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이름으로 싸운 한국전쟁
유엔 이름으로 싸운 한국전쟁
  • 미래한국
  • 승인 2009.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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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59주년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6·25 이야기
▲ 정일화 박사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지 59주년을 맞는다. 소련과 중공의 지원 아래 철저한 준비로 남침한 북한 김일성의 도발에 남한은 전쟁 초기 무기력하게 밀렸다. 그러나 기적 같은 유엔의 즉각 참전과 맥아더 사령관 지휘 하의 유엔군 반격으로 누란의 위기에 있던 남한은 자유민주체제를 지키고 오늘날의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많은 자료를 통해 남침 사실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는데도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는 북한 선전에 역사의 진실이 흔들리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6·25의 실상을 알려 자유세계의 첨병인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린 장병들의 희생에 감사하고 조국수호 의지를 고취하는 의미를 찾는다.

정일화 국제정치학 박사


지난 6월 6일 노르만디 해안에서는 2차대전을 승리로 장식한 연합군 상륙 65주년 행사가 열렸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브라운 영국 총리,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지도자들이 모여 감격의 기념행사를 했다.

2차대전을 마감한 노르만디해변의 기적

1944년의 이날은 12년 독재의 독일 히틀러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1주일 동안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던 대서양의 악천후는 이날 새벽 갑자기 조용해지기 시작했고 한 달 이상을 비 내리는 야영지에서 포커나 하며 세월을 보내던 미국·영국 병사들은 진격 명령을 받고 벌떡 일어났다. 거대한 공격 대열을 구성한 채 도버해협을 건너기 시작했다.
1만2,000대의 전투기·폭격기와 5,000척의 수송선, 600척의 전투함으로 구성된 공격군이 새까맣게 프랑스 해안으로 몰려갔다.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아이젠하워 원수는 이날 새벽 미 공군 기상대의 예상대로 과연 하늘이 맑아지자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쁜 마음으로 총공격을 지휘했다. 해안 경비를 맡고 있던 독일군 B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 장군은 히틀러 암살 사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는데 마침 5일 베를린으로 출장 가 현장에 없었다. 롬멜은 해안에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어 적어도 5~6일은 연합군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합군의 수많은 공군기, 해군 함포, 상륙군 포화는 단숨에 독일군 수비대를 짓밟고 히틀러의 안방 빗장을 풀어버렸다.
만일 그때 대서양의 비바람이 그쳐주지 않았더라면 상륙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롬멜이 현장에 남아 있으면서 당초 구상대로 철저한 해안방어작전을 준비할 수 있었더라면 연합군은 상륙을 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감당 못할 거대한 사상자를 냈을 것이고 히틀러의 유럽점령은 상당 기간 더 지속됐을 것이다.
해안에 모여든 인사들은 기념식 때마다 오마하 상륙은 기적이었다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곤 한다.

6·25전쟁의 기적은 유엔 깃발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6월을 기점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세계의 어디에도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오늘날의 형편으로 보면 아프리카 오지의 어떤 신생국 정도에 불과했다. 북한이 남한을 무력통일하기 위해 침략해 왔을 때 국제연합(UN)이 즉각 개입했다. 기적이었다. 물론 미국이 이 침략사건을 국제적 여론에 호소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 큰 원인 중의 하나였지만 ‘다시는 세계에 1, 2차대전과 같은 참혹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설립된 UN이 북한군 침략 당일(뉴욕 시간 25일)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침략행위’로 규탄하면서 즉각 물러갈 것을 결의했고, 남침행위가 계속되자 28일 다시 유엔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를 유엔의 이름으로 물리칠 것을 결의한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사에서 볼 때 침략당한 조그만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국제기구가 이렇게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침략자를 규탄한 일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었다. 유엔은 T34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침이 계속되자 7월 7일 이를 물리칠 유엔군을 결성할 것을 결의하고 미국이 주관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당시 70세)을 초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미군, 영국군, 터키군, 프랑스군, 이디오피아군, 필리군, 태국군, 콜롬비아군, 오스트레일리아군, 벨기에군, 뉴질랜드군, 그리스군, 캐나다군, 룩셈부르크군, 네덜란드군, 영연방군, 덴마크 병원선단, 인도수송단, 이탈리아 병원단 등으로 구성된 인류 최초의 유엔군을 지휘하여 침략군 격퇴작전을 전개했고, 대한민국도 ‘단일전쟁 단일지휘’라는 군사원칙에 따라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겼다.

