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디자인계의 전설’ 권명광 홍익대 총장
‘시각디자인계의 전설’ 권명광 홍익대 총장
  • 김범수 발행인
  • 승인 2009.08.03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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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특색 살리기가 최고의 도시 디자인
   
 
  ▲ 권명광 홍익대 총장  
 

눈길이 가는 곳마다 디자인이 넘쳐나고 있다. 한때 디자인 결핍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오늘날 오히려 디자인 과잉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디자이너의 손이 제품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나아가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디자인 시대를 열어온 에너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미래한국>이 지난 7월 15일 황무지 같던 우리 나라 디자인계를 40여 년간 현역에서 일하며 세계 수준으로 발전시켜온 시각디자인의 선구자 권명광 홍익대 총장을 만났다. 일찍이 1978년 파리조형협회가 주는 디자인상을 수상해 한국 디자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그의 첫인상은 부드러움과 간결함이었다. 하지만 깊은 연륜 뒤에 숨어 있는 번뜩이는 열정과 통찰력에서 한 시대를 이끌어온 최고 디자이너의 강력한 저력이 이내 드러났다.

지난 5월 16일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에서 개최된 제44회 ‘5·16민족상’ 수상자에 예견치 못한 인물이 선정됐다. 시각디자이너 권명광 홍익대 총장이 그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디자인 분야를 개척하고 이를 미래 산업성장의 동력으로 육성 발전시켜 국부 창출의 계기를 마련해준 공로로 사회·교육 분야에서 수상했다. 권 총장은 수상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를 일으킬 때 디자인에 큰 관심을 쏟았다는 점에서 5·16민족상의 수상 의미를 새겨보았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1960년대 가난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라는 전국적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수출을 가장 앞세웠는데 디자인산업을 견인차로 끌어들였습니다. 디자인이 좋아야 수출도 잘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실천한 것이죠. 대학로 입구에 ‘한국디자인포장센터’가 건립되었고 이낙선 초대 상공부 장관을 비롯한 당시 쟁쟁한 집권층 인물들이 원장으로 부임했어요. 그것은 당시 정권이 디자인의 실제적인 진흥에 역점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이곳은 나중에 ‘한국디자인진흥원’으로 발전했는데, 이곳이야말로 한국 디자인의 메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찌감치 디자인분야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디자인산업을 육성했다는 평가는 신선했다.

이제 디자인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게 됐다. 무슨 제품이든 디자인은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고 디자인으로 값을 매기고 평가하게 되었다. 권 총장은 디자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디자인은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쾌적하게 하며 안락하게 만듭니다. 알게 모르게 사회적 기여가 아주 크지요. 하지만 일부 기업이나 사회지배계층이 디자인을 이용해 오히려 사회적 폐를 끼치는 측면도 있습니다. 공해를 유발하거나 가격을 지나치게 상승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지요. 디자인은 속성상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같은 소재를 사용했는데도 ‘캘빈클라인’의 청바지는 40달러지만, ‘리바이스’의 청바지는 15달러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디자인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의 차이입니다. 디자인 만능 사상이 자칫 소지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소비자들은 디자인이 가진 공공적 기능, 즉 사회적 기능을 고려해야 합니다. ‘유익을 주는 디자인’과 그렇지 않은 디자인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최고 디자이너로부터 듣는 디자인비평이 흥미로웠다.

“이와 함께 소비자들은 과잉 디자인의 위험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최근 어떤 리조트 두 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너무 대조적이라서 놀랐습니다. 같은 건축소재를 사용했는데도 한 리조트는 과잉 디자인을 했고 다른 리조트는 편안한 디자인을 보여주었거든요. 화려하고 비싼 디자인이라고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환경과 상황에 맞는 적절한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말입니다. 과잉 디자인은 생산자 중심의 디자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권 총장은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디자인은 상업적일 수 밖에 없으며 또 1회적인 것입니다. 사용가치에 따라 디자인이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양한 디자인이 쏟아지다 보니 디자인 사이의 경계가 희석되고 융합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고유성과 함께 보편성도 중시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디자인은 항상 미디어와 병행하여 존재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은 디자인으로 하여금 시대의 첨병이 되게 하는 특성을 갖게 하고 언제나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며 나아가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힘을 발휘하게 하지요.”

 

‘디자인 경영’을 도입하다

권 총장은 70년대 초부터 홍익대 교수로 재직해 왔다. 이때부터 그는 여러 기업의 디자인 자문위원으로서 일할 기회를 가졌고 많은 디자인 성공사례를 만들어 왔다. 권 총장은 대표적 사례로 ‘대웅제약의 이미지 변화 전략’을 꼽았다.

