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자살골 넣지 말라”
“한나라당, 자살골 넣지 말라”
  • 미래한국
  • 승인 2009.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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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직필정론의 상징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가장 행복할 때 이만 접고자 합니다’라는 인사를 남겼던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그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2008년 12월, 조선일보에 25년간 써온 ‘류근일 칼럼’을 중단했지만 그는 요즘 인터넷 매체 뉴데일리에 칼날 같은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지난 11월 4일 이명박 대통령의 세종시 원안 수정을 정면으로 반박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야당으로 가라’는 요지의 칼럼을 쓴 뒤 연일 인터넷이 시끄러웠다.

11월 8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만난 류 전 주필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시종 즐겁게 인터뷰에 응했다.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고도 평생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그는 올 3월부터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무사(武士) 기질이 있다고 자평하는 칠순의 류 전 주필에게서 청년의 기개가 느껴졌다. 


주상전하 vs 대왕대비마마

-‘야당으로 가시지요’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많이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한나라당의 기둥이 뭐고 서까래가 뭔지 판결을 못할 형편이니 정치 수요자 입장에서 정치 생산자에게 항의를 한 겁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양심의 자유에 대해 말한 게 아니라 주상전하가 내린 결정을 대왕대비마마가 자꾸 뒤집어서야 되겠느냐는 취지였지요.”

-세종시 발언 이후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의 지지도가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잡을 수가 없어요. 대중의 여론은 트렌드를 파악하는 참고사항은 될 수는 있으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세종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원래 논점은 해당지역의 행복추구권을 어떻게 극대화 시키느냐는 것과 국가적인 대계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입니다. 친박이냐 친이냐, 이상한데로 빠질 게 아니라 대안을 생각해야지요. 행정부서 몇 개 옮기는 게 효율성이 있느냐, 국가백년대계에 어긋나니 대안은 이렇다, 이렇게 풀어가야죠. 저는 행정부처를 옮기는 것보다 경제과학도시 아이디어에 찬성합니다. 행정부처 옮기는 것은 효율성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잘 사는 도시, 번창하는 도시를 만들어주자는 것에 찬성합니다.”

-세종시를 원안대로 가자는 쪽은 결정을 번복하면 안 된다, 약속을 지키라는 걸 강조합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전 정권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대북정책도 김대중 대통령이 결정한대로 해야겠네요. 미국도 부시에서 오바마로 바뀌면서 오바마가 달리하고 있습니다. 정권 바뀌면 정책도 바뀌는 겁니다.”

류근일 전 주필은 세종시 이외의 이슈로는 박근혜 전 대표를 비난한 것도, 비난할 것도 없다고 했다.

“오히려 정권 초기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박 전 대표를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 너무 야박하게 한다’, 그런 발언을 했지요. 차기에도 보수정권이 집권하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유력한 후보인 박 전 대표가 계속 유력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이템별로는 잘못될 수 있는 거고 세종시 아이템에 관한한 안 좋다는 걸 밝힌 겁니다. 그런데 그걸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불쑥 쓴 건 사실이죠. 글 쓰는 사람으로서 표현을 더 정제하는 게 좋았겠죠.”

-정권재창출을 위해 여권에 어떤 점을 주문하고 싶습니까.

“한나라당이 잘해줄 거라는 기대는 안 해요. ‘잘못하지 좀 말아라. 마이너스, 감점, 자살골 넣지 말라’는 주문을 하고 싶어요. 앞으로 한나라당이 썩 잘하긴 틀렸어요.”

-박사모 쪽에서 친이와 결별한 상태에서도 박 전 대표가 대선에서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더군요.

“그런 게 자살골입니다. 속으로 그런 자신감을 갖는 건 좋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좌익이 쓰는 통일전선이란 자기를 감추고 당면의 공동목표만 얘기하라는 겁니다. 우파도 그런 게 있어야죠.”

-대선주자들이 계속 거론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차기 대통령이 되면 좋을까요.