대한민국은 당초 유엔이 탄생시킨 국가였다.
1945년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했을 때 한반도는 일본의 강제통치에서 벗어났지만 그동안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망명정부도 없었고 연합군의 대 일본전쟁에 아무런 도움도 준 일이 없기 때문에 독립정부를 가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40년쯤 신탁통치를 한 후면 아마도 독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국제여론이었다.

그러나 유엔은 1948년 한반도에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고 남북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했다. 38선 이북이 총선거를 반대했기 때문에 일단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38선 이남이라도 선거를 하여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즉각 승인했다.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세워진 것은 5천년 역사로부터의 엄청난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모든 국민은 자유롭고도 평등한 인간의 기본권을 가지는 것이 헌법에 보장될 뿐 아니라 국가의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 것은 일찍이 동양사상에 없었던 것이었다.

38선 이북의 북한은 달랐다. 소련 점령군은 처음부터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독재적 정당체제를 수립하게 했다. 양반들이 군림하던 조선사회나, 일본인들이 통치하던 일제강점기 보다 더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부가 구성되었다.

김일성은 1948년 2월 인민군을 창설하면서 ‘인민군의 목적을 한반도를 무력으로 공산화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목적 아래 6·25전쟁 1년 전인 1949년 5월 전차부대를 창설하고 1950년에 들어오면서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남침준비가 되었으니 침략하게 해 달라”는 간청외교를 전개한다.

탱크는 무서웠지만 공산당은 무섭지 않았다

38선 이남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국가의 터전잡기에 온 힘을 쏟고 있을 즈음 북한은 무력남침을 국내외적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1950년 1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허가를 받을 때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남한이 대적하지 못할 강력한 사단 3개를 확보할 것, 둘째 남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평화조건을 제시할 것, 셋째 남한의 혁명역량을 높여 내부를 교란시킬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서울을 침공할 주공부대인 인민군 3, 4사단을 최정예부대로 편성함과 동시에 105전차여단을 붙여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군과 싸우던 소련군 최정예부대와 맞먹는 수준으로 전투력을 높였다. 춘천을 공격할 인민군 12사단도 사이드 카 부대와 탱크에 맞먹는 SU76자주포부대를 딸려 조공 역할을 확실히 감당할 수 있도록 설정했다.

남한에 억류된 간첩단과 북한에 있는 조만식 선생을 맞교환하자는 제의도 했고, 평화통일제의도 했다. 대한민국에는 여순반란사건을 비롯한 좌파의 반정부행위가 표출되어 많은 혼란을 가져오고 있었다. 전쟁 전 대한민국의 군부에도 북한 간첩이 깊이 파고 들었을지 모른다는 사건이 여럿 일어났다. 6·25 전야인 6월 24일 군 간부들은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해 저녁 늦게까지 양주를 마셔 채병덕 참모총장 같은 이는 6월 25일 아침 거의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있었고 전쟁 1주일 전 육군은 장병들을 농번기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트럭과 대포도 영등포병기창에 수리 보내라는 명령이 예하부대에 내려와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 전선에서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을 때 한국군을 전율케 한 것은 소련제 최신형 탱크 T34였다. 한국군은 탱크를 본 일이 없었다. 개성-문산 쪽을 넘어 서울을 공격해온 인민군 1, 2사단이나, 의정부-포천 쪽을 향해 서울을 공격해온 인민군 3, 4사단의 전면은 거대한 쇠 덩어리인 T34의 굉음을 앞세우고 밀고 내려왔다. 국군은 탱크에 맞설 무기가 없었다. 소총, 기관총은 아무 효과도 없었고 사단에서 운용하던 105밀리가 고성능 탄두(high explosive)를 써 요행히 맞추면 멈칫 했지만 궤도에 정확히 포탄이 박히지 않으면 다시 탱크는 밀고 내려왔다.

모든 전선이 이렇게 뭉개졌다.
서울은 침략 3일 만인 28일 밤 함락됐다. 김일성은 그해 8월 15일 부산에서 한반도적화통일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겠다고 호연했던 것인데 정말이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어보였다.

