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아킬레스건, 한족과 소수민족 간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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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09.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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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구르 사태
▲ 중국 경찰들이 위구르 여성들이 시위를 지켜보고 있다


중국 내 50여개의 소수민족과 한족 간의 화합 못 얻으면
급속한 경제성장 불구하고 중국 정권의 존속 어려울 수 있다


영국의 유력한 잡지인 이코미스트는 중국 신장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한 지난 7월 9일 ‘중국의 악몽’이라는 제목으로 신장에서 일어난 위구르인들과 한족 간 충돌을 다뤘다.

결론은 중국이 이번에는 억압으로 신장에서 발생한 소요를 쉽게 진압했지만 (인종 간) 조화를 확보한 것은 아니라며 중국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서 중국정부가 신봉하는 이 조화를 얻지 못하면 중국 정권은 생존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내 50여개의 소수민족과 한족 간의 화합을 얻지 못하면 급속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정권 존속이 어려울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코미스트의 경고처럼 이번 중국 신장 사태는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중국 내 주류인 한족과 소수민족 간 갈등을 지난해 3월 티베트 소요에 이어 다시 한번 드러냈다.

사태의 발단부터 인종 차별 문제였다. 지난 6월 말 중국 남부 광동성의 한 장난감 공장에서 위구르인들이 한족들에 의해 강간 혐의를 받았고 이를 항의과정에서 최소 2명의 위구르인이 사망했다.

지난 7월 5일 신장의 수도 우르무치에 모인 위구르인들은 정부관계자들에게 이에 대한 사실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고 도시 전체로 퍼지면서 위구르인들과 한인 간의 유혈충돌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성난 위구르인들이 한족들을 보이는 대로 구타하며 한족 사상자가 속출했고 이에 분노한 한인들이 다음날 위구르인들을 보복하며 사태는 걷잡을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 위구르인들의 한족 공격에 보복하기 위해 몰려오는 한족 남자들

1,200여 명 사상자 천안문 이후 최악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이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에서 진행 중이던 G-8 회담을 하다말고 급하게 돌아와야 했고 수천 명의 경찰과 군대가 신장 지구로 급파되어 양측 간 충돌을 막는데 주력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쌓였던 위구르인들의 분노가 폭발, 우르무치 뿐 아니라 신장 서부 카쉬가르, 쿠카 등에서 위구르인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중국 최대 모스크가 있는 카쉬가르에서 수백 명의 위구르인들은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며 중국 정부의 위구르 탄압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난 7월 14일 기준 중국 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번 사태로 184명이 사망했고 1,000여 명이 부상했다. 1989년 북경 천안문 사태 이후 최악의 유혈사태다. 해외 위구르 망명 단체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 위구르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구르인들은 1949년 중국에 복속된 후 한족들로부터 많은 억압과 차별을 받아왔다. 인구 2,400만 명의 신장 자치지역의 원래 이름은 동투르크스탄이다. 현재 전체 인구의 45%인 투르크계의 위구르인들이 살던 땅이라는 증거다. 위구르인들은 투르크계로 국경을 접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인종적으로 유사하다. 종교는 수니 이슬람이어서 한족과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전혀 다르다. 위구르인들은 이를 근거로 중국이 자신들을 식민지화했다고 보지만 중국은 기원 전 서한시대부터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1955년 자치지역이 된 신장은 중국이 ‘서부대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지역개발에 나서기 시작한 1990년대까지는 무시되어온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은 그동안 이들이 중국에서 분리하려는 것에만 신경 썼지 이 지역 개발은 등한시 해온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 노력이 동부 해안지역을 따라 성공하면서 중국 정부는 석유와 광물이 풍부한 서부의 신장자치지역 개발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신장지역과 중국 동부지역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한족들의 신장자치지역 이주를 독려해 1940년대 이 지역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했던 한족들이 지금은 40%가 된다. 반면, 1940년대 전체인구의 75%였던 위구르인들은 45%로 줄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식으로 위구르인들은 한족에 땅과 이권, 문화 등을 하나둘 내주며 소외되어갔다.

한족이 이권 독차지·위구르 문화 억압

신장자치지역에서 가장 돈이 되는 사업인 석유, 농업, 건축 등은 대부분 한족들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족들은 자기들끼리 계약을 하면서 사업을 키웠고 위구르인들은 일자리를 잃고 수도 우르무치에서 주변 시골로 밀려나는 양상이 되었다. 한족과 위구르인 간 소득격차도 당연히 커졌다.

중국 당국과 한족들은 신장 내 공립학교에서 위구르어 대신 한어를 사용하도록 종용하고 있고 위구르인들의 이슬람 종교생활을 통제하고 있다.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이 코란을 개인적으로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있고 아랍어 공부는 지정된 공립학교에서만 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이슬람의 5가지 기둥 중 2가지를 제한하고 있다. 바로 1년 중 한 달을 금식하는 라마단과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가는 하지를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 중국 경찰들이 신장지구 내 가장 큰 모스크 주변에 배치되고 있다

중국은 학생들과 공무원들은 라마단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있고 하지는 정부 관할 여행사를 통해서만 갈 수 있게 하고 있다.

중국의 위구르 이슬람 통제는 2001년 9·11테러 후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며 더욱 강화됐다. 당시 중국 당국은 위구르 분리주의 단체인 ‘동투르크스탄 이슬람운동’(ETIM)을 알 카에다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서구 인권단체들은 중국의 이 주장은 위구르인들을 더욱 탄압하기 위한 구실이라고 비판했지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0여 명의 위구르인을 붙잡으면서 중국의 주장은 힘을 얻어 미국의 동의 하에 위구르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당시 붙잡힌 위구르인들은 테러용의자로 추정, 관타나모 수용소에 보내졌는데 결국 반미 테러와 무관하다고 판결, 최근 석방됐다.

▲ 방화된 차들 사이를 걸어가는 위구르인 남자들

경제 번영과 자유를 맞바꿀까?

위구르인들에 대한 통제는 지난해 북경 올림픽 때 더욱 강화되었다. 중국 당국은 이들이 테러를 자행해 올림픽을 방해할 수 있다며 단속을 강화, 위구르인들이 호텔에 투숙할 경우 호텔은 반드시 경찰에 신고하도록 했다.

위구르인들이 이처럼 당한 차별들이 이번에 폭발했다는 것이 유력한 분석이다. 지난해 3월 중국 남서부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서 일어난 티베트 소요도 이와 비슷한 이유였다.

이코노미스트는 티베트와 위구르인들은 중국 정부가 제공하는 경제적 부와 자유를 맞바꾸지 않은 2개의 그룹이라고 평가하며 하지만 중국에는 다른 불만 세력들이 많다고 전했다. 파륜궁 지지자, 7,500만 공산당원 수를 능가한 수천만 명의 기독교인들, 땅을 뺏긴 농부들, 부모 세대와 달리 경제적 번영을 당연시하면서 자유가 제한되는 것에 실망한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이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정권 존속이 어려울 수 있다. #

워싱턴=이상민 특파원 genuinevalu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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