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규 원장, 행려병자들과 살아온 50여년의 고집스런 삶
백영규 원장, 행려병자들과 살아온 50여년의 고집스런 삶
  • 미래한국
  • 승인 2009.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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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인생 : 백영규 원암수양관 원장
▲ 백영규 원암수양관 원장
전쟁직후 군산 역 인근 바닷가에는 버려진 사망자들이 많았다.그는 그들의 시신을 수거해 리어카에 싣고 시내 한 바퀴를 돌며장례를 치르고 안장시켜주곤 했는데 그렇게 처리한 시신이 200여구에 이르렀다.백 원장은 기독교 사랑을 실천했다.그러나 그 사랑은 원생에 대한 무조건적 보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원생들이 저마다 자기 능력을 깨닫고 자립하도록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이었다.이념과 권력의 횡포에 대항한 무저항 예수 사랑비전향장기수 보호하다 좌파 때문에 곤경 처하기도“여기서 관리하는 비전향장기수들의 묘지를 ‘평화의 공원’으로 성역화하여 북한사람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시오.” 노무현 대통령의 2차 남북정상회담이 2007년 8월 28일(이후 10월 2일로 연기)로 임박한 시점인 7월 20일경 국정원에서 왔다는 수사관 2명이 ‘원암의 집’을 다급하게 방문하여 백영규 원장(77·사진)에게 요구한 얘기였다. 백 원장은 이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념을 떠나 종교적 사랑으로 수 십 년간 200여 원생들과 비전향장기수들을 돌봐온 기독교 휴머니즘이 정치꾼들에 의해 희화화(戱畵化)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백 원장은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 ‘원생 폭행과 운영비 횡령’이라는 혐의로 77일간 감방 생활을 해야 했고, 작년에는 한때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이라고 평가 받던 그가 세운 복지시설이 하루아침에 폐쇄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과 권력이 인간을 향한 성자(聖者)의 사랑을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본질을 훼손한 사례가 아니었던가? 아직도 봄추위가 가시지 않은 지난 12일 전북 완주군 소양면 위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독지골 원암마을을 찾았다. 50여 년을 행려병자, 부랑인들과 함께 살아오며 지극한 사랑을 실천해 온 진정한 사회복지의 현장, ‘원암의 집’이 그곳에 있었다.좌우의 어떤 이념이나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만 실천해 왔다는 백 원장은 자식이나 다름없던 원생들이 다 떠나가고 폭격을 맞은 듯 텅 빈 ‘원암의 집’ 시설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념의 전쟁터에서 신앙 체험백 원장은 남북의 이념이 부딪히는 현장에서 태어나 가족들이 죽어가는 처절한 고통과 비극 속에서 살아 왔다. 3남 중 둘째로 태어난 백 원장은 여순반란사건과 연루된 남로당 조직인 ‘전북트럭회사’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과 파출소에서 어이없이 맞아 죽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17세 형의 죽음, 그리고 동생의 자살 등 쓰라린 가족사를 안고 성장했다. 당시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트럭회사에 다녔을 뿐 남로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 군산의 첫 무료숙박소 시설
어린 시절 백 원장은 어머니의 신앙을 보며 큰 영향을 받았다. 외할아버지 송영도 씨는 군산지방선교를 맡은 미국 남장로회가 전도한 첫 입교인이자 세례자였다. 송 씨는 이석교회에 출석하며 삭개오의 믿음으로 자기 재산의 절반을 바쳐 개복교회, 구암교회, 회현교회 등을 짓고 개척했다. 이러한 외가의 신앙적 전통을 따라 백 원장도 교회를 나갔고 어린 나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대적 비극들을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17세 되던 해 교회에서 홀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일생을 바꾸어 놓을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너는 내 일을 하라.” 이때 그는 목사가 되어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했고 전주고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한신대 신학과에 입학했다.6.25가 터지자 전주 일대는 이념의 전쟁터로 변했다. 당시 북조선민주청년동맹이 군산지역에도 조직되면서 백 원장도 여기에 가담하라는 강압을 받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외갓집으로, 산으로 도망 다녔고 그럴수록 신앙과 신학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그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두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1954년경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면서 전적으로 기도생활에 몰입했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성령을 강하게 체험하면서 부흥강사로 나서게 되었다. 