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의 주도 뮌헨은 150만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지만 인구 밀도는 독일에서 가장 높은 도시입니다. 뮌헨에는 일부 연방정부기관과 주행정기관, 및 국제기구들이 있습니다. 기업, 대학, 주요 박물관, 극장 및 바이에른 유일의 증권 거래소가 있습니다. 국제 스포츠 행사, 무역 박람회, 볼만한 가치가 있는 수많은 건물 덕분에 뮌헨은 국제 관광 명소이자 유럽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도시 중 하나입니다. 서울에서도 뮌헨으로 가는 직항이 있습니다. 여행객들은 공항에서 내리면 바로 마리엔 광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신시청사에서 있게될 인형극 공연을 기다리게 됩니다.
신 시청사 남쪽 정면, 즉 마리엔 광장을 바라보고 있는 정면입니다. 2층에는 마리엔광장을 향한 큰 발코니가 있으며, 크리스마스시장 기간 동안 콘서트와 같은 대규모 축제에 사용됩니다. 메인 타워의 높이는 85m이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문객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신 시청사 뒷면은 작은 공원에 인접해 있습니다. 지하에는 라츠켈러라는 대형 레스토랑이 거의 전부 들어차 있습니다. 지상층에는 소규모 사업체에 임대되는 사무실과 공식 관광 안내소가 있습니다. 43개의 종과 32개의 실물 크기 인형으로 유명한 뮌헨 시청의 대형 기계식 시계는 1908년 뮌헨의 신시청사가 완공될 때 추가되었습니다. 하루에 두번 약 15분 동안 16세기 뮌헨 역사의 두 가지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재연합니다.
윗 층은 유명한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설립하여 뮌헨의 맥주 역사를 시작한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와 로렌의 레나타의 결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행복한 커플을 기리기 위해 바이에른을 상징하는 흰색과 파란색말은 탄 기사들과 신부의 로트링겐을 상징하는 빨간색과 흰색 말을 탄 실물 크기의 기사들이 벌이는 마상 창 결투 토너먼트가 펼쳐지고, 바이에른의 기사가 승리합니다. 그 다음 아랫 층은 쿠퍼 춤으로도 알려진 셰플러 댄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1517년에 발생한 심각한 전염병의 종식을 묘사합니다. 쿠퍼들은 전염병에 겁먹은 주민들이 다시 집에서 나올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거리에서 춤추었습니다. 쿠퍼들은 공작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들의 춤은 어려운 시기에도 권위에 대한 인내와 충성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춤은 7년마다 뮌헨에서 공연됩니다. 이 춤은 독일 카니발 동안 공연되며, 2019년에 공연되었습니다. 쇼가 끝나갈 무렵, 꼭대기에 있는 아주 작은 황금 수탉이 세 번 조용히 울면서 쇼의 끝을 알립니다.
뮌헨에서 보이는 알프스의 흰눈과 파란 하늘은 바이에른의 상징입니다. 뮌헨에 본사를 둔 BMW의 로고도 파란색과 하얀색의 조화입니다. FC 바이에른의 로고의 중앙에 들어 있는 바이에른 주의 깃발은 알프스의 만년설과 파란하늘을 상징합니다.
호프브로이하우스 암 플라츨은 1589년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홀 중 하나입니다. 당시 오늘날 맥주홀이 있는 곳에서 모퉁이를 돌면 바로 있는 옛 왕궁의 양조장입니다. 이 맥주는 최초의 양조업자인 하이메란 폰그라츠와 양조 과정에서 천연 재료만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한 1516년의 “바이에른 맥주 순수법” 덕분에 빠르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빌헬름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막시밀리안 1세는 진하고 무거운 갈색 맥주인 브라운비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7세기 초 막시밀리안 1세는 양조장의 주력을 밀맥주로 돌렸고 다른 모든 사설 양조장이 밀맥주를 양조하는 것을 금지하여 독점을 만들었습니다. 1612년 하이메란 퐁그라츠의 후계자인 엘리아스 피클러는 더 강한 맥주를 양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그래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마이복이 탄생했습니다.
사실, 마이복 맥주는 너무 유명해져서 한때 도시를 멸망으로부터 구하기도 했습니다. 1517년 시작된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전유럽은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대립이 일으나게 되고 30년 종교전쟁은 카도릭 뮌헨에도 찾아왔습니다. 1632년스웨덴의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국왕이 바이에른을 침공했을 때, 그는 뮌헨 전체를 약탈하고 불태우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민들이 인질 몇 명을 대표로 보내 항복하고 호프브로이하우스 맥주 60만 배럴을 넘기면 도시를 평화롭게 떠나기로 동의했습니다.
1852년 막시밀리안 2세 국왕은 양조장 소유권을 바이에른 왕국으로 이전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뮌헨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이 “HB” 로고가 있는 맥주잔을 가지고 돌아온 덕분에 호프브로이하우스는 빠르게 뮌헨의 주요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습니다. 전 세계에 프랜차이즈가 생겼고 서울에도 들어 왔습니다.
