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교회를 다녀와서
독일교회를 다녀와서
  • 미래한국
  • 승인 2009.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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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 장벽 붕괴 20주년
▲ 독일통일의 현장 라이프치히의 거리와 니콜라이 교회 전경
▲ 조성돈 교수
지난 1월 학술진흥재단의 프로젝트 건으로 동료교수들과 독일을 방문하여 동독지역에서 통일을 경험하였던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올해 독일은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진 지 20주년을 맞이해 그 의미가 더 컸다. 이번 연구여행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통일은 ‘기적’이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한 것도 없고 준비한 것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통일이 왔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바로 전까지도 혹시 자신들에게 통일이 오면 어떨까 하는 공상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는 그 기적이 이루어지기까지 서독이나 동독의 교회들이 분명 많은 일들을 감당했다. 단지 그 시간이 20년 지나고 나니까 이제 돌아볼 때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저절로 이뤄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동서독 교회는 동·서독의 정부가 들어선 1949년 이후에도 1967년까지 약 18년간 한 교회의 조직으로 머물러 있었다. 비록 나라는 갈라졌을 지라도 교회는 갈라질 수 없다는 그들의 믿음이 다른 두 나라에 한 교회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들은 국가가 갈라진 이후 서로 파트너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노회는 노회별로, 교회는 교회별로, 목사는 목사별로 동서독의 교회가 서로 파트너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보통 서독의 교회들이 동독의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서로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포 보내기 운동이다. 1950년대 서독의 교회는 동독의 파트너 교회에 소포를 보내기 시작했다. 동독 교인들의 명단과 주소를 서독의 파트너 교회의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개인적인 소포를 보내도록 한 것이다. 그 소포에는 생필품이 주를 이루었고 기독교서적과 주방용품, 옷감에 통속소설까지 포함되었다. 1955년 한 해 동안 이러한 소포는 뷔르템베르크 한 노회에서만 20만개가 넘게 서독으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독일은 통일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생각보다 쉽게 넘기고 있다. 그 이유는 먼저 통일을 위해 사람들이 기꺼이 희생과 헌신을 한다는 것이다. 독일사람들은 아직도 ‘연대세(Solidaritaetszuschlag)’라는 세금을 내고 있다. 소득세나 주민세의 5.5%에 이르는 이 세금을 독일인들은 별 저항 없이 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그들에게는 현재 중요한 것은 바로 유럽연합이라는 더 큰 비전이 있다는 것이다. 유럽이 하나가 되는 상황에서 구 동서독이라는 갈등의 요소는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남한에 있는 우리에게 ‘통일 이후’ 요구하는 바는 첫째 통일을 위한 헌신과 희생이다. 무너진 북한을 품을 수 있을 정도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는 한반도를 넘어서는 인류 전체를 볼 수 있는 큰 비전이다. 민족주의에 매여 있는 한 우리는 이 좁은 한반도에서 남·북의 갈등을 넘어 설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더 넓은 선교의 비전으로 중국과 러시아까지 품을 수 있는 큰 비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일 사람들이 고백하듯 기적으로 찾아올 통일에 대한 열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고 그것을 준비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다.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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