“당시 대웅제약은 ‘대한비타민산업’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제약회사에 불과했어요. 1973년 3월 자문위원으로 관여하면서 기업의 대표제품인 ‘우루사’의 디자인개발에 집중하게 됐었지요. 먼저 알약에서 소프트캡슐로 디자인을 바꾸면서 색깔과 포장디자인도 같이 바꾸었지요. 마케팅정책에 따라 포장을 30개 단위로 바꾸어 제품의 외형을 더 고급화시켰습니다. 당연히 가격상승이 따라왔지요. 또한 광고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데 우루사의 주성분이 웅담유사성분이라는 점에 착안해 곰의 쓸개와 이미지를 연계시켰고 제품 캐치프레이즈를 ‘웅담성분 간장약’으로 내세우게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궁극적으로 기업의 변화를 가져왔고 마침내 곰 이미지의 마크를 내세워 회사명도 대웅제약으로 변경하게 됐지요. ‘곰’이라는 이미지에 집중한 것이 주효했고 이 회사는 굴지의 제약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품의 중심 타깃을 ‘숙취한 사람’으로 정하여 당시 선두 브랜드 제품하고 같이 먹으면 좋다는 식의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게 했었어요. 이 캠페인은 대성공이었고 술을 마시고 나면 으레 우루사를 같이 먹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습니다. 이 사례를 통해 디자이너는 디자인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 마케팅 나아가 경영까지 주도하며 실제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 셈입니다.”

그는 시각디자인분야 뿐 아니라 디자인을 마케팅과 브랜딩 등에 접목하는 ‘디자인경영’에서도 독보적인 선구자였다.

희소분야를 향한 도전

세계 일류기업 삼성전자의 성공 이면에도 그의 역할이 있었다. 그는 1985년 삼성전자의 자문위원이 되면서 외국 광고제작사에 맡긴 한 CF제작물을 경영진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전자제품의 광고는 실버와 블루 컬러를 중심으로 한 딱딱한 로봇 이미지가 주류였지만 이 제작물은 앞서가는 새로운 이미지 개념으로서 보라색과 금색을 내세운 부드럽고 유동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 제작물을 채택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을때 그는 디자이너로서의 직관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경영진을 설득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 이미지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중요한 순간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디자이너가 기업경영의 중요한 선택을 도왔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앞서가는 세계의 디자인 개념을 기업경영에 연결하는 브릿지 역할은 디자이너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는 70년대 초 상업사진이나 동양화가 주류를 이뤘던 달력에 일러스트를 최초로 도입한 디자이너로서도 유명하다. 당시 그가 만든 대한생명보험의 일러스트 달력은 KBS 달력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달력디자인이 보편화 되고 희소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을때 그는 또다시 새로운 관심분야를 발견했다. 그것은 CI(Corporate Identity)라는 기업이미지 디자인 영역이었다.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기업이미지 분야를 디자인을 통해 구축하는 일은 70년대 한국 광고디자인계의 가장 큰 화두였다. 당시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CI는 쌍용그룹 CI이다.

김성곤 선대 회장으로부터 그룹을 물려받은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은 새로운 경영체제를 이뤄가야 하는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었다. 그룹 휘하의 여러 기업을 통폐합하면서 일률적으로 쌍용이라는 기업 명칭을 부여하고 CI작업을 권 총장에게 맡겼다. 그의 디자인 결론은 ‘Ssangyong’이라는 워드마크(word mark)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어떤 기업도 그룹도 글자를 마크로 사용한 예가 없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되는 시도였다.

   
 
     
 

“다행히 김석원 회장은 나의 뜻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습니다. 다른 디자인 회사들과 함께 경쟁 프리젠테이션을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장실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프리젠테이션 30분 전에 회장실로 와달라는 전갈이었지요. 쌍용그룹 이미지가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쌍용그룹 CI는 김 회장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어요. 디자이너가 아무리 훌륭해도 후원자가 없으면 디자인의 실현은 어렵다는 말입니다.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를 마크로 도입했던 동화은행 CI는 무척 파격적이었는데, 당시 안응모 행장의 적극적 후원으로 가능했었지요. 또 직원이 많다보니 바람 잘 날이 없었던 한국전력 CI 도입도 당시 박정기 사장의 배려와 후원 덕분에 실현될 수 있었어요. 다빈치 뒤에는 메디치가의 후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경제력의 성장과 함께 디자인도 발전했다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자동차, 전자제품, 조선업, 건설업 등을 생각할 때 우리의 디자인 수준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 총장은 “디자인의 수준은 서열로 표현할 수 없는 분야”라면서 “디자인은 저마다 나름의 특징과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1위다, 2위다 하는 숫자로 서열을 매기는 계산법이 디자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디자인이 일시적 유행처럼 되는 것은 문제”

