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_가수 강원래 아내 김송
인터뷰_가수 강원래 아내 김송
  • 미래한국
  • 승인 2009.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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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순애보 부부’에서 신앙인 ‘나’를 찾다
▲ 김송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더라, 많은 사람이 경험하고 싶은 일이지만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보내는 게 진정한 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도 급하게 오면 지탱하기 힘든데 하루아침에 고난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의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당신은 어떡할 것인가. 가수 강원래 씨의 아내 김송 씨, 결혼 발표 불과 석 달 후 믿을 수 없는 일을 당했고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요즘 방송에서 보기 힘든 그녀를 서울 강남의 우리들교회 새신자환영회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매력적인 외모의 김송 씨가 환영인사와 함께 간증을 하면 집중력 100%이다. 길지 않은 간증을 들어보니 지고지순한 사랑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던 그녀가 실은 엄청난 갈등을 겪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춤꾼의 만남
클론의 멤버 강원래 씨는 ‘쿵따리샤바라’로 한국은 물론 중화권까지 평정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가수였다. 멋진 춤 솜씨로 무대를 종횡무진 누볐던 근육질의 그는 2000년 11월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김건모 씨가 ‘핑계’로 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추었던 ‘핑계걸’이 바로 김송 씨. 3인조 혼성그룹 ‘콜라’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춤이라면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역시나 나이트클럽이었다.
“1991년에 강원래 씨가 군대에 가면서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어요. 제대 후에 클론을 조직해 데뷔했는데 인기가 높아지자 주위에 여자가 많이 생기더군요. 그런데도 못 헤어지겠더라구요. 스토커처럼 따라다녔죠. 강원래 씨 팬티를 갖고 가서 굿도 해보고, 별 짓 다해봤어요.”

그러던 중 2000년 여름 스포츠신문에 ‘강원래-김송 열애’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났다.
“그 기사가 나온 뒤 프로포즈를 받았어요. 그런데 몇 달 후에 사고가 난 거예요.”

침대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강원래 씨를 간병하는 김송 씨의 모습이 다큐멘터리로 방영됐다. 화려하고 강한 인상의 김송 씨가 대소변을 받아내며 24시간 간병하는 모습은 사랑이 쉽게 변하는 세태에 충분히 귀감이 될 만했다. 2001년 여름 강원래 씨는 퇴원했고,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했다.

“그해 가을부터 힘들어지더군요. 처음에는 기쁘게 간병했는데, 내가 이걸 평생 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한 거예요. 남편이 예전에 나한테 잘못해준 게 다 떠오르면서 극심한 우울증이 왔어요. 남편을 보면 ‘짐’이라는 생각 밖에 안 들고, 하루 하루가 지옥이었어요. 예민한 남편은 싸늘한 내 태도를 눈치 채고 ‘가라!’고 소리 질렀어요.”

하지만 여전히 잉꼬부부로 알려져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편이 재활치료를 꾸준히 받아 사고 3년 후부터 스스로 용변을 가리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제가 일일이 다 처리해줘야 했어요. 밤늦게까지 간병하고 나면 온몸이 축 처졌지만 그때부터 인터넷에 들어가서 고스톱을 쳤어요. 완전히 인터넷 중독에 빠져 있다가 비즈 공예를 또 한참 했어요.”

아무리 다른 것에 열중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늘 허전했다. 그럴 때면 클럽에 가서 땀을 흘리며 새벽까지 춤을 추었다.

“유부녀가 저래도 되냐는 눈초리도 있었고 오죽 답답하면 나왔겠냐고 동정하는 눈초리도 있었어요. 그 와중에서도 TV에 행복한 부부로 비쳐야 하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
60세까지 간병했을 때 3억~4억 원을 받을 수 있다는 뉴스를 접한 김송 씨는 남편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2005년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남편과 늘 전쟁이었고, 눈을 뜨면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요. 돈도 없는 데다 남의 이목이 두려워 이혼을 할 수도 없었어요.”

이혼을 여러 번 생각해봤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은 부모의 이혼에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던 어머니는 하나님이 가정을 지켜주지 않았다며 불교로 개종해버렸어요. 우리 4남매가 똘똘 뭉쳐 살았는데, 굿도 하고 점도 치러 다니고 그랬죠. 행여 누가 전도하면 ‘재수 없다’며 화를 내고 소금도 뿌렸어요.”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2006년 1월 남편과 함께 어머니가 있는 호주로 여행을 갔다.
“엄마가 2000년에 호주인과 재혼하셨거든요. 제가 엄마를 끔찍이도 좋아해서 따뜻한 나라에 사는 분께 밍크코트를 사드릴 정도였어요. 그런데 마치 드라마처럼 우리가 도착한 날 엄마가 뇌종양 말기 판정을 받았어요. 기가 막혔지만 엄마 간병 준비를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아빠를 만나 엄마가 오래 못사실 거 같다고 했더니 ‘그 말을 왜 나한테 하느냐’며 화를 내는 거예요. 너무 큰 실망을 하고 짐을 챙겨 호주로 갔지요. 어느 날 엄마가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 달래요. 괜히 싸울까봐 걱정했는데 두 분이 전화로 화해하시는 거예요. 그 때 문득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자가 아닌 호주의 새아빠가 호주 한인교회에 전화하여 목사를 초청했다. ‘왜 목사를 집에 오라고 했느냐’고 소리 지르던 어머니는 정작 목사 앞에서 회개 기도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 달간 호주에서 지낸 김송 씨는 병세가 악화된 어머니와 함께 귀국했다.
“부모님 이혼도 충격이었지만 교회 다니는 고모들이 엄마 구박했던 거 생각나서 절대 교회 안가겠다고 결심했거든요. 그런데 귀국해서 혼자 이 교회 저 교회 다녔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고모한테 전화했는데 우리들교회에 가보라는 거예요. 김양재 목사님이 ‘바람피우는 남편, 시집살이 시키는 시부모,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이 없으면 하나님을 안 찾는다. 고난이 축복’이라고 하시는데 갑자기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위로가 되는 거예요.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지요. 엄마는 2006년 8월에 예수님 의지하고 편안히 가셨어요.”

