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영 회장 "김대중 신동아그룹 뇌관 터지나"
최순영 회장 "김대중 신동아그룹 뇌관 터지나"
  • 미래한국
  • 승인 2009.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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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래 가장 억울한 남자’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신동아그룹은 김대중 후보에 정치보험 들지 않아 공중 분해됐다”


피의자의 죽음으로 종결되긴 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의혹사건과는 스케일이 전혀 다른, 어쩌면 천문학적 규모가 될 지도 모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리 뇌관’은 과연 터질 것인가.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이 또 다시 입을 열었다. 최 전 회장은 지난 3월 신동아그룹 해체 이후 10년 만에 가진 <월간조선> 언론인터뷰 이후 지상매체로서는 처음으로 <미래한국>과 인터뷰를 갖고 그룹의 해체과정과 최근 근황, 그리고 그의 신앙에 대해 밝혔다.

김대중 정권 때 단행된 신동아그룹의 전격 해체와 대한생명 매각 등에 대한 의혹은 지난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국정감사 때마다 단골 아이템이었지만 이 의혹에 대한 감사는 당시 국회의석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열린우리당의 반대로 시작되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24일 이종구 한나라당 의원 등 14명이 “대한생명이 인수 자격도 없던 한화그룹에 매각되는 과정에서 발생된 여러 문제점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감사원에서 철저한 감사를 통해 해소해 달라”며 감사청구안을 발의했다. 현재 이 청구안이 국회 정무위원회에 회부된 상태다. 이번 6월 정기국회에서의 처리 여부가 ‘김대중 뇌관’의 불씨가 될 전망이다.


최 회장을 만난다고 했을 때 한 유력 방송인은 그를 두고 ‘단군 이래 가장 억울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지난 5월 14일 양재동 횃불회관에서 만난 최 회장은 감옥에서 보낸 2년 6개월을 합쳐 10년 간 영어의 몸이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세월이 많이 지나도 ‘격정토로’를 하다가 가슴을 치거나 한숨을 쉬기 마련인데 최 회장은 인터뷰 내내 미소를 지으며 그 엄청난 사건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22개 기업을 거느린 그룹을 해체시키고 재산을 빼앗아 간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없어 보였다.

20조원 규모 그룹 총수 전격 구속
물론 최 회장도 지금의 평상심을 유지하기까지 엄청난 인고의 세월을 겪었다. 영문도 모른 채 1999년 2월 집 앞에서 끌려가서 2008년 8월 15일 특별 사면 되기까지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는가.

최순영 회장은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1976년에 부채가 많았던 신동아그룹을 맡게 되었다. 3~4년을 백방으로 뛰어 다녀 회사를 정상화시킨 후 계열사를 늘려갔다. 구속되기 직전 신동아그룹의 22개 계열사는 외환위기 상황 가운데서도 모두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1999년 그룹의 총자산은 19조7,000억 원이었고 연간 매출액은 9조2,000억 원이었다.

주력회사였던 대한생명의 1999년 2월 당시 자산규모는 14조6,800억 원에 달했다. 현금과 예금액, 유가증권 등 3조5,000억 원 이상의 유동성자금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5만여 명의 영업조직과 450만 명의 계약자를 보유해 매월 5,000억 원 이상의 보험료가 입금되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룹 총수가 구속되었고 신동아그룹은 공중분해돼 버렸다. 최 회장은 구속되기 전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어떤 빌미가 되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대부분의 그룹은 무역업을 하는데 우리 그룹은 종합무역상사가 없었어요. 그래서 1996년에 종합상사를 설립하고 러시아 진출을 결정했습니다. 그때 사장을 잘못 영입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그 사장이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실제 무역이 이루어진 것처럼 위장을 했어요.”

물건이 통관되지 못해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항만에 압류된 일도 있었다. 수출을 하기 위해 물건을 실어 보냈으나 부두 컨테이너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 정부에서 수출 자체를 의심하여 사진을 찍어 보여줬지만 믿지 않고 오히려 최 회장을 외화 밀반출로 의심했다.

“수출을 할 때는 회장이 은행에 가서 자필서명하고 지급보증을 서야 합니다. 제가 지급 보증을 서놓고 제가 외화를 빼돌린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는 마치 제가 스위스은행에 비밀계좌를 만들어놓고 돈을 빼돌린 것처럼 보도하더군요. 미국 별장과 자가용 비행기가 있다는 기사도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임대한 사무실을 별장을 산 것으로, 비행기를 빌려 타고 간 것을 자가용 비행기를 구입한 것으로 보도했습니다.”