최근 우리 나라 지자체에도 디자인 붐이 일고 있다. 서울시가 2010년을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언하고 ‘디자인 서울’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가 하면 많은 지방자치 단체들이 공공디자인 정책을 앞다투어 내세우고 있다.

“디자인이 일시적 유행처럼 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공공디자인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않아요. 천편일률적인 공공디자인 도입은 낭비라고 봅니다. 각 지자체는 자기 지역의 지방색을 특성화시킬 수 있는 소재를 찾아 그것에 디자인 정책을 집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버려진 폐광촌을 개발하여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영월군의 디자인 아이디어가 좋은 사례입니다.”

수석 부총장직 3년 그리고 총장직 4년을 재직하면서 홍익대를 디자인하는 일에도 남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권 총장은 총장의 역할을 큰 강물의 흐름에 비유하면서 조화와 조정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전임 총장의 하던 일을 잘 마무리해야 하고 또 후임 총장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일터를 만들어 물려주는 것이 총장의 역할”이라고 했다.

권 총장은 지난 3월 23일 홍대 미대 입학시험에서 미술 실기 시험을 없애겠다고 선언해 주목을 받았다. 폭탄선언이나 다름없는 이 선언은 미술 실기가 오랫동안 관행인 미대입시 판도에 큰 변화를 예고했다. 당연하지만 미술 실기에 중점을 두어온 미술학원들과 학교 내 일부 교수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미술 실기 문제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미술 실기 시험을 없애겠다”

“이 선언은 즉흥적인 것이 아닙니다. 37년간 홍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보아온 입시 현실에 대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새로운 입시기준을 마련하고 구체적인 후속조치를 하고나서 2013년부터 시행할 계획입니다. 이 계획에 대해 거부하는 집단보다는 우호적인 집단이 많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총장이라는 자리는 궁극적으로는 학교를 발전시켜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총장의 궁극적 역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총장은 대학에 관심을 둔 모든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긍정적 리더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나 역시 새로운 비전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홍익대의 비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권 총장의 대답은 명료했다.

“장기적으로 홍익대가 존재하려면 대학 특성화에 역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대학이 잘하는 일을 더 잘하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대학들이 추구했듯이 외형적 규모 늘리기나 백화점식 경영은 구시대의 산물입니다. 무엇이든 특별한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홍익대를 특성화 시키는 길은 미술과 디자인 분야를 집중 강화하는 것이 방안이 될 것입니다. 해외의 어느 비즈니스 잡지가 디자인 분야의 세계 10대 대학으로 홍익대를 꼽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이 기회를 대학 특성화를 통해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홍익대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미래요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점이 있다. 홍익대는 어떻게 미술대학으로 유명하게 되었을까? 설립자의 특별한 사명과 비전이 있었던 것일까?

“솔직히 그게 불가사의예요. 초기에 신문방송학과에 중점을 두다가 5·16 후에 폐과되고 미술학과가 부상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게 딱히 누구 때문이고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일제 때부터 활동해온 유명한 화가들이 홍대로 한두 명씩 모여들면서 나름대로 결집력이 생겼고 그 제자들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그 후 차츰 이름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미술부문에서 독보적 역할을 확보한 홍익대는 이후 시각디자인분야에 대해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추구해 왔다. 외적으로는 전국적인 미술실기대회를 개최해 학교를 알렸고 내적으로는 앞서가는 커리큘럼을 개발해 전국 대학의 시각디자인 교육의 모델이 됐다. 이러한 노력으로 안상수, 조의환, 류명식과 같은 주목할 만한 디자이너를 배출한 것이 명성의 토대를 이루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디자인 대가가 꼽는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권 총장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최고의 디자이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해를 만드셨는데 그것이 색깔과 디자인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세상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디자인이 아니겠습니까?” #

인터뷰/ 김범수 발행인

글/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amil.net
사진/ 이승재 객원기자lsj@hanmail.net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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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16-03-24 22:50:28
권명광 전 홍익대 총장은 저의 작은외할아버지신데....!!!!! 현재는 상명대 석좌교수로 활동중이시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