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문열 "안중근에 얽힌 7개 봉인을 풀다"
작가 이문열 "안중근에 얽힌 7개 봉인을 풀다"
  • 김범수 발행인
  • 승인 2009.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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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거 100주년 특집<소설 안중근-불멸>작가 이문열 인터뷰
   
 
  ▲ 이문열 작가  
 


10월 9일 오전 경기도 이천 부악문원으로 소설가 이문열 선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외출하고 없었다. 이천 시내의 은행에 갔으니 1시간 정도 걸릴 거라는 전갈이었다.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하고 간 것이 아니니 순간 오히려 잘된 일이다 싶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면 미안한 마음에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은근히 했기 때문이다. 이문열 선생은 올 한 해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공표하고 모든 언론을 피하는 중이다.

“오늘 누구랑 약속한 거 같았는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들어서는 그는 기자 일행이 인사차 온 것으로 생각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담소를 나누던 중 카메라와 녹음기를 꺼내자 그는 “인터뷰 하는 거냐”고 난색을 표했다. 그러면서 “올해 인터뷰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안 된다. 다른 매체들도 다 거절했는데 미래한국만 하면 원망 듣는다.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 왜 인터뷰를 안하시는지요.

“발언한다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작년부터 할 마음 없었어요. 촛불집회 때 발언을 좀 했고, 그 외에는 없습니다. 보수정권이 다시 들어섰는데 내가 나서서 용비어천가를 부를 필요도 없고, 이미 권력을 내놓은 사람을 짓밟을 수도 없고, 할 말이 없어진 거죠. 말하기 좋은 때가 아닙니다. 나서서 할 말이 없는데 괜히 유탄 맞을 필요 없잖아요. 올해 들어 공적인 발언은 관훈클럽과 광화문포럼에 나가서 강연한 것이 전부입니다.”

지난 9월 광화문포럼에 연사로 초청되었을 때 그는 원래 주제인 ‘문학과 사회’ 대신 ‘안중근과 7개의 봉인’에 대해 얘기하겠다고 했다. “갈수록 말하는 것이 힘들어지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게 부담스럽다”며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새벽까지 준비했다고 전했다.

그는 “안중근은 역사와 시대 속에서 각각의 세력에 따라 필요한 부분은 부각되고 필요 없는 부분은 말살·봉인됨으로써 전체적인 모습을 잃고 여러 갈래로 조각난 안중근만 남았다”며 7가지 봉인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는 안중근에게 붙여진 7개의 봉인으로 ‘일본 제국주의, 공화주의자, 민중주의자, 가톨릭, 혁명론자, 독립운동의 각 노선, 민족주의자’ 등을 꼽았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 과정에서 무장투쟁이 가장 효율적인 독립운동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안중근의 애국계몽 운동을 축소하는 반면 정치외교노선을 걷는 사람들은 무장투쟁가, 실천가로서의 안중근을 지워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광화문포럼 토론에 초청되었을 때처럼 ‘안중근’만 논하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안중근 바로 보기

이문열 선생은 조선일보의 안중근 일대기 연재 제안을 애초에 거절했다가 두 번째 제안에서 하기로 결정한 계기를 들려주었다.

“2005년에 내가 쓴 명성왕후 후속작으로 안중근 뮤지컬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어요, 그 때 개괄적으로 안중근의 일대기를 살펴봤는데 드라마로 만들기가 힘들었습니다. 안중근은 15세부터 30세까지 좌도 우도 안돌아보고 한 방향으로 달려간 삶이어서 드라마 소재로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안하기로 했는데 조선일보에서 두 번째 의뢰가 왔을 때 자료를 다시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조선일보에서 안중근 연재를 한다는 것에 대해 ‘친일이 감히 안중근을 다루나’ 그런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과연 누구의 안중근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간 안중근을 다룬 작품을 읽어보니 나름의 입장에 맞추어 마지 못해 봉인을 해제하거나 쓰고 싶은 것만 그렸더군요. 우물우물 넘어간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종합적으로 그려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되었고 시작하니 뜻밖에 자료집이 많았습니다.”

현재 안중근 의사에 관한 자료의 70%가 1970년대 이후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자료는 1940년 이전 자료이다. 안중근 의사가 죽기 한두 달 전 감옥에서 쓴 자서전이 1970년 전후에서야 일본 도쿄 헌책방에서 발견되면서 그간 몰랐던 사실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사와 맥락이 안 닿아 긴가민가했던 일, 이를테면 안중근이 15세 때 의병을 일으켜 동학군을 쳤다는 내용 같은 게 밝혀진 거죠. 앞뒤 맥락이 안 맞아서 묻혀버렸던 여러 사안들이 그 자서전으로 인해 드러난 겁니다. 마지막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때문에 한쪽에서는 신비화, 우상화 된 부분이 있고, 일제는 부랑아, 암살범, 폭력주의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민족주의에 의해 독립성전의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죠. 그 사이에 끼어 애매한 내용이 지나갔는데 자서전으로 인해 풀린 거지요.”