일본점령군 사령관, 미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이 전쟁이 심상찮은 전쟁이라고 판단했다. 유엔이 승인한 대한민국을 쓰러뜨리려는 전쟁일 뿐 아니라 지난해 10월 중국대륙을 먹어치운 공산주의가 드디어 극동지역을 완전히 공산화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것이라고 결론 냈다.

미국은 아직 평화 무드에 싸여 있고 병력은 2차대전 당시의 10분의 1로 줄여놓고 있는 상태였다. 미국을 일깨워 이 전쟁에 뛰어들게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한국사람들이 이 전쟁을 싸울 용기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는 서울이 인민군 탱크에 의해 점령된 하루 뒤인 29일 수원비행장에 전용기를 타고 내렸다. 수원비행장은 이미 북한 야크기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그날도 야크가 2대가 맥아더 일행을 발견하고 공격에 나섰다.

그는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 행렬을 거슬러 수원에서 한강 둑까지 올라와 한강변에 배치돼 있는 한국군을 만나보고 멀리 서울의 인민군 동정을 직접 목격했다.

인민군 탱크들은 한강다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대로 밀고 내려오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대신 인민군은 뗏목과 나룻배를 이용해 흑석동 쪽과 영등포 쪽으로 한강 도하 공격을 하고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군 사기 높고 지휘체계 유지

맥아더는 한국군이 38선에서 무너졌지만 결코 공산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탱크가 없는 인민군은 용감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멀리 춘천에서는 한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군관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인민군 정예 12사단을 3일간 막아내고 있었다. 민간인은 포탄을 나르고 경찰은 선봉정찰대가 되고 군은 육탄으로 적의 장갑차를 잡았다. 당초 춘천을 침입한 인민군은 춘천-홍천-수원을 진격하여 후퇴하는 국군을 뒤에서 기습함으로써 일찌감치 한국전쟁을 끝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춘천 방어의 3일은 결국 이 계획을 빗나가게 했다.

개성-문산을 지키던 한국군 1사단(사단장 백선엽 대령)도 적의 탱크를 105밀리포로 저지하면서 28일까지 인민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의정부-포천방어선이 무너지는 바람에 서울로 후퇴하지도 못하고 행주나루터를 급하게 건너 부대가 흩어져 있었으나 적을 행한 투혼은 강력했으며 지휘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한강을 지키던 한 한국군 병사에게 물었다. “왜 후퇴하지 않는가”라고. 하사 계급장의 이 병사는 “상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여기를 지킬 것이며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미군이 돕는다고 해도 한국군이 패배감에 빠져 있으면 도와도 결과는 허사가 된다.
맥아더는 한국전에 미 지상군을 투입할 것을 결심했다.

동경에 돌아온 맥아더는 세 가지 모험작전을 구상했다. 첫째는 빠르고 민첩한 미군부대를 적진 깊숙이 투입함으로써 이 전쟁에 미 지상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 둘째는 침략군을 낙동강으로 끌어들여 격렬한 결전을 벌이고, 셋째 낙동강 전투를 틈타 텅 빈 후방인 인천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백악관의 지상군 개입허가가 나자 맥아더는 워커 8군사령관-딘 24사단장의 명령체계를 통해 지금 당장 비행기로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대대장 윌리엄 스미스 중령)를 동원했다. 모든 수단을 다해 전선 깊숙이 들어가 고개를 내 밀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200대의 T34탱크와 600대의 야크공격기, 10만 정예군이 쳐 내려오는데 1개 대대병력 406명을 던진다는 것은 아무리 용감한 미군이라 해도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미스부대는 105밀리포를 가진 52야포부대(134명)와 함께 일본에서 부산까지는 비행기로, 부산에서 평택까지는 기차로, 평택에서 오산 죽미령고개까지는 트럭으로 이동해 7월 5일 죽음의 죽미령전투를 전개했다. 작전계획이고 후방지원이고 없이 무조건 적의 최전선공격지점으로 올라간 것이다. 현장에서 180명이 전사했고 부대는 형편없이 망가졌다. 그러나 이 죽음의 전투는 미 지상군이 한국전에 개입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 사건은 당일 모택동과 스탈린에게 보고돼 침략군의 남침계획을 수정하는 절차를 밝게 함으로써 맥아더는 천금 같은 방어시간을 벌수 있게 되었다.

