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실용론’의 허구
‘중도실용론’의 허구
  • 미래한국
  • 승인 2009.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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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_전재욱 미래한국 편집위원·테고사이언스 이사
▲ 전재욱 테고사이언스 이사
최근 청와대가 전면 표방하고 나선 ‘중도실용’ 노선은 그 상황판단, 내용 및 기술적 측면에서 모두 함량미달이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과반을 한참 밑돌아, ‘다스릴’ 수 없게 된 상황에 지극히 피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와 사명

대통령 취임 후 1년 반 동안 거듭된 실수와 無行動(non-action)은 정권이 안전한 항구에 닻을 내리고 고지를 향할 기회를 앗아갔다. 정책 이슈의 선정은 주먹구구로 이루어졌고, 여론의 추이도 읽지 못했으며, 실행 전략과 전술은 소영웅주의적 아집만 노출했다. 정책결정자의 비과학적인 ‘경험’, ‘感’ 등에 의지한 결과는 하루도 편할 날 없는 대한민국이었다.

빌 클린턴의 정치 컨설턴트로서, 최고의 여론조사전문가로서 일세를 풍미한 딕 모리스를 인용해보자. “지지도가 50% 밑으로 내려가면 기능적으로 대통령이라 할 수 없다. 정치인은 지속적인 과반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항구적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 모든 이슈들에 관해 어떻게 하면 매일같이 지지를 확보할까 계산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비추어 보면 이명박 대통령은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이었지만 제대로 기능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목적 권위에 의지해 계속 정면 돌파를 시도했고, 실패했다. 지지확보를 위한 치밀한 사전 계산은 없었다. 몇 가지 이슈에 천착하여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밀고 나가는 것은 장렬하지도 않으며 바른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를 세우고자 하는 대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린쥐 사건의 전말이나 대운하 추진을 보라. 인터넷 시대에 겨우 라디오 마이크를 잡는 소극성을 보라. 대통령은 ‘신이 권능을 부여한’십자군도 태양왕도 아니다.

반대정파의 ‘발목잡기’만 탓할 수도 없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발목잡기 운운한 데에는 정치권을 넘어 국민을 선동해 직거래하겠다는 전략이 있었다. 그러한 전략적 목표 없이 무능, 무지, 떼쓰기로 점철된 한계야당 및 체제전복세력과 전면전을 계속하는 것은 수렁 속에 빠져드는 지름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프로그램의 상당 부분이 이미 좌초된 상태에서 지금은 남은 부분을 어떻게 성공시킬까를 고민해야 한다. 몇 개의 단단한 초석을 놓을 수만 있다면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수호세력의 연속과 발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대통령의 사명이다.

클린턴의 삼각측량전략과 이명박의 중도실용

정국 교착상황이 16개월이나 계속되고서야 청와대가 궁여지책으로 내세운 것이 삼각측량법(triangulation)을 원용하여 중도로 움직인다는 것. 어떤 깜짝쇼라도 기획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삼각측량법의 정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좌우 양극단에서 중간으로 이동하는 동시에 밑바닥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수준을 뛰어넘어 보다 더 긍정적인 높은 지점에서 자리를 잡겠다는 것이다.

빌 클린턴은 1993년 4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 직후 전 국민 대상의 정부관리 의료보험을 실시하기 위한 개혁안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나 실패했고 1995년 이전에는 낮은 지지도 때문에 제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하지 못했다. 1996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클린턴은 정치컨설턴트 딕 모리스(Dick Morris)와 더글라스 쉐엔(Douglas Schoen) 등의 도움을 얻어 삼각측량법이라는 이름 하에 중도유권자를 흡수하는 전략을 마련, 재선에 성공한다. 재정적자, 교육, 복지 문제에서 일부 공화당적 입장을 채택하는 동시에 총기소지, 낙태, 흡연, 간병, 출산휴가 등에 대한 공화당의 극단적인 입장을 공격해서 밥 돌(Bob Dole)에게 승리한다.

