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음악의 두 가지 과녁 뚫은 故 백남 김연준 한양학원 이사장의 불굴의 삶
교육과 음악의 두 가지 과녁 뚫은 故 백남 김연준 한양학원 이사장의 불굴의 삶
  • 미래한국
  • 승인 2008.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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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솟는 교육열정과 강한 카리스마로 교육사업 일으켜
謹弔記朴 대통령 “산업화 역군 길러내는 건 김연준”한양대 설립자인 고 백남 김연준 박사(사진)는 교육과 한국가곡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지난 1월 7일 94세를 일기로 한양대병원에서 소천했다. 고인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 평생을 바친 교육자이며 많은 가곡과 찬송가를 작곡한 음악가였으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일생 동안 잘 간직해 온 존경받는 교회 장로였다. 1914년 2월 20일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9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한양대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했다. 고인은 1959년부터 1973년까지 15년간 한양대 총장을 지냈으며 이후 한양대 학교법인인 한양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다가, 지난해 1월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이사장 직을 최선근 현 이사장(86)에게 넘겼었다.고 김연준 박사는 한양대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한 이래, 수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양대를 중심으로 육영 사업에만 몰두하였으며 고인의 샘솟는 열정과 강한 카리스마는 오늘날 한양학원이라는 방대한 교육사업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어떤 난관이나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그 힘은 바로 신앙의 힘이었음은 그를 아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얘기다. 매사에 정직하고 분명하며 열정적인 고인의 성품은 그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신앙처럼 강한 리더십으로 감복하게 만들었다.한양대 의과대학 학장을 지낸 정풍만 교수(소아외과)는 고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상을 이렇게 추억한다. 당시 의과대학을 키우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만 60세의 김연준 한양대 설립자가 그를 불렀다. 정 교수는 한양대 의대로 옮길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나 ‘한 번 만나보자’는 생각에 찾아갔다. 그런데 김 설립자를 보는 순간 그는 대학 시절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처럼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과 김연준 설립자는 건방지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사람을 제압했다. 김 설립자가 ‘훌륭해. 근무해’ 하는 한마디에 나는 그대로 한양대에서 일하게 되었다.” 1970년 초 청와대 경호관이었던 백상규 씨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산업화 계획을 세우는 건 나지만 산업화 역군을 길러내는 것은 김연준이구먼”이라고 자주 말했으며 고인을 일컬어 ‘괴인’이라고 부르며 아꼈다는 것이다. 고인은 평소 별명이 ‘단벌신사’였으며 검은색 구두, 검은색 코트, 두 벌의 검은색 정장만 입으며 검소하게 살았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뿐만 아니라, 고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무려 1610곡에 이르는 가곡의 작곡 규모는 거의 초인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중에도 ‘청산에 살리라’ ‘비가’ 등은 두루 애창되는 명곡으로 알려져 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현제명 교수 밑에서 음악을 배운 김 전 이사장은 한국 최초의 바리톤 독창회를 개최했고, 또한 1979년 독일 보쿰대의 초청으로 7개 도시에서 ‘한국 음악의 밤’ 연주회를 열었으며, 1981년에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연주하는 등 해외에서 14차례, 국내에서 18차례 발표회를 열었다.평생에 걸쳐 한결 같은 믿음과 정열로 교육과 작곡이라는 두 개의 과녁을 뚫은 고인의 성공적인 인생 경영은 이 시대의 사람들과 후학들에게 커다란 감화를 주는 삶의 훈장이 될 것이다. 또한 오로지 근검절약과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한 고인의 삶의 철학은 이제 모든 사람들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지혜로 남게 되었다. 김창범 대기자 cbkim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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