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구출에 인생을 건 한국판 ‘쉰들러리스트’
탈북민 구출에 인생을 건 한국판 ‘쉰들러리스트’
  • 미래한국
  • 승인 2009.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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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관 임마누엘 탈북인선교원 원장
▲ 중국 도문과 북한 남양을 잇는 남양다리
탈북민들의 탈출경로는 연변에서 곤명을 거쳐 베트남에 이르는 코스가 일반적이다그는 소수 인원보다는 30여 명에서 많게는 8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인원을 대형버스로 한꺼번에 이송하는 방법을 선택했다북방의 겨울 추위가 아직 남아 있던 1996년 5월, 북한의 남양과 중국의 도문(圖門)을 잇는 두만강 남양다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월 17일 북한군 국경경비대가 두 명의 미국인 여기자들을 납치한 도문지역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13명의 탈북민들이 철사에 코가 꿰이고 손목이 묶인 채 맨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30~40대 남자 4명과 60대 할아버지 1명, 10살 가량의 아이 등 여자 8명이 낡고 얇은 옷가지를 걸치고 뒤섞여 가고 있었다. 그들의 코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 길바닥을 적셨다. 어떤 여성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그대로 쓰러졌는데 이들을 끌고 가는 인민군이 총대로 그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고통스런 외마디가 두만강 강변을 울렸지만 도문지역의 주민들은 아무도 이 행렬을 저지할 수 없었다. 이 장면은 수년 뒤 해외언론을 통해 생생히 보도되면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당시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세계에 알린 이가 박천관 한국국악찬양선교단장(62)이었다. 박 단장은 당시 30여 명의 단원들과 함께 두만강변에 위치한 도문기독교회를 방문하던 중 그 장면을 목격했다. 목사였던 그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된 데에는 분명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후 탈북민 구출을 일생의 사명으로 갖게 됐다. 그리고 2003년 1월, 박 목사는 자신이 중국감옥에 구류되기까지 2,080여 명의 탈북민들을 중국에서 제3국으로 탈출시켜 한국에 데려오는 일을 해냈다. 지금 그는 휠체어를 의지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됐다. 중국 감옥에서 고문을 수반한 5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지난 해 3월 귀국했지만 ‘레슬링선수처럼 건장했다’던 그의 몸은 이제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 휠체어를 타고 있는 박천관 임마누엘탈북인선교원 원장
버려진 고아에서 ‘국악찬양’ 선교자로 박 목사는 파란만장한 삶의 소유자다. 태어나자마자 고아로 버려졌고 우여곡절 끝에 판소리 인간문화재인 박귀선 씨를 만나 어려서부터 국악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다. 이후 한양공대를 졸업하고 중동 건설현장의 기술자로 일하다가 급성 간경화에 걸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도 했다. 그 후 ‘어차피 덤으로 얻은 인생이니 목회자의 길을 가자’고 결심했고 총신대 대학원을 마친 후 목사가 되었다. 목사로서 그의 앞날은 전도양양해 보였다. 그가 부임하는 교회마다 부흥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해 27살의 뇌성마비 처녀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를 극진히 돌봐준다는 소문에 여러 장애인들이 교회를 찾아왔고 어느새 교회는 28명의 중증 장애인 집합소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 천성이었던지 박 목사는 이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게 되면서 시무하던 교회를 떠나게 됐고 구로동 성당 옆 어느 주택가 지하방으로 이들을 데려가 함께 살았다. 그 무렵 그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가락시장을 헤매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중 성당에서 울려나는 장구소리에 옛 기억을 되살리게 되면서 새 비전을 갖게 되었다. 국악을 통한 선교의 꿈이 그것이었다. 그는 먼저 국악전문인의 재능을 발휘하여 무료 국악강습소를 하기로 했다. 무료강습소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돌보던 장애인들을 다른 좋은 시설로 분산 수용 시킨 후 1996년 한국국악찬양선교원을 정식으로 개원했다. 그리고 1998년에는 1,200여 명의 등록교인을 가진 한국국악찬양선교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그가 리드하는 국악찬양선교단은 국내는 물론 중국, 동남아, 유럽 등지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앞서 소개한 중국 도문기독교회를 방문한 것도 이런 유명세 때문이었다. 그리고 1999년에는 국악찬양신학교를 설립하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탈북민 구출사역의 시작 급속한 교회성장과 함께 충분한 재원이 마련되자 그가 서원한 중국 지역의 탈북민 구출사역은 가속도가 붙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고난의 대행군’이 진행되던 시기였으므로 두만강 지역에는 아사자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고 많은 탈북민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몰려왔다. 박 목사의 계획은 시의적절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중국 공안과 북한 보위부 사람들의 감시와 수색은 엄혹했다. 중국에서 발각된 탈북민들은 잔혹한 처우를 각오해야 했고 죽음이 기다리는 북송 길을 나서야 했다. 그는 우선 급한 대로 연변을 중심으로 몇 곳에 안전한 탈북민 거처를 마련했다. 한 곳이 발각되더라도 신속하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안전시스템을 갖추었다. 