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두 아버지의 유언
북한의 두 아버지의 유언
  • 미래한국
  • 승인 2009.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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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90년대 중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북한주민들의 탈북과 한국입국이 지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 입국한 탈북민의 수는 1만6,000여 명에 달하고 금년 6월까지 1,500여 명에 이른다. 올해 말까지 4,000명이 입국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래한국>은 지난 7월 1일 최근 입국한 탈북민 2인을 만나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철한 씨(가명·45)는 작년 3월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가까스로 성공했다.

가족들은 평안남도 고향 땅에 남겨둔 채 혼자 탈북을 감행했다. 그리고 남한에 온 지 4개월이 지나 부인과 두 자녀를 북에서 데려올 수 있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한 것은 어느 날 갑작스런 일이 아니라 10년에 걸쳐 마음에 준비해온 행동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의 탈북은 그의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고위 군관급의 ‘중국파’ 엘리트였다. 그러나 김정일이 등장하여 70년대 말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 시작될 때 반대파로 지목돼 처단됐다. 당 정책 비난과 군사기밀 누설이라는 죄목으로 정치범 수용소에서 온갖 고생을 했다고 한다. 7년이 지나 다행히 수용소에서 석방이 됐으나 그 후 지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2001년 세상을 떴다.

평소 책을 많이 읽던 아버지는 수용소 생활을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 김일성, 김정일 체제가 결국 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돼 새 세상이 오는 그날까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를 아들에게 가르쳤다. 북에는 전란(戰亂), 흉란(凶亂), 병란(病亂)이 반드시 닥쳐오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산골에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유를 찾아가라며 자리에 누울 때마다 늘 “자유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주체사상 책을 분석하면서 특히 ‘지도와 대중의 결합’이라는 주제에 주목하라고 했다. 이 말은 사람은 능력대로 산다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민은 수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라며 인민이 모두 수령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수령의 종속물이 돼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한 방송 듣고 새로운 세계관 갖게 돼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김철한 씨는 새로운 세계관을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남한 방송을 청취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산골지역에 직장을 배당받으면서 라디오를 듣는 것이 수월했다. 1998년경부터 중국에서 들어오는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남한에서 들려오는 방송을 들었다. KBS사회교육방송과 제주극동방송을 주로 들었는데 제주극동방송은 아주 선명하게 들렸고 ‘새벽을 맞이하는 기도’라는 프로그램을 애청했다고 한다.

산골 직장에서 외롭게 생활하다 보니 마음이 울적하여 술을 많이 들게 되고 자존감이 흩어질 때가 있는데 이런 때는 방송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남한과 세계정세에 대해 알게 되면서 라디오가 얼마나 소중한지 잠들 때는 꼭 껴안고 자곤 했다. 북한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본질과 목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자유’에 대해 갈망하게 됐다.

당시 젊은 혈기에 아버지를 수용소로 보낸 자를 잡아 죽이겠다고 별렀지만 아버지는 이러한 아들을 보고 “네가 하는 짓은 개인 테러다. 테러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네가 할 일은 정의와 진리를 찾는 것이다. 너희 2세는 현실의 고통을 참고 인내해야 하고 네 아들 3세에 가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러면 통일의 날이 올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김철한 씨는 이때부터 자유를 갈망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가 방송에서 들은 내용을 직접 전할 수는 없었지만 김정일 체제의 본질이 거짓이고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면 모두 공감했다고 한다.

수령 초상화 훼손됐다고 인생이 곤두박질

작년까지만 해도 해주지역의 경비를 책임진 군관 장교였던 탈북 청년 박광철 씨(가명·34)는 15년간 군 생활을 하며 충성을 다해 왔지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탈북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정한 탈북 동기는 그 역시 아버지의 덕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20세에 노동당에 입당하여 평생을 북한 공산체제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군대를 다녀오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서 평생을 의사로 일했다. 당에서 공부를 시켜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생각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정일 체제로 바뀌면서 ‘당 유일사상 체제 확립의 10대 원칙’의 하나로 김일성 반대 세력 척결을 강조하던 시기에 아버지가 근무하던 병원의 한 간호원의 실수 때문에 아버지 운명이 곤두박질쳤다.

당시 반항공 대피훈련을 하던 중 김일성 초상화를 안고 대피훈련에 참가한 간호원이 병원을 가로질러 달려가다가 넘어지면서 초상화를 놓쳤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차바퀴에 깔려 초상화가 부서지고 말았다. 수령의 얼굴을 훼손했으니 간호원은 매장 위기에 놓여 있었는데 이를 안 아버지가 사건을 숨기고 간호원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사건은 고발됐고 아버지는 반동인물로 낙인이 찍혀 좌천하게 됐다. 월급도 받지 못하는 무보수 노동을 오랫동안 감당해야 했다. 40여년을 노동당원으로 충성했지만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말년에 아버지는 위암으로 고생했고 결국은 군대에 가 있는 아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박광철 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휴가 상신이 거부돼 부득불 탈영하여 아버지 장례를 치렀다.

평소에 아버지는 자본주의 체제를 새롭게 인식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남한에 가 살라, 나처럼 살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전까지만 해도 꿈에도 탈북을 생각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유언 같은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했으나 남들처럼 진급하지 못했다. 부모가 권력이나 배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 대해 참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군부대에 하달하는 지시내용이 당과 국가가 주창하는 것과 내용이 너무나도 정반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사회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과 국가는 평화적 통일을 주장했는데, 정작 내려온 지시는 “평화를 외칠수록 군인은 총창을 더 별러야 한다. 남측과 대화와 교류가 진행될수록 환상을 갖지 말고 총대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했다. 이러한 거짓과 허위가 분명해질수록 그는 탈북의 마음을 더 굳혔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을 방문했을 때 남한은 햇볕정책을 강조했지만 당시에 북한은 ‘강철 같은 의지로 무력통일을 하자’고 외쳐댔던 일을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남북간에 6·15공동선언을 발표했지만 그 선언은 쇼에 불과하다고 거듭 말했다.  #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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