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하 총재 “적십자 예산에서 대북지원 없다”
유종하 총재 “적십자 예산에서 대북지원 없다”
  • 김범수 발행인
  • 승인 2009.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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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유종하 대한적십자사 총재
   
 
  ▲ 유종하 대한적십자사 총재  
 

정부자금 지원의 창구역할만 수행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또는 이념적 성격을 띤 논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국제적십자운동 기본원칙 가운데 한 대목이다. 북한과 교류할 때 창구 역할을 했던 대한적십자사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이 대화를 거부해 단 한차례의 교류도 하지 못했다. 남북협력기금이 1조 원 이상 쌓여 있지만, 언제 창구가 열릴지는 불분명한 상태이다.


2008년 10월에 취임한 유종하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북한에 정기적으로 연락하지만 답변이 없다고 했다.

“우리가 전화해도 안 받으니까 대화가 어렵고 국제회의 참가 시에 그쪽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가능한 빨리 교류를 하자고 제의하면 저쪽의 반응은 남북 간의 큰 문이 열려야 적십자 문이 열린다는 반응입니다. 우리 쪽은 적십자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므로 우선 남북이산가족 문제만이라도 시급하게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이와 관련 금강산에 면회소도 지어놨는데 만남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 북한 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이 항상 동시에 이뤄졌어요. 지금 북한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신청한 분이 12만7,000여 명이나 됩니다. 70세 이상 되시는 분이 대부분이어서 1년이면 4,000명 정도 되는 분이 세상을 떠나십니다. 빨리 만남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동안 대한적십자사를 통해서 지원된 것은 대부분 비료 등 구호물자였고 현금은 없었으며, 북한 지원은 대한적십자사의 지원규모를 넘기 때문에 거의 전부를 국가재원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좌우로 갈라져 있어도 비료를 주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북한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도 비료 주는 것은 반대할 수 없습니다. 농민한테 가는 거니까 비료는 우리 사회의 좌우 논쟁을 충분히 초월할 수 있는 품목입니다.”

유종하 총재는 김영삼 정부 시절 외무부 장관을 지내고 2007년에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외교안보분야 위원장을 지냈다. 유 총재가 취임했을 때 북한과 민주당에서 탐탁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보수 인사’에서 정치 중립 ‘적십자맨’으로

“작년 10월 취임했을 때, 북한에서 ‘보수쪽 사람이 적십자에 와서 대화하자고 하면, 우린 그 사람과 대화 안 한다’고 했고 민주당에서는 ‘남북관계를 보아 차라리 사퇴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총재를 맡고 나서 일체 정치적 행보는 접고 완전히 적십자정신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정책을 논하는 위치가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위치로 바뀌었기 때문에 거기에 충실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와서 물러가라는 얘기는 들어갔습니다.”

외교전문가로서 남북한 정세를 진단해달라는 요청에 유 총재는 ‘내가 말할 입장이 아니다’라며 일체 응하지 않았다. 철저히 ‘적십자맨’으로 살고 있다는 유 총재는 부임하자마자 대한적십자사 체질 개선에 나섰다.

   
 
     
 

“대한적십자사는 전국에 14곳의 지사와 22개의 혈액원, 6곳의 병원에서 3,240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운영이 어렵습니다. 부채가 1,200억 원이나 돼 매주 은행 이자만 1억 원씩 지불합니다.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고 있는 적십자병원과 혈액원의 경영을 개선하기 위해 컨설팅을 맡겨 경영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적십자회비는 1년에 400억~500억 원 정도이다. 예전에는 전 세대주의 70%가 적십자회비를 냈지만 요즘은 회비를 내는 사람이 전 세대주의 3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내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탓도 있지만 ‘내가 낸 회비를 북한지원에 쓰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북한지원은 정부자금으로 하고 적십자사는 창구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일부 예외적으로 북한적십자사를 돕거나, 북한에 재해가 났을 때 성금을 보낸 일은 있으나 국민들이 내는 회비는 대부분 대한민국 내 취약계층 돕기에 전액 사용한다는 걸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유 총재는 회비를 더 많이 모금하기 위해 ‘지정기부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회비를 내는 사람이 용도와 사용지역을 지정하면 적십자사에서 그대로 실행한다는 방침이다.