1999년 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옷 로비 의혹사건’의 내사가 시작됐다. 최 회장의 부인 이형자 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김태정 검찰총장의 부인 연정희 씨에게 옷을 선물했다는 게 이 사건의 요지이다.

“그 사건이 얼마나 컸던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특검이 구성되었을 정도입니다. 서울지검과 대검에서 아내에게 유죄판결을 내렸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연정희 씨가 유죄판결을 받으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되었던 김태정 씨가 보름만에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권 실세였던 김태정 씨가 연루된 사건이어서 쉽게 끝나지 않았다.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사건처리를 둘러싼 유언비어가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으니 최순영 회장을 구속해 사건을 신속히 종결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된 바로 다음날인 1999년 2월 10일 아침 7시경 최 회장은 체포 영장도 없이 연행됐다.

의견 제출할 기회는 단 1주일 밖에 없었고 불과 한 달 만에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확정하여 공적자금 2조 원을 투입했다. 최 회장은 이런 사실을 미루어볼 때 자신의 구속과 대한생명을 빼앗은 일은 사전에 계획된 시나리오임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구치소 독방에 갇혀 있자니 화가 치밀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았는데 화를 다스릴 길이 없으니 숨이 넘어갈 것 같더군요. 가슴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치며 울다가 머리를 벽에 찧었습니다.”

최 회장은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자신이 구속된 이유는 딱 하나였다고 한다.

“사업을 하려면 정치자금을 내야 하는데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쪽에 자금 지원을 하지 않은 게 원인이었습니다. 금액은 다르지만 대개의 기업은 다 정치자금을 내는데 유독 저만 안 줬어요. 그때 지원하지 않아서 제가 대표적으로 당한 겁니다. 신동아그룹 해체 문제를 논의한 비선조직 모임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신동아그룹을 해체하면서 ‘큰 잔치 한다’고 했답니다.”

최 회장은 김영삼, 이회창 후보에게는 대선 자금을 지원했으나 김대중 후보에게 한 푼도 지원하지 않았다.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자신과 김대중 후보의 노선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우스개 소리로 보험회사 운영하는 사람이 왜 정치보험을 들지 않아서 그 고생을 했느냐고 해요. 사실 지금도 정치자금 안 준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정치자금 내지 않은 것이 이렇게 혹독한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영수증 주고 빌린 돈을 횡령죄로 몰아
당시 최순영 회장은 횡령죄 명목으로 구속되었다.

“기업인들이 비자금을 마련하여 때마다 정권 실세들에게 건네는 게 당시 관행이었죠. 신앙 양심상 기업의 돈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어 비자금이 필요할 때면 대한생명에 차용증을 써주고 빌렸어요. 10여 년 동안 빌려 쓰고 기록을 남긴 것이 1,800억 원 정도 되었어요. 영수증이 있고, 갚으면 되는데 횡령죄로 걸어버린 것이지요.”

IMF 경제 위기로 기업들이 어려울 때 최 회장은 그룹 계열사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98년 6월 8일 미국 생명보험사인 매트라이프 뉴욕 본사에서 대한생명 지분 50%를 매각하는 조건으로 1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는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최 회장은 자신의 주식의 반을 넘기고 비자금으로 쓴 돈과 신동아건설의 빚을 갚을 예정이었다.

매트라이프 쪽에서 연인원 60여 명을 투입하여 2개월 간 대한생명을 정밀 실사한 결과 대한생명이 3조5,000억 원에서 4조2,000억 원의 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매트라이프와 MOU가 체결되어 성사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김대중 정권에서 비자금을 문제삼아 최 회장을 구속시킨 것이다.