- 안중근 의사를 어떤 분이라고 보십니까.

“어느 측면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견해를 다 합치면 됩니다. 안중근은 이 일을 하다가 돌아서서 저 일을 한 게 아니고,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계속 얹어서 가는 사람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 쏘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애국계몽운동을 하고, 우리나라가 국제법을 지키면 해방 될 거라는 사실을 종교처럼 믿었던 사람입니다.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자기 지성이 닿을 수 있을 때까지 노력했습니다. 동양평화론은 현재 EU의 원형입니다. 한중일이 합쳐서 본부를 차려 화폐를 통일하고 군대를 통일하자고 했는데 현재 EU보다 더 정교합니다. 국제연맹 결성 10년 전, EU 출범 90년 전에 그런 생각을 했으니 굉장히 앞서 갔죠.“

그는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사촌까지도 이 나라 이 백성을 위해 일했다고 소개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독립운동가 안명근은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10년 동안 복역했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들은 의병생활을 했고 특히 막내동생 안공근은 김구 선생의 사실상 경호실장 역할을 했다.

이문열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술했던 경호 상태를 비롯한 기적적인 주변 환경과 놀라운 명중률이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렸다는 것이다.

당시 위상이 높았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원성이 워낙 컸던 지라 안중근 의사의 활약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사진이 귀할 때인데도 일본경찰에 체포된 애국자나 독립군의 품속에서 예외없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나왔다고 한다. 사형당하면서 “내 스승은 안중근”이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가톨릭의 고민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소설 안중근-불멸>은 올해 연말에 끝나게 되는데,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부분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지 계속 고민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가 고민하는 부분 중의 하나는 안중근(세례명 토마스)과 가톨릭과의 관계성이다.

“가톨릭 신자인 안중근이 일본의 주요 인물을 저격했으니 천주교 입장이 곤란했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떠날 때 성체성사를 받고 가고 싶었지만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을 상대로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여순 감옥에서 안중근은 자신에게 처음 세례를 준 빌헬름 신부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빌헬름 신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에 대해 엄하게 질책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조선천주교를 감독한 미텔 대주교는 빌헬름 신부에게 두 달간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빌헬름 신부가 교황청에 이의신청을 하였고, 사제들이 세 번 투표를 하여 미텔 대주교 측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빌헬름 신부는 근신처벌을 받고 프랑스에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에 왔지만 다시 쫓겨났습니다.”

-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저격 행위를 종교적으로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아마 조건부로 인정했을 겁니다. 사람을 죽인 건 맞지만 조국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에서 타협했을 겁니다. 안중근 의사의 정확한 대답은 기록이 안 되어 있고 ‘토마스가 죄를 지었지만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이 용서하고 받아주실 거다’라는 빌헬름 신부의 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을 살인자나 암살자라는 생각을 안했다고 봅니다. 그걸 해결해야 합니다. 중요한 문제지요. 안중근 의사를 암살자로 만들면 우리나라 자존심이 말이 아니고, 영웅으로 만들면 알 카에다도 장군이 됩니다. 지금 세계와 연관이 있고 가톨릭과 연관이 있습니다. 교황칙서에 ‘정의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악한 자를 없애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의의 실천이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테러가 허용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어떻게 끝낼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우리 가톨릭의 고민을 왜 네가 하고 있나’라고 하던데 정말 고민입니다.”

연재를 마치면 거의 평전에 가까운 현재의 작품을 어떻게 소설화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소설로 만들면 양이 많아지지만 가능한 한 2권으로 묶어낼 예정이라고 했다.

- <불멸> 연재가 끝나면 어떤 작품을 쓸 계획이신가요.

“할 얘기 늘 많아요. 정신없이 화가 나 싸움한 게 한 10년 되는데 2005년에 미국 가기 전까지 취재하거나 구상해놓고 못 쓴 것도 대여섯 권 됩니다. 지난 10년 동안 16권을 썼어요. 굉장히 화가 나서 쓴 <호모 엑세쿠탄스>와 <아가>가 순문학이고 단편집, 잡문집, <초한지>를 썼는데 차분한 문학작품이 없어요. <호모 엑세쿠탄스>는 진지한 문학작품이지만 내가 봐도 민망할 정도로 화를 내고 있어요. 잡문집은 태반이 화가 나서 쓴 신문칼럼입니다. 앞으로 그걸 되풀이해선 안 됩니다. 해야 할 게 많지만 다 할 순 없고 서너 편 정도는 꼭 써야죠. 빨리 마음 정리를 하고 화를 풀어야죠. 지금도 가끔씩 화가 납니다.”