“앞뒤 말이 안 맞고, 의견을 표현해야 할 때 회피하고, 정치적 구호에 너무 능수능란한 사람보다는 정직한 사람이 좋습니다. 올곧게 그때그때 쨍소리 나게 하는 사람, 표 의식하지 말고 세종시 문제에 대해 분명한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죠. 다른 이슈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 될 때를 대비해서 김정일의 인권탄압을 비난하지 않는다거나, 그런 건 곤란합니다.”


대통령론

-현재 주된 관심사, 국가적 과제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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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정권이 건재하는 한 북한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고, 정권 재창출을 위한 범우파, 범대한민국 진영이 단결해야 합니다. 분열하면 안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정책적 배려가 중요합니다. 단기적으로 금년과 내년에 경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타결할 것이냐, 국민의 생활이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하지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우파에서도 비난의 수위를 높이자 우파내부에서 적전분열로 정권재창출을 어렵게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많았다. 그에 대해 류 전 주필은 이런 의견을 피력했다.

“기회주의적인 측면과 투지박약에 대해 비판이 있었죠. 대통령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은 목숨을 걸었어요. 이명박 대통령은 겁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 적이 얕잡아 봤고 그래서 초기부터 레임덕으로 가는 것과 다름없었어요. 촛불집회 때 청와대 뒷산 운운 했으니 권위가 회복이 안 되지요.”

-이 시점에서 이명박 정권을 평가하신다면.

“외교는 그만하면 잘하고 있고, 대북정책은 참아줄만 합니다. 경제정책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무철학, 무사상, 피아 구분이 없는 것, 용인(用人)의 싱거움 등의 문제는 계속 불만입니다. 남은 기간 동안 잘 하길 바랄 뿐입니다.”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지요.

“그 분야는 제가 전문가가 아니어서 주장은 못하지만 반대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업을 벌이게 해줘야지 원천적으로 안 된다고만 하면 어떡합니까. 운하까지는 모르겠으나 4대강 사업의 경우 준설하고 생태계 복원하고 그러면 좋은 거 아닙니까?”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정책을 정권 유지책이자 연명책이라고 비판하셨는데, 보수 대 진보를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대한민국 헌법정신은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준수하면서 대한민국 로열티를 밝히는 양날개로서의 보수와 진보는 찬성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벗어나 북한을 더 좋아하고 의회민주주의보다 민중직접지배와 광장에서 주장하는 걸 더 좋아하는 일은 찬성 못 합니다. 민주적 진보는 타당하고 선진국에도 다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의회민주주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까지 진보라고 뭉뚱그려서 말하는 게 문제죠. 그건 구분해야 합니다. 민주적인 우파와 민주적인 좌파에 의한 한국정치의 주도는 좋은 구도라고 봅니다.”

그는 범야권과 시민사회 각 분야에 퍼져 있는‘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세력’을 진보 스스로가  떼어내야 한다고 충고했다. 또한 친북적 민족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태생적  자유주의자

▲ 1958년 4월 1일, 서울대 문리대 필화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가운데).
류근일이라는 이름 앞에 ‘강경보수’ 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지만 1980년 이전까지 그는 좌파로 분류됐다. 류근일 전 주필은 서울대 정치학과 2학년이던 1957년에 문리대 주간신문에 실은 ‘무산대중을 위한 일고찰’이란 글 때문에 필화사건에 휘말려 4개월을 복역했고 1961년 5·16 직후, 1974년 민청학년 사건까지 세 번에 걸쳐 8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지난 9월 24일 서울고법 형사 9부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과 내란음모죄 위반 혐의로 유죄가 선고된 류근일 전 주필과 이강철 전 청와대 수석 등 12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좌파에서 우파로 변화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운동권 입문 때부터 전체주의와 획일주의와는 죽어도 맞지 않았어요. 우리가 운동할 때 극좌는 발을 못 붙이게 했어요. 리버럴 중에 좌냐 우냐가 중요했지요. 서울대 도서관에 자유당 경찰이나 정보부의 손이 닿지 않는 낙원이 있어요. 거기에서 영문으로 된 온갖 사상서적을 보고 민주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매료되었지요. 한편으로는 우파가 시장경제를 말하면 그럴 듯해 보이고 진보학자가 계획경제를 말하면 솔깃하고 그랬죠. 그때는 대한민국 성취도가 낮았지만 지금은 높아졌지요. 체험적으로 중도 좌파에서 중도 우파로 옮겨왔고, 자유주의가 내 체질에 맞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양보할 용의가 있어요. 국가개입에 의한 복지 확충은 필요하고 문화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자유주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좌파에 몸담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요즘 추세와 달리 60년대는 자신의 지성으로 판단을 했군요.