약관 23세 때였다.당시 그는 주로 회개와 성령을 주제로 말씀을 전했는데 그가 이끈 부흥회는 회개의 은혜가 넘쳤다고 한다. 당시 그가 부임한 군산 원당교회 일대는 전쟁 중에 좌우 양측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고통과 증오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는 “회개하라, 직접 원수 갚으려 하지 말라”고 외쳤고 그 때마다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넘쳤고 부흥회가 끝나면 교회마다 평안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기장 교단에서는 그의 부흥회를 이단시하여 중지를 요청했고 그는 이에 즉각 순종하여 부흥회 사역을 그만 두었다. 거지 아이를 끌어안고 복지사업 맹세 이때부터 백 원장은 새로운 사역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길이 바로 사회복지 사업이었다. 1957년경 영하 15도의 추위에 군산역 앞에서 떨며 죽어가는 거지 아이를 발견하고 곧바로 들쳐 업고 가까운 교회로 들어가 부둥켜안고 체온으로 살려 놓을 때 그는 마음으로 이렇게 맹세했다. “평생 가난한 자, 불쌍한 자를 위해 목회하리라.”전쟁 직후 군산 역 앞에는 행려병자들이 많았고 특히 바닷가에는 버려진 사망자들이 많았다. 그는 그들의 시신을 수거해 리어카에 싣고 시내 한 바퀴를 돌며 장례를 치르고 안장시켜주곤 했는데 그렇게 처리한 시신이 약 200여구에 이르렀다. 이러한 노력으로 군산에 처음으로 행려병자를 위한 구호소인 ‘무료숙박소’가 만들어졌다.당시 그는 개신교도들이 행려병자들에 대한 봉사와 구호가 인색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성경 마태복음 25장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이웃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선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1965년 서울대 유달영 박사로부터 당시 박정희 정권이 주관한 3.1문화상 특별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백 원장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행려병자들을 도운 것이 당연한 일이지, 상 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1968년 그는 군산에서의 봉사생활을 마감하기로 했다. 사업이 확대되고 조직이 자라나며 자신이 감당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장 판막에 이상이 생겨 휴양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 원암수양관 입구 현판
5만3,000평 수양관 설립, ‘품바 대행진’ 화제 백 원장은 지리산 밑인 경남 하동군 화계면 산골짜기에 쌀 여섯 가마로 10만 평의 땅을 마련하고 소 2마리로 목장을 시작했다. 10년이 지나 80마리의 소를 기르게 되자 그는 다시 그 곳을 팔고 1978년 현재의 원암마을로 돌아와 부랑아를 위한 복지시설을 운영했다. 5만3,000여 평의 땅을 개간하여 자립 자활의 길을 개척했다.그는 ‘사회복지법인 원암수양관’, 즉 ‘원암의 집’을 운영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시설의 주인은 원장도 직원도 아니고 원생들이다. 둘째는 정부 보조를 받기보다 스스로 살 길을 찾아 수입을 만들어 자활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백 원장은 기독교 사랑을 실천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원생에 대한 무조건적 보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생들이 저마다 자기 능력을 깨닫고 자립하도록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그래서 원생이면 누구나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세상에 굴하지 않고 떳떳이 살아 갈 수 있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 백 원장의 소망이었다. 백 원장 자신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지만 원생들의 사회 적응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원생들이 서로 부부의 연을 맺어 가정을 가지게 함으로써 사회 복귀가 실제화되게 하였다. 1988년 9쌍의 신혼부부를 탄생시킨 이후 모두 50여 쌍의 부부가 탄생하는데 기여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 MBC TV가 ‘품바의 신혼대행진’이라는 다큐먼트프로그램으로 제작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다행히 몇 가지 시도 끝에 화훼농과 유기농으로 ‘원암의 집’은 비교적 안정된 경제를 이룰 수 있었다. 덕분에 갖가지 꽃으로 가득한 ‘원암의 집’은 80년대부터 20여 년간 많게는 200여 명의 남녀 원생들을 수용하여 그들이 평안한 생활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고 전국에서 많은 사회복지 지망자들이 견학 오는 모범적인 배움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거물급 비전향장기수 수용, 좌파 출입처 돼 그러나 시련은 생각지 않은 곳에서 닥쳐오기 마련이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원암수양관도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빠져 들었다. 