호모 엑세쿠탄스는 ‘처형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2003년 1월에 인터넷을 통해 연재를 시작했는데 당시 인터뷰 기사에서 그는 “2년 전부터 나는 사이버 공간에서 논쟁의 한가운데 서 왔다. 그런 소동을 통해 느낀 것은 작가는 무슨 말을 하더라도 소설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 세계, 그리고 분노

 

 

- 어떤 부분이 화가 나십니까.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까요?

“공격자도 있지만, 갑작스럽게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 세계에 대한 분개지요. 전혀 이해 못할 거 같으면 차라리 단념하겠는데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이해 안 되는 희한한 메커니즘 때문에 화가 나는 거죠.”

- 화가 나도, 이해 안 되어도, 말하지 않는 작가가 더 많은데 피하지 않고 말씀을 하셔서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봐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죠. 말해야 할 때는 해야 하지만 효과는 별로 없으면서 내 삶이 피폐해지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책 장례식 때문이었을 겁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고두고 화가 나더군요. 2005년 미국으로 갈 때 화가 제일 많이 나 있었어요. 정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더군요. 밤낮없이 화를 내고 있으니 식구들이 못 견딜 정도였어요. 안 되겠다 싶어서 미국으로 갔는데, 사실은 도움이 되었어요. 별거 아니지만 거리가 있으니까… 거기서도 인터넷 치면 다 나 오지만 ‘내가 여기까지 와가지고 이럴 수 있나’ 이런 생각을 하니 좀 자제가 되더군요. 미국 가면서부터 말이 적어지기 시작했죠.”

2001년 11월 3일에 이문열 선생의 문학사숙(私塾)인 부악문원 앞길에서 열린 책 장례식의 충격은 여전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는 그해 7월 조선일보에 언론사 세무조사를 비판하는 ‘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라는 칼럼과 동아일보에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라는 칼럼을 기고한 후 맹공격을 당했다. 추미애 민주당 의원은 ‘지식인들이 신문지면을 통해 성장한 후 곡학아세(曲學阿世)한다’고 비난했고, 11월에는 일부 세력들에 의한 책 장례식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글을 쓴 지식인들은 욕설이 섞인 항의전화를 받고 이메일와 홈페이지로도 공세가 이어졌다.

-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을 것 같습니다.

“소수의 공격자들보다, 동료라고 믿었던 그 무기력한 사람들에게 대한 서운함이 더 많았죠.”

- 그 때 이후 문단과 교류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거의 없어요. 그쪽에서도 다급하지 않겠지만 내가 그때 이후에 사실상 모든 문단 단체와 거래 끊었어요. 어디든. 그때 성난 기분에 ‘저 사람들은 동료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내 일이 아니고 자기들도 언젠가 독자들한테 미움 받으면 당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위해 세 사람 정도 조선일보에 글을 썼는데 두 사람은 조선일보에서 부탁해서 쓴 거고 자발적으로 쓴 분은 박완서 선생뿐이었죠. 당시 전화로 나한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한 작가가 두어 명 있습니다. 요즘 ‘내가 그때 가만히 있었던 게 부끄럽다’고 하는 사람은 더러 있습니다. 그때 대단히 적막한 기분이었지요.”

- 사회 현상에 대해 솔직한 발언을 하는 건 애국이라는 차원에서 하신 건가요?

“애국 같이 거창한 거 보다 소박하게 1990년대부터 이런 감상이 있었어요. 어느 날 보니까 이 사회로부터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었어요. 그럭저럭 20년 가까이 번성을 누리면서 어느 날 문득 내가 뭘 했는데 이런 대접을 받나, 내가 좋아서 내 글 쓴 거 밖에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역으로 부채의식이 생기더군요. 내가 하는 일이 뭔가 도움이 되고 복리 증진에도 기여할 거라고 믿어서 대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죠. 그러면서 나에게 마음껏 준 이 사람들의 세계가 더 나빠진다면, 나에게 힘이 있어서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한다,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 내 생각에는 나빠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한데 오는 주관적인 압박도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빠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심성이 우려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그 우려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현실 권력과 문화 권력

