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정상화를 위하여
호남의 정상화를 위하여
  • 미래한국
  • 승인 2009.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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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전재욱 편집위원·국회통외통위 자문위원
▲ 전재욱 편집위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보수는 또 한바탕의 소란을 두려워해서인지, 자중 모드다. 길바닥에서 국회로 돌아갈 명분에 고심하던 민주당은 DJ가 남긴 ‘관용, 화합, 통합의 유훈’ 운운하면서 등원을 선언했다. ‘친노 신당’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민주당을 지역주의 정당으로 규정하고 좌파의 헤게모니를 꿈꾸고 있다.

DJ만큼 격한 감정을 자아내게 한 인물은 한국정치에 없다. 세상을 떠난 그에 대해 사실 입이 가려운 사람들이 허다하다. 49재가 지나고 점잖은 침묵이 깨질 때가 되면 상충되는 평가가 격렬하게 충돌할 것이다. 그 중 지역감정의 역사를 복습해보자. 타부를 건드려서 매를 맞더라도.

DJ에게는 ‘호남을 이념으로 승화시키고 이용하여 권력을 쟁취한 3김 정치의 대표자’라는 뿌리 깊은 비판이 존재하는 한편, ‘호남의 메시아’라는 위치 또한 확고하다. 그 혐오와 숭배가 부딪히는 곳에 한국사회의 최대 균열선이 그어져 있다.

한국 정치에서 ‘호남은 따로 논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재향인, 출향인을 가릴 것 없이 호남에 기반을 둔 정당과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감싼다. 국가적 이슈들에 대한 입장도 일사불란하며, 외부 정치세력은 호남에 도저히 발을 들일 수조차 없다. 지역감정의 대칭점에 있는 영남과 비교해도 정도가 너무 심하다. 그러다 보니 정치 뿐 아니라 기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고립을 자초한다. 호남이 통합되는 것이 곧 국민통합이다.

호남은 왜 언제부터 따로 움직이게 되었는가? 따로 움직이는 것이 필연이 아니라면 다시 같이 움직일 수 있는가? 재래의 정설은 1) 조선시대의 극심한 불평등 또는 착취 구조부터 기인한 호남민중의 혁신성, 2)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영남에 의한 호남 핍박, 3) 5·18 이후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 등이 호남의 소외와 결집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5·18은 호남의 ‘정의’가 이데올로기로 승화되는 계기였으며, 그 이후 호남의 비동조성(非同調怯)은 필연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12대 총선의 파라독스

선배 한 분과 DJ 서거 얘기 도중 12대 총선 얘기가 나왔다. “1985년이잖아. 호남 투표결과를 한번 봐. 민정당 표가 그렇게 나올 수가 없는 거야. 광주에서 3,000명이 죽었다는 얘기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던 때인데. 정치학계를 주름잡는 호남 인맥이 이건 부러 말 안하고 지나친다네.”

그래서 찾아본 자료들에서, 당시에는 당연했지만 이젠 역사의 숙성에 의해 의외로 다가오는 결과들을 발견하고 통계를 정리해봤다.

12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전두환 정권이 5년 차로 치닫던 1985년 2월 12일 전국 92개 중선거구(1구 2인)에서 치러진다. 당시 ‘재야인사’로 밖에 부르지 못하던 DJ와 YS가 막후 지휘하는 신한민주당 창당 25일 째이고 DJ가 전격 귀국하여 가택 연금된 직후다.

결과는 민정당이 35.2% 총 득표로 87석, 신민당이 29.3%에 63석. 관제야당으로 비판 받던 민한당은 대폭 퇴조한다. 대도시지역에서는 ‘선명(鮮明)’ 신민당 바람이 불어 서울 14개 선거구에서 신민당이 1등으로 12석을 가져간다.

31개 도시형 선거구에서 신민당이 금메달 21개를 비롯 30석을 획득하고 민정당은 26석에 그친다. 반면 농촌형, 도농복합형 선거구 61개는 민정당이 절대 우세를 보인다. 유신 이전의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부활한 듯한 형국이다.

호남은 어떠한가? 우선 득표율에서 민정당은 전남(광주 포함) 35.7%, 전북 36.8%로 전국 평균보다 높지만 강원, 충북, 경북보다는 꽤 낮은 편이다. 신민당은 전남 25.4%, 전북 26.5%로 전국 평균보다 낮지만 강원, 충청, 경북보다는 꽤 높은 편이다. 이 정도로는 호남이 따로 논다고 할 수 없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1위 당선 비율이다. 5·18에 분노한 호남민심이 정치적으로 결집했다면 2인 1구의 중선거구제 하에서 민정당을 당선시키더라도 적어도 1위는 신민당 등 야당에 주어야 마땅할 것.

