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식량위기를 ‘선군정치’로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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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08.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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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왜 김정일 정권은 붕괴하지 않는가 - 2
문예춘추 발행 2007/9/15서평 ‘對北朝鮮·中國 機密 파일’ - 오고야 말 북한과의 충돌에 대해歐陽善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 아주국) 著도미사카 사도시 富坂總 (일본인) 編中 천안문 사건으로부터 교훈 - ‘軍 장악이 가장 중요’金正日, 국방위원장職을 金日成으로부터 승계해 軍權 장악김정일이 왜 선군정치 체제를 구축했는가를 생각할 때 거기에는 현실적인 이유와 동시에 깊은 배경이 발견된다. 김정일에 대해 심모원려(淹謀遠慮)의 자질에 뛰어나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그 근거가 되는 사례의 하나로서 1994년 7월 8일 김일성 급사에 대한 대응이 자주 얘기된다. 아버지의 급사로 50년 가까이 지속된 김일성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북한정치는 과도기에 들어섰다. 물론 김정일로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말 그대로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굳혀져 흔들림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버지에 비해 수령으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김정일은 아버지가 신처럼 떠받들여졌던 그 위상을 교묘히 차용함으로써 민심 장악을 획책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죽었어도 곧바로 국가주석이나 당의 총서기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후 헌법을 개정해서까지 김일성을 영구 국가주석이라는 지위에 놓아 국가주석이라는 종래의 원수(元首)로서의 포스트를 깨끗이 폐지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仁德의 후계자’라든가 ‘효자(孝子)’로서의 이미지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후 3년 동안 상(喪)을 치른 것이다.옛 중국에서는 청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양친이 사망한 경우에는 그 아들은 아무리 높은 지위의 관리일지라도 공직을 즉시 떠나 시골에 돌아가 양친 영전에서 3년간의 복상(服喪)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것은 유교에서 말하는 ‘효행’의 대의로서 역대 왕조의 제도로도 돼 있었던 것인데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3년 복상(服喪)기간 동안 軍 장악에 최우선3년의 복상(服喪) 기간에 김정일은 정부 기구의 변동 등 모든 것을 동결했었는데 군대에 대해서만큼은 그때까지 없었던 유연한 정책을 시행함과 동시에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군인을 차례차례 발탁해 나갔다. 선군이라는 말 자체도 복상(服喪) 중인 1995년에 군 최전방 초소를 시찰했을 때 처음으로 김정일의 입에서 직접 나왔던 것이다.보통의 생각으로는 정치 과도기에는 권력의 신속한 인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질서의 공백상태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원래 경제가 곤궁한 북한 사회에서는 더욱 더 이 질서의 공백에 의한 동란이나 폭동이 걱정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정일이 이 시기 군의 권위를 강조해서 위압의 효력을 본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또 한가지 대홍수 등 자연 재해 발생에 대한 김정일의 수완도 그의 능력을 말해주는 에피소드의 하나일 것이다. 수령인 아버지의 급사 후 얼마 있지 않아 100년에 한 번이라는 홍수가 북한 전국토에 피해를 입혔다. 본래 충분한 것이 못됐던 식량 배급은 이 때문에 더욱 줄어들고 굶어죽는 사람이 각지에서 속출했다. 홍수가 일으킨 혼란에 의해 국내를 아무리 엄하게 탄압해도 지금까지처럼 인심을 장악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탈북민도 이 무렵을 고비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김정일 정권은 이르면 1년 늦어도 3년 안에 망할 것이다.’ 당시의 서방 여러 나라 그중에서도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이러한 견해가 널리 퍼졌었다. 그런 결과를 바라고 있었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의 코멘트 속에는 북한의 안락사를 재촉하는 듯한 뉴앙스가 담겨 있는 듯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이 무렵에는 북한의 수뇌부 가운데도 ‘생사 존망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북한 군부의 일부로부터는 “위협받아 충격사하기 보다는 전사하는 쪽을 택한다”는 발언까지 있었던 형편이었다. 90년대 중반 체제위기 직면 … 경제회생과 정권 안정 中 후자 선택노동당 중에는 중국의 흉내를 내 경제의 개혁·개방을 추진하자는 의견도 나왔었는데 경제의 재생과 정권의 안정 어느 쪽을 택하느냐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가차없이 경제 우선의 주장을 때려부수고 주저없이 선군정치의 길로 매진한 것이다.김정일의 정치적 권위는 이 시기부터 단번에 상승했다. 결국 ‘이르면 1년, 늦어도 3년 안에 망한다’는 김정일 정권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면서도 오늘날까지 존속해 온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세계의 외교 무대에서 주역 노릇을 하며 자기들을 조소해 온 나라들을 역으로 갖고 노는 꼴이 되어 있다.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 구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진영이 줄줄이 붕괴된 사실은 김정일에게 큰 충격을 주는 동시에 경종이 되었다. 1989년에는 22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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