시청 바로 옆에는 이전에 호프브로이 양조장이었던 뮌헨의 호프브로이하우스 암 플라츨이 있습니다. 지금은 식당으로 운영되는데 뮌헨을 찾는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바이에른 주 정부가 소유한 독일 뮌헨의 양조장 입니다. Hof는 바이에른 왕국의 왕립 양조장으로서의 양조장 역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양조장은 독일에서 가장 큰 민속축제인 옥토버 페스트에서 가장 큰 텐트 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가 물려준 오리지널 레시피를 사용하여 양조한 맥주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현재 생산되는 맥주로는 바이스비어와 헬레스, 마이복, 둔켈, 옥토버페스트 라거가 있습니다.
바이에른을 대표하는 많은 많은 음식 중에 한국사람들이 유난히 사랑하는 슈바인스학세는 돼지 요리로 돼지 다리 발목 바로 위, 고기가 많은 부분의 요리입니다. 슈바인스학세는 전형적인 농민 음식 중 하나였으며, 저렴하고 질긴 고기를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한 레시피가 만들어졌습니다. 슈바인스학세는 준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고기는 때때로 며칠 동안, 큰 고기의 경우 일주일 동안 절입니다. 그런 다음 크기에 따라 일반적으로 2~3시간 동안 낮은 온도에서 구워집니다. 겉은 바싹하게 굽고 안은 촉촉한 슈바인스학세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슈바인스학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이드 메뉴는 감자와 양배추 요리입니다. 바이에른 버전은 감자 만두와 붉은 양배추 또는 자우어 크라우트와 함께 제공됩니다. 호프브로이하우스 암 플라츨은 더 이상 양조장이 아니고 식당으로 바뀌어 뮌헨의 최고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원래 양조장이어서 그럴까요? 이곳에서 먹는 슈바인스학세는 뮌헨 밀맥주와 어울려 관광객이 황홀한 축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듭니다.
낭만으로 가득한 이 곳에서 독일의 어두운 역사가 시작되는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1920년 2월 24일 호프브로이하우스에 약 2,000명이 모인 회의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공식 프로그램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그는 조직이 아직 비교적 작았을 때 당의 선전 책임자였습니다. 이듬해 1921년 7월 29일 그는 호프브로이하우스 암 플라츨에서 열린 회의에서 나치당의 총통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이 이렇게까지 쉬운 건가? 곧 우리는 영원의 나라에서 다시 보겠지. 하지만 우리들의 선택은 하늘의 별처럼 빛날 거야” 한스 숄과 소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이 세 명의 젊은이는 모두가 침묵하고 안주하던 나치 치하에서 저항했습니다. 전단지를 뿌리다가 체포된 지 4일만 교수형이 선고되고 이틀 후 단두대에서 꽃다운 젊음들은 처형되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대중적인 저항은 촉발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천문학자 프라이무트 뵈른겐이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 중에 하나에 백장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943년 2월 18일. 화창한 목요일 아침, 세 명의 백장미 회원들은 뮌헨 대학 본관의 아트리움대학의 강의실과 복도에 유인물을 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은 5차 선언문을 뿌릴 때까지 지하활동을 해왔던 백장미는 왜 공개저항으로 전환하였을까요?
그들은 학생들이 강의실을 나갈 때 볼 수 있도록 복도에 서둘러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소피는 마지막 남은 전단지를 꼭대기 층에서 아트리움으로 내던졌습니다. 잠시 후 들이닥친 게슈타포들은 학교의 모든 문을 봉쇄하고 이들을 체포했습니다. 일곱 번째 팜플렛의 초안은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될 당시 한스 숄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한스는 마지막 전단지의 초안을 찢어 삼키려하였습니다.
대학에서 1.6km가량 떨어진 비텔스바흐 궁내의 게슈타포 본부로 끌려가 4일간의 고문과 심문 끝에, 세 명의 대학생은 1943년 2월 22일 반역죄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판사는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세 사람은 같은 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특히 심문과 재판 기간 동안 확신에 찬 모습을 유지한 소피의 당당함은 유명합니다. 한스는 처형되기 직전 칼날이 내려오자 “자유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전단을 뿌리고 6일만에 처형되었지만, 이날 뿌린 전단은 백장미의 6차 선언문이기에 우리는 이들의 저항이 그리 짧은 스토리는 아니라는 걸 알수 있습니다.
뮌헨에 있는 28개 시립 묘지 중의 하나인 펄라치 숲에 있는 숄남매와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의 무덤입니다. 이들이 누워 있는 이곳에는 어쩌면 이들을 직접 가해했을지도 모르는 자들의 무덤도 나란히 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의 죽음을 웅변이라도 하는 듯이 말입니다. 알프스의 만년설을 만나 그 푸름이 더 돗보이는 바이에른의 하늘 위에 하얀 장미는 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담담하고도 담대하게 히틀러에게 맞서 걸어간 이들의 거사에 궁금한 점들이 생겼습니다. 7차 선언문을 준비하던 초안을 공개 거사일에 호주머니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비밀경찰에 체포되자 그 것을 씹어 먹어 증거를 없애려고 노력한 것을 보면 한스 숄은 자신이 체포되어 즉각적인 사형에 이르게 되리란 것을 몰랐던 같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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