그러나 결과는 전북 7개 구 중 4개, 전남 11개 구 중 9개에서 민정당이 1위 당선한다. 서울, 부산에서 민정당 1위 당선율이 15% 선인 점을 감안하면 전국적으로 55%에 육박하는 민정당의 1위 당선율은 영남(95%)과 함께 호남의 기여에 힘입은 것이다.

이 통계는 웅변한다. 적어도 1985년 봄까지는 ‘영남 가해자 : 호남 순교자’라는 정치적 심벌보다는 자신의 직접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어쩌면 오히려 선진적인) 투표행태가 지배적이었다고. DJ라는 ‘순교’의 상징이 가택연금을 당하면서까지 보낸 결집의 메시지가 아직까지는 호남의 유권자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고.

“지난 4년 간 장외정치권으로 분류되었던 재야정치세력과 학생세력이 유세장이라는 매개 현장에서 하나의 힘으로 결집됐고 여기에 野怯 유권자까지 가세”한 모습, 2년 뒤 민주화 운동과 6·29 선언의 단초가 되는 그 모습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대도시 지역에 국한된 움직임이었다. 

12대 총선 이후

호남의 ‘따로 가기’는 박해에 대한 자연적 대응이 아니라, 민주화 과정의 파생된 사생아다.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1985년 이후 DJ라는 걸출한 인물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고민하고, 다듬어낸 결과다.

2월 총선 후 ‘2중대 야당’ 민한당에서 많은 당선자를 흡수한 ‘선명야당’ 신한당은 정국의 주축이 된다. 3월 YS가 나서고 DJ가 미는 민주화추진협의회가 결성된다. 1987년 개헌이 이뤄지고 통일민주당 결성 후 DJ는 YS와 결별한다. 야권은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노태우의 손에 대권을 넘긴다.

12대 총선 이후 정국에서 야권의 목표는 군사정권의 종식. 이를 위해 5·18은 항쟁의 심벌 역할을 하게 되고 ‘순교자 호남’은 이데올로기화된다. 87년 DJ가 독자노선을 걷게 되자, ‘영남정권’과 영남 출신 경쟁자 YS에 대한 대비로 호남의 ‘특수성’과 ‘도덕적 우월성’은 더욱 신격화된다.

수많은 386 운동권이 이 과정에 참여했다. 그 중 여럿은 ‘비판적 지지’를 선언, DJ를 옹위하고 나섰다. ‘호남 이데올로기’의 전파는 가속화되고 이후 선거에서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하여 97년의 DJ 대권까지 이르게 된다. 이 흐름에서 DJ는 ‘호남 이데올로기’를 선거의 무기로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주재자였고 최대수혜자였다.

正常을 향하여

DJ는 죽었다. 그가 마키아벨리류의 이데올로그 군주였든, 스승으로 대접해야 마땅한 메시아적 선구자였든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는 죽음 이후 역사의 영역에 발을 들였고, 산 자의 영역은 산 자의 책임이다. 합리와 정상을 회복하여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과제다.

호남의 홀로서기는 호남을 보거나 나라 전체를 보거나 역기능이 너무 심하다. ‘도덕적 우월성’의 신화를 이어나가자니 극한 대립을 계속한다. 박해당하는 ‘순교자’를 자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의회가 불신 받고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 정권의 독재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어불성설을 입에 달고 있어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자괴(自壞)만 계속하게 된다. 홀로 서서 이익을 얻는 것은 호남의 평범한 국민이 아니라 호남을 볼모로 잡고 있어야 산다고 생각하는 벼랑 끝의 호남 정치인들 뿐이다.

호남정치야말로 민주화를 필요로 한다. 민주당을 비롯한 호남 정치세력은 ‘호남 이데올로기’의 조작을 포기해야 한다. 호남 내부의 다양성을 허용해 자초한 고립의 구각(舊殼)을 벗어 던져야 한다.

DJ라는 거목의 퇴장으로 호남에서, 대한민국에서 솔직하고 합리적인 민주주의의 길이 열릴 수 있다. 그것이 호남의 정상화이고 한국 민주주의의 정상화이다. (미래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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