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는 누구인가 - 미국에서 공부한 반미친북좌파
강정구는 누구인가 - 미국에서 공부한 반미친북좌파
  • 미래한국
  • 승인 2009.09.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법치를 위협하는 사람들 ④

조영기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강정구 교수는 194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했으며 1965년 부산고 졸업 후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왔다. 1981년 도미해 템플대에서 1983년 사회학 석사, 1985년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사회학 석사, 1987년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 교수는 1988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해 한국사회론, 정치사회학 등을 강의했다. 2005년 ‘6·25전쟁은 통일전쟁이었다’라는 논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찬양, 고무) 혐의로 불기소된 후 2006년 2월 학교당국은 교수직위를 해제했다. 교수직위가 해제되면 강의를 할 수 없으며 연구비 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그러나 교수 신분이 박탈되는 것은 아니어서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면 교수 직위가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강 교수는 학교당국과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강 교수는 1996년 한국산업사회연구학회 회장과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했으며 동아시아 한국학연구센터에서 초청교수(1996~1997)로 참여하면서 연구활동을 했다.

강 교수는 1996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약칭 민족회의) 정책위원장을 거쳐 1998년 공동의장으로 활동했으며 1999년 베트남진실위원회 대표, 2002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약칭 평통사)’ 지도위원을 거쳐 현재는 평통사 공동대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맡아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강정구의 이중성

강 교수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표적인 급진좌파 지식인이다. 국내의 학자들은 강 교수의 이념성향에 대해 그를 정통좌파 또는 급진적 민주주의자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외부평가에 대해 강 교수 자신은 “정통 좌파는 아니지만 좌파는 맞다”면서 “정확히 표현하면 ‘민족민중민주주의자’로 봐야 할 것 같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통일시대의 북한학’ 등의 저서나 각종 세미나에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책임론을 주장하는 등 강한 반미성향을 보여 왔다. 또한 강 교수의 저술과 논문의 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주한미군철수와 반미, 통일과 평화와 같은 주제와 담론에 치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강 교수의 미국과의 인연은 매우 친미적이다. 강 교수의 큰아들은 미국의 대형 법률회사에 취업했으며 둘째 아들은 카투사군인)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또한 강 교수의 부인 노모 씨(모 대학 의대 교수)는 1980년 노 씨가 먼저 미국 유학을 떠난 뒤 이듬해 노 씨의 설득에 의해 강 교수도 미국행을 선택, 위스콘신매디슨대에서 사회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두가 미국과 상당히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간 강 교수의 큰 아들은 중학교 1학년까지,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미국 현지 학교를 다녔다. 큰 아들의 경우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졸업한 뒤 2003년 시카고대 로스쿨에 입학, 올해 6월 졸업한 뒤 미국의 대표적 법률회사(로펌) 중 하나인 ‘클리어리 고트리브 스틴 앤드 해밀턴’에 다니고 있다. 또한 둘째 아들은 강 교수가 안식년을 맞은 1995년 함께 미국으로 가 현지 고교를 다녔으며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쳤다.

강 교수는 저작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통해 친북적 정향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2000년 잡지의 기고문에서 “광복이 되었을 때 만약 외세가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북한 뿐만 아니라 남한도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그 당시의 역사적 필연”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강 교수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아마도 2001년 평양에서 개최된 통일대축전에서 생긴 일 때문이다.


‘만경대 정신’글로 남겨

2001년 평양 통일대축전에 참가한 강 교수는 김일성 생가를 방문한 뒤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라는 글을 남겼다. 소위 ‘만경대 정신’사건은 2001년 평양 통일대축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남남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만경대는 김일성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북한에서는 성지로 간주되는 곳이기 때문에 그 파장은 클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강 교수가 방명록에 남긴 ‘만경대 정신’의 의미는 김일성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정부는 8월 20일 청와대에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회의를 열고 방북단 인사의 사법처리 방침을 확인했다. 방북단이 귀환하자 강정구 교수, 김규철(범민련 부의장), 임동규(범민련 광주전남의장), 문재룡(범민련 서울부의장), 김세창(범민련 중앙위원), 박종화(범민련 광주전남 사무국장) 전상봉(한국청년단체협의회 의장) 등을 구속했다.

‘만경대 정신’을 방명록에 서명한 강 교수가 21일 김포공항에서 당국에 연행되기 직전 낭독한 메모가 또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메모에서 ‘만경대 정신’이란 “민족을 위해 희생하거나 헌신한 사람을 기리고 자손에게까지 명예와 보상을 내림으로써 민족을 위해 헌신하도록 해 민족정신을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김일성 주석 가문이나 주체사상을 찬양할 의사가 없었다. 단지 순간적으로 나타난 단상(斷惻)을 방명록에 가벼운 마음으로 썼다. 만경대 정신이라는 개념을 언론이 확인도 없이 멋대로 왜곡 과장해 문제 삼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통이라는 과정이 필연적이라고 본다. 방명록 기재라는 사소한 일 때문에 진통을 겪는 것은 민족과 통일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주문하고 했다. 이는 자기방어를 위한 논리적 비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다”