“요즘은 진보나 좌파가 학문 영역이 아닌 종교적 영역처럼 되고 있습니다. 유사 종교 믿듯이 휩쓸립니다. 여기서 빠지면 버스 놓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비지성적이지요.”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하여 뉴라이트 운동을 한 자유주의연대 쪽 젊은 인사들에 대해 보수 인사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안 해도 좋을 언쟁이 있었죠. 전향을 덜 했다는 의심은 안 해도 됩니다. 단, 뉴라이트 쪽은 어른을 섬기는 게 부족했습니다. 6·25와 산업화 때 고생한 분들에게 ‘한 수 배우겠습니다. 존경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법이 있으니까 우리 아이덴티티를 지키면서 민주화운동 우파로서의 장르를 지키겠습니다’ 라고 이해를 구했으면 좋은데 어른들에게 상처를 줬지요. ‘반공할 필요없다’는 발언을 하여 오해도 불러일으켰고요. 어른들은 ‘우리가 윗세대를 담당할 테니 너희는 40대를 맡아라’하여 분업을 하면 되지 굳이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뉴라이트 젊은이들은 효용론, 체질론, 아이덴티티 보호에만 매달리지 말고 통을 넓혀서 역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조선일보와 기득권층은 정권이 바뀐 뒤에도 여전히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조선일보 대표 논객 출신으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휩쓸림 현상이지요. 젊었을 때 나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만악의 근원을 대한민국 통치로 돌리는 습관이 너무 강합니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민주화도 했고, 경제 규모로 세계 몇 위권이고, 그런 좋은 건 생각지 않고 불평만 합니다. 유행에 휩쓸려서 ‘누구는 죽일 놈, 수구꼴통 탓’ 이런 식으로 매도하는 건 치유 불가능입니다. 그런 현상에 대해 ‘맘대로 해봐라. 계속 불 지르게 하라. 막판 5분전까지 가게 내버려두라’ 이런 위악적인 칼럼을 많이 썼어요. 손쓸 길이 없다고 봅니다. 일종의 중우정치 시대인데 백약이 무효예요. 소크라테스가 100명 나와도 못 고칩니다. 무식 무지 우매는 약이 없어요. 계몽주의적 교육론의 생산성을 믿지 않습니다. 6개월 후에 무릎 꿇고 후회하면서 잘못 찍었다는 걸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어요.”

-20대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20대는 청순한 데가 있어요. 거대담론에 심취하는 게 아니라 자기 취미와 개성의 발전을 즐기고 엔터테이먼트에 관심이 있어요. 우리 사회가 그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 점을 건전한 측면이라 봅니다. 우익이냐, 좌익이냐, 역사란 무엇이냐, 그럴 필요없어요. 20대들 앞에서 종종 강연을 하는데 재미 있게 얘기하면 잘 받아들입니다. 20대는 도그마화되지 않았고, 증오심이 없어요. 유사종교화, 신도화되지 않아 희망이 있습니다. 20대들이 강연 요청을 하면 무료로 해줍니다. 우파인사들이 담론투쟁을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중심은 용기

-후배 기자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이라면.