- 요즘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이승만 바로 알기’ 흐름이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그 흐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는 이상하게 현실 권력은 우파 내지 보수적인데 문화권력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좌파와 진보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진보적 세계관으로 볼 때 지금까지 모든 정권들은 실패했습니다. 좌파나 진보의 문화관은 이념적 이상적 관념적이기 때문이죠. 분단은 이승만 때문이라는 ‘단정론’은 대단히 잘못된 겁니다. 세계의 역할을 무시한 거죠. 누가 봐도 분단되게 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양면적으로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협상력과 국제적 안목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지만, 정치 책략부분은 분열주의를 썼다는 설과 권위주의자라는 평이 있습니다. 여러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 워낙 책이 안 나가니 문학의 위기, 출판의 위기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동인문학상 심사하느라 한 달에 10권 정도의 소설책을 검토합니다. 나는 안 좋게 보지 않습니다. 젊은 작가들이 굉장히 치열하게 열심히 쓰고 여러 가지 모색도 하고 있어요. 무턱대고 문학이 침체했느니 소설의 위기니 하는 말에 난 전혀 동의하지 않아요. 팔리는 것도 있어요. 실제로 순수하고 진지한 문학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행복한 케이스가 서양에도 많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가 예외적으로 많았습니다. 우리는 문단에서 박수받고 베스트셀러 되는 게 많아요.”

-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사이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가요.

“구별은 된다고 봅니다. 그 구별이라는 게 넘을 수 없는 선 같은 건 아닙니다. 미국도 중간작가나 대중작가로 오래 활동하다가 문학적으로 성숙하면 순문학으로 넘어오고 그런 것이지 절대적 선이 있는 게 아닙니다. 작품으로 이건 대중적이다, 이건 본격적이다 가늠하는 거지, 작가를 규정하는 건 아닙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일본 문단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우리 작가 아니다’라며 대중작가처럼 생각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우호적으로 바뀌어서 하루키를 ‘우리 작가야’라고 하더니 이젠 완전히 국민작가가 될 판입니다.”

-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생각, 경건한 마음 같은 걸 가져야 할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글이란 게 다양하니까 경건하고 진지만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명상록은 경건과 진지가 중요한 덕목이겠죠. 루카치가 ‘타락한 방법으로 타락한 시대를 그리는 게 소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타락한 방법이란 거 여러 어두운 국면을 쓸어 담는 것이니까 경건과 진지만으로 할 수 있는 작업 아니지요. 하지만 나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 쓰는 건 아니지만 작가가 마지막까지 진지해야지, 그걸 잃어버리고 나머지 갖고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1998년에 이문열 선생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부악문원은 요즘 찾는 이가 없다.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작가가 후진 양성을 위해 사숙을 정식으로 개설한 것은 부악문원이 처음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건물에 장서 1만5000권을 갖춘 부악문원에서 공부하여 등단한 작가가 여럿 있지만 그는 “여기서 나간 학생들 내 제자라는 말 못합니다. 말하면 따돌림 당해서…”라며 씁쓸해 했다.

이문열 선생은 지난 10년 동안 원고청탁도 거절하고 어떤 문단 모임에도 가지 않았다. 다만 얼마 전 한국펜클럽에서 주관하는 예술원상을 받았다.

“국제 세미나가 있어서 청하는 바람에 갔으나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어요.”

2년 6개월 만에 미국에서 돌아와 만난 문인은 김원일 작가가 유일하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계속 인터뷰를 요청하고, 독자들이 뽑는 인기작가 순위 상위권에 늘 랭크되며, 그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안중근의 일대기 <불멸> 연재가 끝나면 역사물이 아닌 순수창작물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환갑 진갑 다 지나서 이제 쉽지 않아요. 80년대는 한 달에 400매씩 썼어요. 많이 쓸 때는 800매까지 썼는데 요즘은 한 달에 200매 정도 씁니다. 앞으로 대외적 발언을 삼가고, 정치적 모임을 안 할 생각입니다.”

그는 앞으로 ‘거리 만들기’를 할 작정이라고 했다.

“사실 뭘 해야 할지 답답합니다. 원칙은 서 있는데…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어차피 작가로 늙을 건데 세월이 무진장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몇 년 안 남았어요. 평균수명이야 길어지겠지만 일할 수 있는 기간 얼마 안 남았어요. 여기서 어정거리다가 지난 10년처럼 허우적거리면 마무리 할 기회가 없어집니다. 문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이상하지만, 문학과 근접해 있고 문학 이외의 것하고는 거리를 만들어야죠.”

문학에만 시간을 투자하여 빛나는 작품을 쓰길 그의 수많은 애독자들은 분명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

인터뷰 / 김범수 발행인

글 /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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