국제적십자연맹은 150년 전 이탈리아 솔페리노 전투에서 출발했다. 현재 186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으며 전 세계의 적십자 봉사원은 1억여 명에 이른다. 그동안 적십자는 노벨평화상을 4번이나 수상했다. 적십자운동 창시자 장 앙리 뒤낭(Jean Henri Dunant)과 국제적십자위원회, 국제적십자사연맹이 수상했다.

고종 황제 칙령에 따라 1905년에 창립한 대한적십자사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관이다. 적십자사는 전쟁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구호활동을 벌이고 평소에는 취약계층을 돌보는 일을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8만여 명의 적십자봉사원과 17만여 명의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 다른 나라 적십자사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봉사 지수는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미풍양속이 있지만 수치를 따져볼 때 우리나라 적십자사의 수준이 세계 평균에 비하여 떨어집니다. 세계 인구 70억 명에 적십자봉사원이 1억 명이니 인구 70명에 적십자 봉사원이 1명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우리나라는 4,800만 명 가운데 봉사원이 25만 명입니다. 200명에 한 명 꼴이니 국제수준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거지요.”

유 총재는 우리나라 경제력에 비해 현재 500억 원 안팎의 모금액은 너무 적다고 평가했다.

   
 
     
 


일본 적십자사 규모는 우리의 10배

“일본의 적십자봉사원은 230만 명으로 우리나라의 10배 수준입니다. 일본인구는 우리나라 인구의 3배이니 인구비례로 따지면 봉사자 숫자가 3배 많은 겁니다. 대한적십자사 전체 예산이 5,000억~6,000억 원 정도입니다. 일본적십자사의 1년 예산은 우리 원화 기준 16조 원으로 우리나라의 40배입니다. 인구 비례로 봤을 때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10배 이상의 예산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잘 살고 복지정책이 잘돼 있어 취약계층이 우리나라보다 적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정부에서 돌봐주는데도 민간이 자발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거지요. 일본적십자 활동이 활발한 건 세계 1, 2차 대전을 겪은 데다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적십자의 활동이 일본국민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 재난 대비가 대단히 철저하다. 우리나라도 각 지사마다 구호창고를 마련하여 재난 때 사용하기 위한 모포와 일용품, 의류, 버너 등 각종 장비와 식량을 준비해두고 있다. 모든 물품은 유통기한 전에 다시 교체하여 낭비하지 않도록 세심한 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적십자사의 봉사자는 2,300만 명에 이른다. 인구가 많은 만큼 봉사자도 많은 것이다. 유럽 여러 국가도 우리나라보다 서너 배 많은 예산과 봉사자를 확보하고 있다.

“적십자 활동이 활발한 나라는 대개 선진국입니다. 우리나라는 남을 도와주는 것을 자선이라고 생각하지만 선진국들은 이웃돕기를 의무로 생각합니다. 사회 취약계층이 있으면 그 사회의 건강을 해친다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거지요. 예를 들어 박지성 선수가 발가락을 다쳤다면 그 발가락을 고쳐야 축구를 잘할 수 있게 된다는 이치와 같습니다. 선진국은 건강한 사람이 취약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사회의 건강과 능률이 오른다는 생각에서 그 일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체의 참여도 역시 선진국에 비해서 상당히 낮다고 한다.

“진짜 돕는 힘은 기업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가 발달했지만 기업의 나눔 문화가 활발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성숙하려면 불만계층이 없어야 합니다. 취약계층, 불만계층이 많으면 자본주의가 흔들립니다. 카네기, 록펠러, 빌 게이츠 등의 사업가가 거액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서구사회는 기부문화가 아주 발달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굉장히 적어요.”