“글 쓰는 건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원수 안사겠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는 글 쓰겠다, 보편타당한 글을 쓰겠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 보면서 이것도 배려 저것도 배려하겠다’ 이런 글은 안 쓰겠다고 결심했죠. 신문사에서는 개인경쟁력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피나는 공부를 해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이슈를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한테도 원수 안 지려고 하고, 이 사람도 안 부딪치겠다 저 사람도 안 부딪치겠다 하면 그건 기자가 아니라 얌전한 모범생이고 회사원이죠. 상대방이 옥타브를 높이면 더 높이고 누가 비판해도 신경을 안 쓰면 됩니다.”

강단 있게 글을 쓰지만 그는 시대가 순탄했으면 교수가 됐을 거라고 했다.

“내가 연설도 좀 하지만 이론에 관심이 많아요. 학자적 소질이 꽤 있어요. 학문세계의 준거에 눈치를 보며 무식하다는 말 들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늘 합니다. 나의 기층정서에는 국가와 민족이 아닌 지식인은 이래야 한다는 의식이 더 강합니다.

-후회되는 점이나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그것보다는 사주팔자를 너무 기구하게 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죠. 계속 싸움을 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죠. 성격은 운명입니다. 계속 몸으로 싸웠어요. 운동권이 되어서 형무소 들락거리고 글로, 몸으로, 세파와 싸우며 정치적 적대자들에게 핍박과 돌팔매를 당했지요. 핍박이 오면 더 신이 나요.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어도 핍박이 오면 팍 튑니다. 튄 걸로 인해 더 세게 맞을 수도 있지요. 수난을 당하면서 돌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겁이 없어서 싸웠지요.”

-인생을 관통하는 자각이나 감명을 준 글귀가 있으면 소개해주시죠.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정신을 흠모해왔어요. 10살 무렵 김상옥 열사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던진 사건, 수양대군과 사육신, 그런 책을 읽고 격심한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올곧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잠재의식 속에 생긴 것 같아요.“

류근일 전 주필은 1968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1981년에 조선일보로 옮겼는데 1984년경 주간조선에 쓴 글을 보고 편집국장이 칼럼을 맡겨 줄곧 날카로운 글을 세상에 알렸다.  류 전 주필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소신껏 글을 쓸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되었기에 가능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통일 문제와 대북문제에 대해 협조해달라”는 요청이 오자 조선일보 경영진에서 “류근일과 김대중을 직접 만나시죠. 우리는 못 합니다”라고 답했고, 김대중 정권은 두 사람을 만나지 않고 바로 세무조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윗분들이 개입하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하죠. 그래서 손해나는 점이 있었겠지만 일체 말이 없었습니다. 사장이 기소되느냐 마느냐 할 때 여기서 숙이면 망신이라고 생각해서 더 강도 높은 글을 썼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사장의 석방을 원치 않나 봅니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강하게 하다 보니 진보주의자들로 하여금 조선일보를 증오하게 만드는 역할도 했겠죠.”

-글 쓰기 힘들었던 시대는 언제인가요.

“공포는 5공 때, 간교함이라는 점에서는 김대중 시대죠. 탄압이 간교하여 뒤캐기를 했죠. 세무조사할 때 아내 통장까지 다 봤어요. 당시 회사에서 부정부패로 걸린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나중에 후배가 와서 걱정했다면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더군요. 노무현 때는 억압이 없는 대신 민간좌익단체가 욕하고 흉보고 윽박지르고 망신주고 공갈치고 그랬죠. 세게 나오면 나는 더 세게 나갔고 목숨을 던졌으니까 두려움은 없었어요.“

골프를 치지 않는 그의 취미는 영화를 열심히 보는 것과 산책하면서 머리를 비우는 일이다. 조선일보를 퇴사한 이후 컴퓨터를 익힌 그는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을 운영하고 있으며 바른사회시민회의에 관여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류근일 전 주필은 요즘 티베트 불교서적을 읽고 있다고 했다.

“3년 정도 강의를 하고 완전히 은퇴한 뒤 죽음을 준비하고 싶습니다. 10년쯤 죽음을 공부하고, 죽음을 생각하고, 영혼을 청소하고, 상처를 치유한 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죽음으로 넘어가야지요. 죽기 직전까지 싸우다 가고 싶진 않습니다.” #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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