맥아더는 그의 회고록에서 스미스부대의 장렬한 전투로 부산교두보 확보를 위한 시간을 벌었으며 적은 스미스부대를 대규모부대로 잘못 봐 속은 것을 알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고 쓰고 있다.


맥아더, 유엔 승인 나자 38선 넘어

스미스 중령은 뒤에 장군으로 진급했고 상당한 명성도 얻었으나 죽미령전투에서 너무 많은 부하를 잃은 것이 한이 돼 한국 초청에 응하지 않다가 전쟁 후 20년만에 처음 죽미령를 방문했다. 그는 전사 동지들을 위한 느티나무 하나를 심고 돌아간 바 있다.

낙동강 전선의 방어는 “서서 싸우든지 죽든지 하라(stay or die)”는 명령을 외치며 온 전선을 누빈 워커 8군사령관의 공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소방부대 역할을 하던 미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의 용기 있는 슬기와, “이 고개만 넘으면 대구를 점령할 수 있고 대구를 먹으면 부산은 식은 죽 먹기이다”라는 김일성의 명령을 갖고 다부동전투를 벌인 최정예 3개 사단을 끝까지 방어한 국군 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12연대(연대장 김점곤 대령)의 전공에 의해 성공적으로 방어됐다.

낙동강 700리는 무수한 인민군 시체와, 이 저지선이 뚫리면 대한민국은 부산앞바다에 빠져죽을 수 밖에 없다는 각오로 모질게 버틴 유엔군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갔다. 낙동강 전선이 인민군에 의해 뚫렸다가 회복되고 또 뚫렸다가 밀려나고 하는 가운데 맥아더는 일부 방어군을 빼고 일본에 있던 7사단을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벌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조수간만의 차가 10m를 넘는 세계최악의 상륙지점이었고, 낙동강 전선이 아직도 위태롭기 때문에 거기서 병력을 뺀다는 것도 거의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어서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성공률은 5,000분의 1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성공 가능성이 5,000분의 1밖에 안 된다는 그 분석이 바로 기습전의 성공을 보장하는 증거라는 것과, 미 해군의 능력은 해군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다는 두 가지 이유를 갖고 작전을 밀어붙였다. 맥아더의 예언과 작전을 적중했다.

맥아더는 서울을 탈환한 후 38선 넘기를 주저했다. 유엔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 10월 7일 유엔은 북진을 승인했다. 맥아더로 하여금 38선을 넘어 북한의 무력을 제거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결의를 했다. 유엔선거감시단의 입북을 막았던 북한에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해 대한민국을 통일하라는 것이었다. 후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북한수복이 어려워졌을 때 맥아더는 중공군 후방기지인 만주를 폭격하여 보급선을 끊고 중공군을 몰아내 한반도를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해임됐다. 북한 군사력을 무력화시킨 후 자유로운 총선거로 대한민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유엔결의는 그대로 살아 있다.

무명 용사의 용감한 전투가 승리 밑거름

전쟁 3년 동안 탱크는 무서웠지만 공산군은 무서워하지 않았던 병사들, 죽음은 두려웠지만 그 보다 대한민국을 더 사랑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얘기는 아직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맥아더가 한강변에서 만났던 그 하사관도 찾지 못했고, 후퇴 길에 무차별공중사격을 가하던 야크기를 기관총으로 갈겨 떨어뜨린 어떤 병사도 끝내 그 이름을 찾지 못했다. 한 예비역 장성은 동부전선에서 인민군과 접전하는 중 아군이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는데 미군전투기편대가 날아와 코 앞에서 인민군부대를 두들겨 부숴 아군은 살아날 수 있었으나 조종사가 적탄에 맞아 전사한 현장을 기억하면서 평생을 두고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 잔인했던 6월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은 새롭게 해야 한다. 첫째 1950년의 잔인했던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적어도 우방이 우리를 도울 마음을 낼 만큼은 용감했다는 것과, 둘째는 유엔이라는 깃발로 고난을 견뎠다는 것이다. 10월 24일을 유엔의 날로 지키다가 김대중 정권 때 없어졌다. 유엔기가 사라졌다. 유엔의 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

정일화 국제정치학 박사
(백석대 강사,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본지 편집위원, ‘아는 것과 다른 맥아더의 한국전쟁’(미래한국 출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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