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시스템 운영의 귀재 … 국력 극대화
박정희는 시스템 운영의 귀재 … 국력 극대화
  • 미래한국
  • 승인 2009.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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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구원 우남리더십과정 강연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쿠데타로 권력 잡아 개방정책 펼쳐 지적 능력·의지·품성·국제안목 탁월

이승만과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가진 건 대한민국 국민들의 축복이었다. 이들은 지적 능력과 교양, 의지, 품성, 세계적 안목 등 인간적 모든 면에서 당시 2, 3천만 국민 중 최고였다. 그러한 능력을 갖춘 이들이 또한 권력의지를 갖고 대통령이 된 것은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다. 이승만은 인재양성과 농지개혁, 한미동맹 등 오늘날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의 초석을 세웠으며 후계자 박정희는 그 울타리 안에서 오늘날 ‘눈에 보이는’ 경제건설을 이룰 수 있었다.

박정희는 시스템 운영의 귀재였다. 그는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화함으로써 국가 생산성을 극대화시켰다. 박정희는 인격적으로 반듯하고 균형을 갖춘 ‘참한’ 사람이었다. 그는 타고난 혁명가이자 군인이며 교사였다. 위대한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 가운데 성장한 박정희는 구미 보통학교 시절부터 나폴레옹 전기를 읽으며 군인의 꿈을 키우게 됐다.

대구사범 시절에는 73명 학생 중 73등 꼴찌를 하고 기숙사료를 못내 퇴교를 당하기도 했고 문경 보통학교 교사 시절에는 학생들이 기억할 만한 자상한 선생님이었지만 만족하지 못하다가 자신의 꿈을 좇아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뒤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국가주의와 무사도 정신을 배웠고 이후 미국에서도 교육을 받으며 서양을 체험했다.

해방 공간은 박정희에게 좌절의 시기였다. 만군 중위에서 실업자로 전락했고 경비사관학교 생도 시절에는 김종필의 장인이기도 한 자신의 형 박상희의 좌익혁명과 죽음을 목격했으며 남로당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백선엽 대령과 이승만 대통령의 선처로 석방된 뒤에는 민간인 정보원으로 활동하기도 하면서 김종필 등 육사 8기생과 사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의 죽음과 애인의 가출 등 불행한 시기였다. 6·25는 박정희에게 기회를 가져왔다. 6·25가 없었으면 한반도는 1960년대 김일성에 의해 공산화됐을 가능성이 컸지만 트루만 미 대통령의 즉각적인 참전 결정으로 한국은 구출되었고 박정희는 김일성을 극복하는 국가적 지도자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6·25를 통해 복직된 박정희는 이용문과 모의해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4·19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5·16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이용문이 지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는 모순덩어리인 1950년대 군인사회에서 살면서도 병적으로 청렴했다. 전후 혼란기 속에서 그는 국가개혁의 야망을 품게 됐고 웅크린 맹수처럼 은인자중하며 인맥을 구축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5·16혁명은 최고의 교육과 인적 능력을 갖춘 군대가 국가를 통치하게 됐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6·25를 거치며 한국에는 거대한 군대가 만들어졌고 군대는 선진화된 우수인력을 보유하게 됐다.

군대는 기획, 예산, 감사 등 모든 행정과 기술 면에서 정부보다 앞섰고 해외 유학도 군장교의 유학자수가 민간인보다 많았다. 박정희도 혁명 초기에는 이른바 민족주의와 자주적인 생각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자력갱생 수입대체 등 자주노선을 추구했지만 1962~1964년 사이 수출입국 개방으로 국가정책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가 개방정책을 편 것은 세계적으로 그 예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박정희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군사비를 줄이고 개방정책으로 나가는 ‘비군인적’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의 인문학적 교양과 애국심,미국과 일본을 경험하면서 얻은 세계적 안목이 작용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죽음은 타이밍이 좋았다. 10·26이 없었으면 부마사태 같은 민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다. 박정희의 후계자 전두환은 8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어갔으며 사리를 위해 박정희를 격하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을 맞으면서 ‘난 괜찮아…’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차지철처럼 총탄을 피해 화장실로 도망가다 죽음을 맞았더라면 국민의 뇌리에 남은 그의 마지막은 초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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