속을 끓이고 있자니 구치소 내에서 계속 심장 쇼크가 일어났다. 구치소에 있는 의사가 관상동맥협심증에다 공황장애가 겹쳤다며 절대 안정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조여들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하면 숨이 안 쉬어지고 진땀만 납니다. 심하지 않을 때는 10분 정도면 풀리지만 어떤 때는 30분 동안 고통 받습니다. 그러다가 안 풀리면 죽는 거지요. 독방에 있었으니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어요. 손을 비비고 뒹굴면서 무조건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수 밖에 없었어요. 통증이 계속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사선을 넘나 들다보니 ‘내가 이러다가 여기서 죽겠구나, 몸과 마음을 다스려야 살 수 있고, 내가 살아야 내 명예를 찾을 수 있다’는 각오가 생기더군요. 그때부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처음에는 기도를 한 시간 정도 밖에 못했으나 방언이 터지면서 나중에 8시간까지 기도했다.

“하나님께 저의 억울한 심정과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 털어놓자 괴롭고 조급한 것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꿈으로 많은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감옥에서 받은 기도 응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으면 저는 감옥에서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1.2평 밖에 안 되는 좁은 독방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공포 그 자체’라고 한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포승을 묶고 수갑을 채우는 일입니다. 재판을 받으러 가거나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갈 때 포승으로 묶고 수갑을 채우는데, 그게 사람의 자존감을 없애고 심리를 위축시킵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싫은 일입니다. 신앙 아니면 그 상황은 결코 이겨내기 힘듭니다. 그 안에서 자살하거나 암에 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때 같이 있었던 국회의원은 감옥에서 암에 걸려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동아그룹 해체로 ‘큰 잔치’ 벌여

구속된 지 8개월 만인 1999년 10월 중순경 보석으로 출감했을 때 김대중 정권이 대한생명을 국유화한 뒤 최순영 회장의 주식을 완전 소각해버린 상태였다.

“우리 나라 큰 기업은 다 부채가 있지만 대한생명은 부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일은행, 조흥은행, 서울신탁은행, 경기은행의 최대 주주였습니다. 그런 우량한 회사를 자기네 마음대로 요리해버린 것입니다. 대한생명을 국유화시킨 것은 자산보다 부채가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유동성 부족으로 가입자들의 보험금을 못 내주고, 직원들의 월급을 못 주면 사회에 큰 충격이 된다, 그러니 국가가 공적자금을 투하하여 보험금과 운영자금을 대줘야 사회에 파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유화했다는 겁니다. 자산보다 부채가 많다는 근거로 주가 하락을 들먹였습니다. 당시 IMF로 인해 대부분 기업의 주가가 곤두박질 쳤습니다. 대한생명이 4개 은행의 최대주주였는데, 그게 거의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외환위기를 불러온 국가의 잘못을 기업인에게 떠넘긴 겁니다. 1조 원 정도 되는 유가증권을 시가평가로 자산을 축소하고 계열사 대출은 거의 부실로 판정 내려, 부채가 자산보다 많다며 회사를 빼앗아 갔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당시 대한생명에 공적자금 2조 원을 투입했다. 유동성 부족이 문제면 현금을 투입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채권 지원을 통해 자산 부족분을 보전했다. 그 채권을 2002년 상반기까지 금고 안에 그대로 넣어두었다.

“만약 부채가 자산보다 많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더라도 25년 간 키워온 오너의 권리를 그렇게 일순간에 빼앗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회사 오너를 감옥에 가두고 자기네 마음대로 기업을 빼앗은 겁니다. 22개 회사를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당시 정권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넘겼습니다. 자기네들끼리도 ‘큰 잔치 하나 벌인다’고 했다더군요.”

기도로 고난 이겨내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다시 최순영 회장을 법정 구속시켰다.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다시 구속되니 절망감이 들더군요. 회사를 빼앗았으니 나를 계속 잡아두겠구나 하는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오히려 처음에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갔을 때보다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캄캄한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괴로운 상황에서 오로지 기도 밖에 할 게 없었다. 온종일 기도하고 찬송하며 성경말씀을 읽었다.
“말씀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깨달았고, 기도와 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위로를 주셨어요. 면회 오신 목사님들의 예언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셨어요. 1999년에 구속될 때 하나님께서 ‘너는 앞으로 10년 후에 자유로워질 것이다’라고 하셨다면 아마 그 안에서 1년도 못되어 죽었을 겁니다.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곧 풀어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10년을 견뎠습니다.”

구속되어 있을 때 심장병이 심해져 병원에 여러 차례 후송되었다. 아무리 중병이어도 며칠 간 병원에 있다가 좀 호전되면 곧바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병원에 2, 3일 있다 퇴원하길 반복했는데 위험한 순간이 많았다. 1년 이상 병원을 왔다 갔다 한 뒤에야 외부 병원에 입원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최 회장은 10년 동안 대법원을 세 번이나 오르내리면서 감옥에 2년 6개월, 병원에 2년, 집에서 5년 6개월을 지냈다.