한마디로 구체적 이슈를 중심으로 한 크로스오버 전략이다. 반대파의 영역에서 적당한 이슈를 빼내와 신선한 해결책을 제시해 최소한 비기는 동시에 자기의 원래 자리는 굳건하게 지켜서 필승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의 수립과 실행은 소수의 ‘感’을 따르지 않고 치밀하고 과학적인 여론조사에 기초했다. 여론을 애써 무시한 이념적 의료보험개혁에서 실패한 교훈을 단단히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면 청와대식 삼각측량법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던 우측에서 어딘가 모를 ‘중도실용’으로 이사하고 뭔지 모를 ‘근원적 해결책’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 이슈를 정해 반대파가 점유하고 있는 영역으로 침투, 전선을 형성하고 여론을 움직여서 승리하고자 하는 전략적 접근이 아니다. 통치가 어려우니 지금의 자리를 떠나서 본거지를 ‘그때그때 다른’ 허공으로 옮기겠다는 말로 들린다.

‘중도실용’은 도대체 X축 어디에 있는가? 右에서 무엇을 죽이고 左에서 무엇을 살릴 것인가? 무엇이 ‘근원적’인가? 이들은 소위 실용주의자 대통령이 써서는 안 될 개념이 모호한 거대 추상어들이다. 대통령은 부정확한 수사로 대충대충 얼버무리는 참모들의 글을 낭독하기 전에 단어 하나하나의 함의가 어떻게 되는지 꼼꼼히 따져볼 일이다.

클린턴 삼각측량법의 성공 뒤에는 “이슈(즉 목표)의 설정 쭭 뚜렷한 비전 제시 및 방향의 단호한 설정 쭭 목표 달성을 위한 여러 대안의 세밀한 검토 쭭 여론조사로 대안 검증 쭭 선택한 대안을 세일즈하기 위한 논리 개발 및 검증”으로 이어지는 지식집약적인 과정이 있었다. 청와대는 ‘感’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感’을 과학으로 대치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이슈, 국민, 여론조사

청와대의 중도이동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구체적인 이슈의 부재다. 중간층을 잡기 위한 서민정책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은 말하지 않는다. 중간으로 이사하면 유권자들이 무엇을 얻을 것인지 설명도 약속도 없다. 충청권 인사들을 권력기관의 장에 앉히고 충청권 총리 얘기를 흘린다. 반대정파는 불신하고 우군은 흔들린다. ‘정략적’, ‘진실성 결여’ 등의 유치한 표현이 설득력을 가진다.

중도이동을 표방한다고 나락으로 떨어진 이대통령의 이미지가 바뀌지 않는다. 이미지의 개선은 하찮아 보이는 작은 이슈들을 가지고 벌이는 싸움이 누적되었을 때 가능하다. 한 2년은 꾸준히 전략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지금은 이슈 파이팅 만이 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슈인가?

우리 사회 분열의 실체는 사실 좌-우 균열 보다는 인사이더-아웃사이더의 균열이다. 많은 국민들은 자신이 아웃사이더라고 느낀다. 반면 국회등원을 거부하는 지역주의 한계야당, 계파싸움에 정신 없는 여당, 정치면을 정쟁 보도로 뒤덮는 언론, 모두 인사이더다. 인사이더들은 거시적 소득, 고용, 분배 등의 이슈를 선호하며, 자신들의 싸움이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진짜 전선은 보육시설 확충, 대기오염 방지, TV에서의 폭력·섹스 문제 등 아주 구체적인 민생이슈를 중심으로 형성되는데도.

빠르게 진화하는 아웃사이더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과학적 여론조사가 필수불가결하다. 폼 나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하나하나 검증하고 주워담는 귀납적 과정을 통해 과반 지지율의 구조가 세워질 수 있다. 물론 리더십과 조사의 끊임없는 상호대화와 체크를 전제로 하는 이야기다.

청와대가 하지 않는다면, 장기매복에 들어간 박근혜파가 하지 않는다면, 사망직전의 한계야당이 하지 않는다면, 열린 마음과 두뇌를 소지한 누군가가 할 것이다. 그것이 한국정치의 다음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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