그리고 조선족교회 교인들을 동원해 탈북민들을 수소문하여 데려오도록 했다. 탈북민들은 신앙 때문에 중국에 온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왔다. 그래서 그들이 오면 먼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주었고 병든 자는 몰래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시켜주었다. 또한 위성방송을 통해 한국방송을 시청하게 했다. 세계와 한국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국제사회의 현실은 탈북민들에게 충격이었다. ‘거지나라’ 남한이 잘 사는 나라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 적응기간이 지나면 성경을 읽게 하였다. 매일 몇 시간씩 성경을 읽는 동안 기독교 신앙의 세계를 설명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진정으로 신앙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한 달 정도 기본적인 소양교육을 마칠 때면 대개 30, 40명의 탈북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본격적인 일이 시작되었다. 박 목사는 이들을 면담하고 지도하기 위해 먼저 탈북한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의 지도자들을 세웠다. 그들을 통해 탈북민들의 형편을 돌아보며 세밀하게 돌볼 수 있었다. 당시 이 사역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박 목사가 담임한 교회에 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국경까지 대형버스로 120여 차례 탈북민 이동 탈북민들의 탈출경로는 연변에서 곤명을 거쳐 베트남에 이르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박 목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의 탈출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 그는 소수 인원보다는 30여 명에서 많게는 8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인원을 대형버스로 한꺼번에 이송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일을 위해 버스에는 두 명의 조선족 공안을 동승시켜 호위하도록 했다. 이것이 번번이 만나는 검문검색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는 이렇게 평균 2주에 한 대씩 7년간 모두 120여 회의 버스 이송을 감행했다. 어떤 경우에는 검문검색을 피하기 위해 탈북민들을 모두 수갑에 채우거나 포승줄로 묶은 채 버스에 태워 죄수를 호송하는 차량으로 위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베트남 국경이 가까운 중국 마을에 탈북민들을 단체여행객으로 가장하여 대기시켜놓기 위해 여러 채의 여관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민들이 중국 공안에게 신고하기 때문이다. 또 국경 탈출 경로에는 그 지역주민들을 동원하여 경비대의 동향을 사전에 알려오도록 했다. 이 모든 일에 ‘공짜’란 없었다. 연변 조선족교회에 넉넉히 후원해야 탈북민들을 은밀히 모아올 수 있고, 안전가옥들을 여러 채 임대해 두어야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안전하게 피신시킬 수 있다. 또 버스를 빌리고 호위공안들을 채용하는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국경지역에 여관을 임대하고 육로든 뱃길로든 베트남으로 잠입하는데도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는 탈북민들에게 구출비용을 부담시키지 않았다. 2,080명에 이르는 탈북민들을 탈출시키는 데는 이른바 ‘브로커’들을 통해 하면 60억 원 이상이 들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 이 비용을 5억 원 정도로 낮출 수 있었고 경비는 자신이 담임목사로 있던 ‘한국국악찬양선교교회’에서 감당했다. 박 목사는 주중에는 중국에서 탈북민 보호, 교육, 국경이송 등의 비밀 사역에 전념하면서도 주말에는 어김없이 서울로 날아와 현장에서의 선교경험을 교회 강단에서 쏟아 냈다. 중국서 5년간 옥살이, 전기고문·물고문 당해 그러나 탈북민 구출사업은 2003년 1월 갑자기 중단됐다. 그해 1월 15일 산동 위해시 지역에 13명의 탈북민들이 숨어 있다는 조선족교회의 제보를 받고 달려간 것이 고난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탈북여성으로 가장한 북한 보위부 요원이 만든 함정이었다. 그는 이날 12명의 탈북민과 함께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산동구치소에 한 달간 갇혀 있었다. 탈북민 보호가 그의 ‘죄’였다.이후 그는 ‘사기죄’가 추가돼 연변구치소로 이감되었다. 한 조선족 부부가 박 목사가 탈북민 보호를 위해 매입한 연변 내 6층 건물을 탈취하기 위해 도문시청의 취업부장과 공모해 사기죄로 고소했던 것이다. 박 목사는 구류 중에 온갖 고문을 당했다. 여러 구치소를 거치며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 잠안재우기 등의 말못할 학대를 당했다. 외국인으로서의 배려도 없었다. 마지막 6년형을 받게 되는 시점에서야 한국 영사관 직원이 나타났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온갖 고초 끝에 반신불수가 되고 목숨을 잃어버릴 지경이 되어서야 중국 재판부는 석방을 결정했고 그는 2008년 3월 20일 들것에 실려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귀국 후 그는 서울 송파구 거여동 주택가 지하실에 ‘임마누엘탈북인선교원’을 개설하고 또 다시 탈북민 구출이라는 도전에 나섰다. 금년에 이미 38명의 탈북민을 구출했다고 한다. 박 목사는 요즘 베트남에 사회복지법인을 세워 탈북민 보호와 교육에 나선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한국문화와 예술을 알리면서 동시에 탈북민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갖춘다는 것이다. 그는 ‘국악찬양선교단’과 함께 세계를 다니며 북한인권 문제를 알리는 일이 마지막 목표라고 했다. 그의 모습에서 나치시대 수 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했던 독일인 쉰들러를 볼 수 있었다.#김창범 편집위원·북한구원운동 사무처장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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