“대기업 회장 중에서 감옥에 2년 6개월이나 있었던 사람은 제가 처음일 겁니다. 집에 있어도 거주지 제한이 있어서 집과 병원 외에는 갈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집에 올 수는 있지만 그 상황에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변호사만 만났습니다.”

22개의 기업을 운영했던 최 회장에게 지금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김대중 정권은 대한생명을 국유화하여 2조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뒤 매각을 진행했습니다. 매각할 회사를 물색하는 중이던 2001년 9월 6일 공적자금 1조5,000억 원을 추가로 투입했습니다. 당시 추가 출자를 요청한 이유는 대한생명 당기순이익이 65억 원 밖에 안 될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01년 대한생명 당기순이익은 8,684억 원이었습니다. 당기순이익을 의도적으로 축소하여 과다한 공적자금을 투입한 이유는 뻔합니다.”

2002년 12월 대선을 치르기 열흘 전 김대중 정권은 대한생명을 한화에 팔아 넘겼다. 당시 한화그룹은 호주의 맥쿼리사의 명의만 빌려 컨소시엄에 참여하게 했다. 한화그룹은 인수당시 부채비율이 232%였다. 의무비율이 200%를 넘으면 인수를 할 수 없지만 계약은 일사천리로 체결되었다.

“고발당해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고 싶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낸 감사청구안이 조속히 국회를 통과하여 감사원 감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해결이 됩니다. 이번 6월에 정기국회가 열리는데 그때 처리되길 바라고 있지요.”

최 회장은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을 만나기 보다 기도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온 가족이 무기한으로 하루 한끼 금식기도를 하고, 매일 저녁 아내와 함께 2시간씩 통성기도를 하고 있다. 인터뷰 당시 기도를 많이 하여 목이 쉰 상태였다. 아직 회사를 되찾은 것도 아닌데 교회에서 간증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그는 요즘 간증집회 참석을 제외하고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많은 언론이 인터뷰를 하자고 했지만 월간조선과 기독교 TV, 극동방송 정도만 응했어요. 대신 서울과 수도권의 큰 교회 간증을 계속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진상을 자세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최 회장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자 이 사건 관련자들이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등 반발을 하면서 언론 보도를 막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까지 최 회장을 고발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최 회장은 오히려 고발당해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다고 했다.

“상대방은 힘이 세고 돈도 많아요. 우리는 사람도 돈도 없어 처음에는 좀 불안했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떠오르면서 힘이 생겼습니다. 정직하게 상대방의 잘못된 것만 지적하고 바로잡게 해달라고 기도만 할 생각입니다. 가장 힘든 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돈보다도 내 인생 10년을 잃어버렸다는 게 억울했습니다. 대기업 회장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인 60대를 송두리째 날려버렸습니다. 그거 내려놓는 데 한 5년 걸렸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편해요. 하나님이 다 회복시켜주시면 청지기 정신으로 관리만 할 겁니다.”

요즘 최순영 회장을 돕고 싶다는 연락이 여기 저기서 오고 있다.
“김대중 정권 때 있었던 일을 공개적으로 화끈하게 얘기 한 건 제가 처음입니다. 전직 판사가 법적인 문제를 자문해주고 싶다는 연락을 했고, 어느 변호사는 ‘지난 10년의 정권 때 전혀 항변할 수 없었으니 공소시효는 의미가 없다. 공소시효 핑계로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도록 후원하겠다’고 했습니다. 특히 목사님들이 ‘억울하게 당한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심하게 당한 줄은 몰랐다. 기도하겠다’는 연락을 많이 했습니다.”

지난 5월 7일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가 개최한 ‘나라를 위한 특별기도회’에서 70여 명의 목회자가 ‘감사청구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탄원서에 서명을 하여 이명박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대표적인 크리스천 기업가였던 그는 구속되기 전 기독교계를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자신에게 남은 건 오직 ‘믿음의 형제들’뿐이라고 말하는 최순영 회장은 마지막으로 <미래한국> 독자들에게 “감사청구안이 속히 통과되어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

글·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이승재 객원기자 fotols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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