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그를 통해 미래를 본다
이승만, 그를 통해 미래를 본다
  • 미래한국
  • 승인 2009.03.18 00:00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만 탄신 134주년
▲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연맹 앞에서. 그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국제연맹 총회에 참석했다. (1933)

근대화·산업화 기틀 만든 대통령, 이제는 제대로 역사적 평가 이뤄져야

오늘날의 위기를 흔히 ‘가치관의 위기’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해졌어도 자유, 인권, 민주주의 등에 대한 개념 혼란으로 정치, 사회 또한 교육 현장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한국>은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탄신 134주년을 맞아 이 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 이념을 심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이승만 그를 통해 우리는 현재를 진단하고, 나아가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지난 2월말 출간된 ‘이승만 동문 서한집(유영익 엮음. 연세대출판부)’의 내용과 16일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우남이승만연구회 주최 제4차 학술대회 ‘이승만의 독립노선과 독립운동’의 내용도 함께 소개한다. 이승만 서한집은 이승만이 1899년부터 1945년까지 주요 인물들과 주고받은 666통의 동문(東文·국문·국한문·한문) 서한을 정리해 펴낸 것으로 근대한국사 연구를 위한 획기적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이승만 서한집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함께 최초의 한국의회를 소집하고 국가건설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농지개혁은 6.25전쟁 때 농민들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선동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다 이승만은 일본이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 1875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전주 이씨 양녕대군의 17대손 왕족으로 태어났다. 소년 이승만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 영어학부에 들어갔다가 ‘서양문명’과 만나게 된다. 일찍이 조선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조선의 정치체제 개혁에 앞장서면서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했고, ‘조선 최초의 근대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하고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시위 연설에 나서는 등 맹렬한 정치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박영효와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돼 1898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감옥에서는 조선 최초의 한영사전을 집필했고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정신’을 탈고해 원고를 옥 밖으로 내보내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조선의 기독교화를 평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고종의 배려로 5년 8개월만에 석방된 그는 석방직후인 1904년 고종의 측근인 친미파 민영환, 한규설의 밀서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10여분간 면담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신의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자 이듬해인 1905년 워싱턴의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해 2년만에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 진학해 석사와 박사과정을 3년만에 끝마쳤다. 자신은 미국에서 편안히 공부를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 하루빨리 공부를 마치고 조국에 돌아가 독립을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며 미 대학당국을 설득했다. 그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을 주제로 논문을 써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프린스턴대 총장으로부터 학위를 수여 받았다. 이후에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내각제 국무총리직을 통보 받고 그해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함께 최초의 한국의회를 소집하고 국가건설의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하는 등 일제시대 하에서 활발한 독립·외교 활동을 펼쳤다.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건국 이승만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원칙과 소신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는 제정 러시아 시대 때부터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소련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소련이 주창하는 공산주의도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해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그의 소신은 소련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이승만은 해방 이후 소련이 참여하는 신탁통치, 좌우합작 통일노선 등에 모두 반대하며 73세 때인 1948년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국한다. 건국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기본 뼈대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는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름으로써 시작됐다. 선거인 명부에 기록된 사람의 92.5%가 투표해 5월 31일 이승만을 포함한 198명의 당선자들이 국회를 구성했다.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독립을 찾은 것이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북한에서 월남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또한 새 정부가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밝혔다.

▲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스스로를‘동생(弟)’이라 낮추면서‘엄동에 겹옷도 입지 못하는’ 임정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다

이후 이승만은 동년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고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식을 가졌다. 취임사에서 이승만은 제일 먼저 북한 지역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후 그는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에 있는 우리 민족도 소련의 공산주의로부터 해방돼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통일의 방향을 언급한 것이다.