당시 김송 씨는 가수 박미경 씨 댄서로 일하고 있었다. 일요일 밤에는 미사리 업소에 출연하고 주말에는 주로 지방에 가서 공연을 했다. 그런데 2006년 10월경에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담까지 걸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서 내시경을 찍었을 때 위가 스무 군데 이상 헐어 있었다.

“하나님 제가 돈 많이 벌어서 헌금 많이 할게요, 그렇게 기도할 때였죠. 그런데 너무 아파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설교 시간에 ‘모든 사건은 다 내 욕심 때문이다’는 말씀이 유난히 귀에 박히더군요.”

세상 일 접고 간증과 교회 봉사
그 즈음 독특한 체험을 많이 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과 설교 말씀을 통해 깨달음이 와서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999년부터 함께 일한 박미경 씨와 매니저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난감하기만 했다. 월급을 더 주겠다, 외국 공연도 많이 잡혀 있다며 두 사람이 김송 씨를 붙잡았지만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문제는 남편이었다.

“장애인 남편이 저한테 잘해줬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남편 스스로 ‘내 성질 안 죽었다’고 할 정도로 성격이 강했어요. 저도 굽히지 않는 성격이에요. 우리는 철저한 부부별산제여서 자기가 번 돈을 자기가 쓰는 스타일이었어요. 돈을 안 줘 이혼하려고 했고, 돈이 없어 이혼을 못했어요. 그러니 제가 돈을 안 벌면 어떻게 살아갈까, 당연히 걱정이 되죠.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남편이 ‘미쳤냐?’고 할 게 뻔했어요. 그래도 용기를 내 얘기 했더니 남편이 선선히 ‘좋을 대로 해라’ 그러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더 놀라운 건 제가 일을 그만 둔 바로 다음 주에 어떤 교회로부터 간증 초청이 온 거예요.”

김송 씨는 2007년 1월부터 우리들교회에서 새가족반 봉사를 시작해 장년부 주보 안내와 청년부 새가족반 봉사도 하고 있다. 올해 3월에는 11명의 목장 식구를 거느린 ‘목자’가 되었다. 교회 간증도 꾸준히 하고 있다.

“2007년 3월이 되자 통장에 딱 68만 원 밖에 없는 거예요. 불안해하는데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돌보신다’는 말씀이 딱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용기를 냈죠. 남편한테 ‘나 돈이 없다. 통장에 돈 좀 넣어달라’고 했어요. 과연 내 말을 들어줄까 했는데 남편이 ‘얼마면 돼?’ 그러는 거예요. 그때 정말 감동했어요. 남편이 수시로 제 통장에 돈을 넣어줘요. 돈을 벌 때 남편을 무시했는데, 이제는 존경스럽고 고맙기만 해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 남편의 머리는 예수님, 그 말씀처럼 관계질서가 회복되었고, 마음의 상처가 다 사라졌어요.”

강원래 씨는 재활훈련 이후 장애인 프로그램 MC를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송 씨는 씀씀이를 많이 줄였다며 입고 있는 옷도 인터넷으로 산 2만 원 짜리라고 했다.

“남편은 누구를 만나든 기선 제압을 해야 직성이 풀려요. 늘 비아냥거리기 일쑤였죠. 제가 목자가 되었을 때 또 비웃겠구나 했는데 친구들한테 ‘송이가 잠실짱 됐다’며 자랑하는 거예요. 그런 변화된 모습이 기뻐요. 처음에 저한테 ‘교회 가지 말라’고 하더니 ‘나한테 교회 가자는 말 하지 마’로 완화됐어요. 목장 식구들이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인사도 안 받더니 그 다음에는 자기가 먼저 인사하고, 얼마 전에는 함께 식사도 했어요. 차츰 변화될 거라고 봐요.”

▲ 김송과 가수 강원래
남편 서서히 변화

강원래 씨 할아버지는 교회를 지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지금도 강원래 씨 고모들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집안에서 할아버지 추도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전에 점치러 가서 언니는 내림굿을 받아라, 남동생은 박수무당이 되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오빠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어요. 지금 우리 4남매가 모두 우리들교회에 출석하고 있어요. 아버지도 광명에 있는 교회에 나가고 계세요. 친구 10여 명도 우리들교회에 나오고 있어요. 감사한 일이죠.”

김송 씨는 아이를 가지려고 시험관 아기 시술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실패했다.
“세상에서 재미 있다는 일 이것저것 다 해봤어요. 그런데 결코 만족이 없었어요. 허무하고 곤고할 따름이었죠. 모든 게 말씀으로 해석되면서 막혔던 숨통이 트였어요. 그렇다고 환경이 바뀐 건 아니에요. 감사할 환경이 아닌데도 감사하게 된 게 너무 좋아요. 매일 매일이 감사해요.”

김송 씨는 요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강연을 많이 다니는 남편이 ‘간증’하러 다니는 게 소원이에요. 남편과 함께 찬양 부르며 간증할 날을 기대하면서 기도하고 있어요.”#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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