광주민주화운동 후 정부는 주거가 확실치 않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도 단위로 만들도록 했고 1981년 원암수양관을 전라북도 시설로 지정했다. 이 때 수양관은 부속부지 3,000평을 전라북도에 증여했고 도에서 배당한 인원 전원을 수용했다. 정부로부터 비전향 장기복역수들을 수용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검찰청으로부터 처음 인도받은 사람이 바로 ‘한천덕’이라는 비전향자였다. 당시 70이 넘은 노인이었던 그는 간첩 호송선의 선장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1년경까지 10여 명의 비전향자들을 수용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북한의 거물급 인사들이었다.그들 가운데 6명이 ‘원암의 집’에서 죽었고 백 원장은 그들을 위해 극진히 장례식을 거행했다. 현재 130여 명의 원생들과 비전향자들이 ‘평화의 동산’에 묻혀있다. 장례식에는 비전향자들이 상주를 맡았고 원생들이 조문하여 풍성한 영결식이 되게 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님을 감안하여 상여와 만장을 준비하여 전통적 장례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장례식 순서는 기독교 예식을 따랐다.현재 이곳에 안장된 비전향자는 한천덕 외에 유일순(빨치산 인민군 대위), 진태윤(최고위층), 김관희(최고위층), 김창섭(미구축함 폭파, 인민군 해군 소좌), 김경선(고위층) 등이 있다. 또 이 사람들 외에 당시 ‘원암의 집’에는 김영삼 정부 때 북한으로 인도된 김중정(간첩)을 비롯하여 이차훈(여간첩), 김영식(고위층) 등이 함께 수용되어 있었다.
▲ 원생과 비전향 장기수들의 무덤
노 정권, 수양관 시설을 좌파 성지화 노력 북한정권이 볼 때 이들 모두가 활용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한동안 민노당 당원을 비롯 한상렬, 강희남 등 대표적 좌파 인물들이 출입하는 곳이 되기도 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현재 평양에서 산다는 김중정은 백 원장을 존경한다며 ‘원암의 집’에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자유롭고 평안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고마워하고 있다고 한다. 노무현 전 정권 아래서 국가 기관이나 정치 단체들은 ‘원암의 집’을 끊임없이 납북관계의 미끼로 삼으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이 ‘원암의 집’ 가운데 1만4,000여 평에 달하는 ‘평화의 동산’시설을 좌파 세력의 성지로 성역화하려는 노력이었다. 북한정권이 크게 기뻐할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6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의 생전 기록들은 북한에서 이용가치가 컸을 것이다. 2007년 당시 모 국정원 직원은 비전향장기수들의 묘지 관리와 추모식 거행 등의 일체를 대표적 좌파 인물인 한 모 목사와 의논하고 비전향장기수 송환위원회와 협의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시도는 백 원장의 비리를 드러내 수양관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원장은 “원생 폭력과 운영비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이 되었어도 스스로 진실을 알기에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설을 폐쇄하면서 54명의 원생들을 정신이상자로 몰아 정신병 시설에 수용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던 원생 부부들을 생이별시킨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백 원장은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있는 보사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하루빨리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제 원암수양관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백 원장은 억울한 과거와 상처받은 일들을 다 용서했다고 했다. ‘형제들과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시편 133편 1절의 말씀대로 그곳을 남북이 하나 되는 민족적 감동의 현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용서와 사랑의 상징으로 ‘온겨레교회’를 세우는 것이 마지막 소망이라며 웃음을 내비쳤다.#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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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ㄹ 2016-11-13 18:18:01
가을이 지나면 기억이란 사랑보다는 밖에선 듣지못하네...ㅠㅠ아쉽

ㅎㅎㅎ 2016-11-13 18:16:49
가을노래 모음 ㅋㅋ
백영규 슬픈계절에만나요 이문세 기억이란 사랑보다
백영규 잊지는 말아야지 신계행 가을사랑
최양숙 가을편지

ㅎㅎㅎ 2016-11-13 18:14:28
가을 이문세-기억이란 사랑보다....
ㅋㅋㅋ노래....굿좋아요
추워지기전에 한번쯤은 듣고싶었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