- 얼마 전 영세민들에게 지원해야 할 자금 수억 원을 착복하여 호화롭게 생활한 공무원의 범죄가 보도되었는데요, 우리나라는 부정부패가 심해 내가 낸 돈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을 거라는 불신 때문에 기부를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봅니다.

“모든 구호단체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돈을 내는 사람의 의도를 반영하여 목적대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동쪽에 써달라고 했는데 서쪽에 쓰는 건 기부자의 의도를 배반하는 겁니다. 돈을 받는 순간부터 쓰는 순간까지 투명해야 합니다. 적십자사는 150년 역사 동안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100년을 넘으면서부터 거의 사고가 없어 투명하다는 인식과 믿음을 심어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투명성을 높일 것인가를 논의합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애초에 전쟁 지역을 돕기 위해 출발한 적십자사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전쟁에서 출발, 적군이라도 치료한다

“정치적으로 북한을 제재하는 정치기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같은 곳입니다. 적십자는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전쟁이나 재해가 발생하면 달려가서 도울 뿐 정치적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적십자는 전쟁에서 출발했습니다. 적군이라도 치료해주는 것이 적십자 정신입니다.”

- 혈액이 부족하다는 보도가 종종 나오는데 요즘 상황은 어떻습니까.

“참여도가 예전보다 좋아져서 인구의 5%인 250만 명이 매년 헌혈을 하고 있습니다. 헌혈자 숫자가 매년 5~10%씩 증가하고 있어 수혈용의 경우 국내 혈액으로 충분히 공급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건강한 피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국제적인 인구이동에 따라 잠복기가 긴 바이러스, 알려지지 않은 바이러스를 찾아내기 위한 정밀 검사에 따른 검사비용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1만 명 중 1명이 문제가 있다 해도 반드시 찾아내야 하니 힘듭니다. 문제가 많고 복잡한 데다 위험도가 높아 적십자사에서 혈액 관련 일을 하지 않는 나라도 있습니다. 깨끗한 피를 환자에서 주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며 정부에 그 일을 되돌려 주는 거지요.”

- 외교전문가인데 외교와 적십자사 활동과 다른 점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외교는 다른 형태의 전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교는 여러 가지 정보와 지략으로 상대방을 압도하고 내 이익을 극대화시킵니다. 상대방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일종의 제로섬게임이라고 할 수 있죠. 적십자 활동은 나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여 남의 가치를 올려주는 일입니다. 남을 이겨 승리를 가져오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계층의 사람을 도와줘서 사회 전체를 튼튼하게 하는 게 의미가 있습니다.”

   
 
     
 


“적십자사 원주 이전 결정 재고해야

요즘 유종하 총재는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취지 하에 대한적십자사를 원주로 이전하기로 한 결정을 재고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적십자사는 전시에 활동하기 위해 출발한 단체이기 때문에 국방부, 외무부와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이 나면 국제적십자사가 전쟁지역으로 달려와 활동을 펼칩니다. 적십자사는 전시에 국방부와 긴밀히 협조하여 일해야 한다는 것이 제네바협정에 명시되어 있는데, 그 점을 우리가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1,200억 원의 부채를 몇 년 안에 갚는 일과 적십자 봉사원을 2배 이상 늘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유 총재는 요즘 새로운 일을 또 하나 만들었다.

“우리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데 적십자사가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합니다. 갈등의 골이 깊으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북한과 남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이 깊습니다.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다르고 종교적인 갈등 조짐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의 갈등이든 부작용 없이 메우려면 정치, 인종,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적십자가 나서야 합니다.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 사랑으로 부둥켜안고 나아가야지요. 그 일을 위해 각종 캠페인과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적십자 봉사원의 숫자가 증가하면 부드러운 손길이 늘어날 겁니다. 이웃을 돕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의무이며,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인터뷰 김범수 발행인 . 글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이승재 객원기자 fotols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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