▲ 그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국립묘지로 향하는 이 박사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의 행렬.(1965)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탁월한 외교업적 건국 이후 이승만은 국민을 교육하고 잘 살게 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꽃 필수 있기 때문이다. 농지개혁을 적극 추진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 인구의 73%가 농민이고 그 가운데 절반이 소작농이었다. 농지개혁은 지주 계급을 몰락시키고 자작농을 키우는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은 불평등한 봉건적 신분제를 빨리 무너뜨리는 수단이 되었다. 농지개혁은 6.25전쟁 때 농민들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선동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다. 의무 교육제를 통해 국민을 교육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모든 개인이 선거에서 현명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받은 국민이 있어야 했다. 이승만은 1949년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 교육제를 도입했다. 나라가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는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했다. 이들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공업화에 투입돼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다. 한국의 MIT격인 인하공과대학의 설립, 원자력 기술의 도입도 이승만 정부 때 이루어졌다.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 한국이 안보를 보장받고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온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도 이승만 정부 때 이루어졌다. 1945년 북한이 공산화되고 1949년 중국 대륙 전체가 공산화되는 위기 상황에서 한국은 1950년 6.25전쟁을 맞았다. 이승만은 미국이 요구한 휴전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한미동맹의 체결을 요구했고 미국으로부터 경제부흥에 필요한 장기적인 원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약소국의 지도자였지만 이승만은 “한국을 공산세계에 대한 자유세계의 싸움을 같이 수행하는 대등한 동반자로 도우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또 그는 한민적의 정신적.도덕적 자질을 바꾸어 놓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 기독교 장려 등의 문화적 개혁도 단행했다. 여성이 제대로 교육받고 남녀 공학 학교가 처음 생긴 것도 이승만 정부 시대 때 이루어 진 것이다. 이승만 업적, 공(功)과 과(過) 함께 봐야 물론 그의 공(功) 큰 만큼 과(過)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연구의 대표적인 권위자인 유영익 전 연세대 석좌교수는 “이 대통령이 건국 초 친일파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환을 남겼고 1954년에 ‘4사5입’이라는 억지 논리로써 개헌을 강행해 장기 집권을 도모하고 그 후 자유당과 경찰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자행 내지 묵과한 점은 실정(?政)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유영익 교수는 “지금까지의 이승만 연구가 비판일변도로 흘렀으며 그 결과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한 역사적 인물의 업적을 논할 때 그 인물이 처했던 특수한 상황과 입장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도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대한민국이 새로 도입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정부든 국민이든 운영이 서툴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또한 “이승만 정부가 국가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운동까지 허용할 수는 없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이 정지되거나 국회가 해산되거나 언론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훼손된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 4.19의 와중에도 부상당한 환자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이 대통령 (1960)

현재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연구는 앞서 언급된 ‘이승만 동문 서한집’이 새롭게 발간되면서 종전보다 훨씬 풍부해졌다. 이 책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가정생활, 국내외 연구에서 잘 밝혀지지 않은 1919년에서 1925년까지의 임시정부사, 이승만과 교신했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정치적 입장 내지 태도들을 조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국민의 대부분이 그를 평소에 ‘이 박사’로 부를 정도로 존경했고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경무대를 떠난 이승만 대통령이 5년만에 유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 박사를 추모하던 행렬이 고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 행렬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 134주년을 맞이하며 가난한 나라였지만 미국을 호령하던 강력한 지도자, 나라의 기틀을 세운 똑똑한 지도자, 국민의 가슴에 희망을 주었던 따뜻한 지도자 이승만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서은옥 기자 seo0709@futurekorea.co.kr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KH 2015-09-21 15:25:35
네 맞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역사 되짚음이 필요한 시점 같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도 올바른 평가가 필요합니다.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asdel 2015-07-23 16:58:18
이승만이 잘 한 것이 뭔가요? 그냥 이승만이 잘한 것만 늘여 놓지 말고 그 사람이 했던 수많은 과오들도 같이 기사화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게 아닐까 합니다만....

더라이 2015-07-22 15:51:16
더라이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