강 교수는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대업 이룩하자’는 소위 ‘만경대 정신’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강 교수는 구속된 20일 만에 보석으로 석방돼 공판이 2002년 8월까지 모두 8차례 열렸으나 이적성 문건에 대한 감정서가 제출되지 않아 재판을 속행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강 교수는 보석된 상태에서 ‘부시방한 반대시위’에 참여하는 등 반미활동을 지속했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장군 동상을 놓고 ‘사수-철수’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강 교수는 2005년 인터넷 신문에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기고문을 통해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으로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소위 통일전쟁 논쟁을 점화시켰으며, 보수단체의 반발을 불러왔다. 보수성향의 시민단체 회원 820명은 강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하고, 강 교수에 대한 재판은 2005년 12월에 재판이 재개됐다. 재판은 ‘만경대 정신’사건과 ‘통일전쟁’ 사건은 1심에서 병합심리를 받게 됐다. 실로 3년 만에 공판이 재개된 것이다. 강 교수는 이듬해 5월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징역2년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이어 2007년 11월 2심 선고공판에서는 1심형량과 같은 징역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우리의 주적은 미국이다”

강 교수는 “국방백서에 주적을 미국으로 명시해야 한다”며, “미국과 한미동맹 운운하는 것은 도둑에게 곳간 열쇠를 맡기는 것과 같은 자살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어 강 교수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11번의 전쟁 위기 중 9번은 모두 미국이 주도했다”며 “이 땅의 전쟁 주범은 북한이나 남한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라는 게 명백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이쯤 되면 2004년 국방백서는 주적을 지울 것이 아니라 주적으로 미국을 명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힐난했다.

이어서 강 교수는 2005년 5월 국회와 평화통일연구소가 개최한 ‘2004 국방백서 바로잡기’ 토론회에서 “우리 민족의 국방백서라기 보다 미국의 작은 국방백서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고 주장한 뒤 국방백서를 ‘대미 용비어천가’라고 규정하며 “국방백서는 미군 주둔을 정당화해 민족자주를 훼손하고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고취함으로써 통일에 걸림돌로 작용, 평화를 저해해 왔다”고 맹비난했다. 또한 “국방백서는 과거 한미동맹을 그야말로 평화지킴이로 평가하고 있다”며 “그야말로 맹목적 대미 추종주의, 대미 자발적 노예주의, 민족 자폐주의 등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고 주장하면서, “국방백서와는 정반대로 미국과 주한미군이 한반도의 평화지킴이가 아니라 전쟁위기 주도자, 곧 전쟁주범”이라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전쟁위기의 주범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으로 미국주도의 전쟁위기는 핵전쟁까지도 상정하고 있다”며 “남북주도의 전쟁위기는 우발적 충돌에서 비롯됐으나 미국주도의 전쟁위기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의 반미 활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강도가 강화되어가는 것 같다. 그는 2005년 9월 30일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민교협) 주최의 한반도 정세 토론회에서 ‘한미관계의 비판적 검토와 새판짜기’라는 발제문을 통해 “한미동맹의 본질적 속성상 반민족적, 반평화적, 반통일적, 예속적이며 한국전쟁 때 미국이 남한을 도와줬으니 우리도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맹목적 보은론의 포로로 사로잡힌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한미군사동맹은 철폐돼야 하며 한미관계는 한중, 한일 관계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우호친선협력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며 “민족 공조와 탈미 비동맹 중립의 위치에서 ‘동북아 경제평화협력체’를 구성해 동북아의 장기적 상생 구도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

강 교수는 2006년 ‘한국언론을 말한다’라는 강연에서 6·25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개입을 두고 “‘가상의 적’(미국)이 평양까지 온 데 대한 ‘보가(保家)’ 개념의 방어전쟁이었다”라며 반미를 거침없이 주장했다.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좌파세력의 운동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집요하게 계속됐다. 동상철거문제가 최초로 표면화한 것은 2004년 11월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등 10여개 인천의 좌파계열 시민단체들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냉전시대의 산물이라면서 이를 시내 연수구 옥련동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데서 비롯됐다.

강 교수는 ‘데일리스프라이즈’에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6·25전쟁을 ‘통일전쟁이자 내전’이라고 전제한 뒤 “집안싸움인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테고, 우리가 실제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며 “전쟁 때문에 생명을 박탈당한 약 400만 명에게 미국이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생명을 앗아간 원수”라고 규정했다. 이어 그는 6·25전쟁 당시 일어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맥아더 장군이 중국과 북한에 원자탄 투하를 주장했던 것을 지적한 뒤 “거의 대부분은 그들이 ‘구세주’로 모시는 바로 그 당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라며 “이런데도 생명 은인이라고 동상을 세우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금지야 옥지야 껴안고 있어야겠다고 폭력몰이와 색깔몰이까지 벌리는 판이니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다”고 비판하고, “맥아더는 오직 이곳 남한 땅에서만 아직도 웅대한 동상으로 위용을 보여주면서 죽어서도 역사를 왜곡하고 오염시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며 “아직도 맥아더의 허물 속에 갇혀 냉전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를 넘어서고 또 이 허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유기업원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