe house) 문제로 충돌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고소를 하면서 고소장에 기밀 내용이 담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두 사람이 싸운 원인인 안가는 정보사의 인간첩보(HUMINT) 공작을 위한 시설이었다. M 소장은 안가에 정보사 비밀공작 요원뿐만 아니라 ‘군사정보발전연구소’라는 민간단체가 최소 월 1회 출입·이용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보고 받았다. M 소장은 지난 6월 초 안가 관리 책임자이자 해외·대북첩보담당 여단장 P 준장을 불렀다. M 소장은 “민간인 출입은 안가 무단 사용이라는 법무실 지적이 있으니 해당 단체 출입을 금지하거나 안가를 없애라”는 요지로 P 준장을 질책하며 명령했다.
P 준장은 이에 “해당 단체는 첩보공작 기획을 자문해 주는 예비역 단체고, 해당 사무실에는 여단 비밀공작팀도 상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광개토 계획’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광개토 공작’은 올해 2월부터 준비한 비밀공작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M 소장이 P 준장의 설명을 무시하면서 결국 서로 심한 말이 오갔다고 한다.
A 준장은 “공작 비전문가인 사령관이 이런 식으로 개입을 하니까 비밀공작이 안 된다”며 “사령관보다 상급자에게 다른 방식을 승인 받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M 소장은 결재서류를 P 준장에게 집어던지며 “보고 안 받겠다, 나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 충돌 과정에서 욕설까지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M 소장은 이후 P 준장을 군형법상 상관모욕죄로 국방부 조사본부에 고소했다. 군 당국은 P 준장을 직무에서 배제했다. 그러자 P 준장은 M 소장을 직권남용·폭행으로 국방부 조사본부에 고소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보사의 기강해이’다. 하지만 군 정보소식통들은 다르게 본다.
P 준장은 인간정보 분야에서 수십 년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지난해 11월 진급해 정보사령관을 맡은 M 소장은 육군 보병부대 대대장과 연대장 등을 지냈다. 첩보 수집이나 비밀공작 경력은 보이지 않았다.
주요 강대국은 군과 정보기관의 특수한 임무에 관해서는 전문성을 중시한다. 우리 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때 군 인사가 엉망이 되면서 많은 문제가 생겼다. 특히 정보 분야에 무경험자를 지휘관으로 보내 조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이 많았다. 일부 전투부대도 그랬다. 대대장 이후엔 지휘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수도방위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당시 해당 장성은 국가안보실 차장의 최측근이라는 말이 국방부 안팎에서 나왔다.
P 준장이 “첩보공작 기획에 도움을 준다”고 했던 민간단체 ‘군사정보발전연구소’는 국방정보본부장을 역임한 조보근 예비역 중장과 감청부대 777사령부 참모장을 지낸 정요안 예비역 준장이 각각 이사장과 소장을 맡고 있는 ‘군 정보 예비역들 싱크탱크’다. 해외·대북 첩보망이 이전 정부 때 무너진 현실에서 이들의 도움을 얻으려던 P 준장의 생각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군 정보소식통들의 지적도 적지 않다.
‘휴민트’ 분야 수십 년 근무한 여단장, 첩보분야 무경험자 사령관에 대들다
이상의 내용은 여러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군 정보기관 내부 문제는 언론에서 다루기 어렵다. 군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묵은 숙제’가 터진 것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정보사 공작요원이 해외나 대북 공작을 벌일 때 쓰는 공작금은 정부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선 기안서를 만들어 상부에 보고를 한 뒤 승인을 받으면 개인적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공작이 성공하면 사후 평가를 거쳐 실비 정산을 받는다.
성공에 대한 평가도 여러 등급으로 나누는데 성공보수가 천만 원 단위다. 중앙아시아, 이란, 중국, 러시아, 남미, 유럽 등에서 수 년 동안 공작을 벌이는데 그 비용을 먼저 주는 것도 아닌데다 성공하지 못하면 비용을 주지도 않는다. 이런 행태가 지난 20년 동안 이어져 왔다. 때문에 주로 간부들인 해외·대북 첩보요원 가운데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국정원이 특수활동비를 공작금으로 지불했을 때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문제 삼으면서 사실상 자기 돈으로 비밀공작을 해왔다는 말도 나온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 권한을 대폭 축소하면서 정보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사업’을 벌이려다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있었다는 미확인 소식도 있다.
인사 또한 문제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든 학군장교든 간에 정보기관에는 보통 엘리트를 배치한다. 그런데 이들이 정보 주특기를 받고 기관에 오래 근무하는 순간 대령 진급부터 막히는 경우가 20여 년 전부터 발생했다. 군 수뇌부에서 정보기관에도 ‘정무적 감각’을 요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군 수뇌부가 말하는 ‘정무적 감각’은 현 정권의 눈에 벗어나지 않도록 눈치껏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 정보기관 특성상 주적인 북한, 그들을 돕는 중국, 러시아, 이란 등과 ‘총성 없는 전쟁’을 매일 하고 있는 현실에서 정권의 입맛에 맞춰서 공작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공작이 최소 몇 년 동안의 준비와 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가안보상 반드시 필요한 첩보를 생산·보고하는 장교들이 오히려 진급이 늦어지고, 반드시 필요한 첩보도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입맛에 맞게 가공해서 보고하는 장교들이 더 빨리 진급을 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사기밀 생산이나 비밀공작 경험이 거의 없는 일선 부대 지휘관 출신들이 정보기관 수뇌부에 임명되면서 군 정보기관의 특성을 무시한 명령이나 지시가 허다했다는 게 군 정보소식통들의 이야기다. 이런 문제가 계속 누적되고, 특히 좌파 정권에서 군 정보기관 무력화에 나서면서 결국 이번과 같은 사건이 터졌다는 지적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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