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사를 건 7년간의 탈북 험로에서 구원됐다”
“나는 생사를 건 7년간의 탈북 험로에서 구원됐다”
  • 미래한국
  • 승인 2009.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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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백요셉 씨(26·한국외국어대 재학·미래한국 355호 15p 소개)가 남한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중학교 때였다. 친구가 부서진 라디오를 수리할 때 우연히 남한 방송을 듣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루는 몰래 라디오로 KBS 논평을 듣다가 깜짝 놀랐다. 남한에는 쌀이 남아돌고 아침식사에 쌀로 지은 밥도 잘 안 먹는다고 했다. 당시 북한은 아사자들이 속출하던 무렵이었는데 남한은 쌀을 소비하기 위해 집집마다 쌀로 만든 죽이나 밥을 해서 먹으라고 호소하고 있다니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배급이 중단되었는데도 북한이 천국이라고 떠드는 북한방송과 너무 대조적이 아닌가.  

그는 이후 ‘남한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는 남한으로 탈출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휴전선 부근 동부전선의 탱크부대에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군대에서 내내 농사만 지었다. 군인들은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였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곡식이 익기도 전에 밭을 파헤쳐 가을에 수확을 기대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간경변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임시제대를 하고 귀향하면서 본격적으로 탈북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에서 온 동갑내기 여자 2명과 접촉했다. 그들은 탈북 경험이 있고 심양에서 한국선교사를 만나 성경공부도 했다고 했다. 
백 씨는 수용소에서 그들을 빼내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중국으로 안내해줄 것을 부탁했고, 2003년 1월 무산으로 열흘간 이동한 후 두만강 얼음길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다.


두 번의 북송과 재탈북

중국 공안과 조직폭력단이 우글거리는 연길에서 탈북민들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백 씨의 탈북을 도운 여자들은 연길에서 조선족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어 어디론가 팔려갔고, 그는 한 조선족의 도움으로 잠시 생수배달원으로 일했지만 그나마 깡패들의 방해로 곧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곧 중국공안에 고발돼 그해 4월 북송되고 말았다.

그는 북한 온성 보위부로 넘겨져 1주일간 지독한 심문을 받다가 왼쪽 다리가 골절됐다. 당시 체포된 수백 명의 탈북민들은 보위부 시설에 다 수감할 수 없어 어떤 온성 사람의 집에 임시 수용되었다. 그는 기회를 틈타 다리를 절면서 다시 탈북을 강행했다가 도문고속도로 상에서 ‘중국변방대’에 체포돼 또다시 북송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다행히 대대장이 조선족 출신이어서 사정을 이해하고 그를 북한 보위부로 넘기지 않고 경비가 없는 곳에 풀어주었다.

그는 같은 해 6월 경 다시 탈북했고 백두산 아래 동네인 ‘안도’ 지역에 숨어들어 2년여간 조선족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2005년 2월 안전한 지역을 찾아 ‘대련’으로 이동하였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곳이었지만 식당을 경영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 주방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조선족 주방 아줌마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생전 처음으로 얘기를 들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고 우리와 같이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는 얘기가 생소했지만 뇌리에 남았다. 그는 성경을 선물로 받았고 이 성경은 그 후 몇 년에 걸쳐 그의 탈북 여정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다.


위기마다 돕는 손길

그의 일념은 오직 남한으로 가는 것이었기에 그는 식당에서 6개월간 일하며 번 돈 1,400위안을 갖고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대련에서 기차로 운남성 ‘곤명’까지 이동했고 다시 고속버스로 베트남이 인접한 작은 세관도시인 ‘하구’에 도착하자 국경 맞은편에는 베트남 국경도시인 ‘로가’가 바라보였다.

베트남 탈출을 계획하고 배낭을 꾸릴 때 그는 ‘성경을 가지고 갈까 말까’ 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성경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주방 아줌마의 얘기를 기억하고 성경을 배낭에 넣어두었다. 그 후 그는 기적 같은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 대련에서 곤명행 기차를 탈 때 일일이 증명서를 요구하던 경찰이 정작 그에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통과 시켰다. 그런데 ‘곤명’에 도착해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 검문 때마다 대담해 질 수 있었다.

국경으로 가는 고속버스에서도 수시로 검문이 이루어졌다. 한번은 그가 성경을 베개 삼아 침대칸에 누워 있었는데 검문하던 군인이 빤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하나님, 날 살려주세요!”하고 외쳤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태연한 척했다. 군인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지나가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속버스에서 이런 식의 검문을 세 번이나 당했지만 모두 무사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베트남 주재 한국 외교관으로부터 쫓겨나다 

베트남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하구’에서 베트남 국경 일대를 돌아보며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중국 국기와 비슷한 베트남의 홍기(紅旗)를 보면서 베트남도 공산국가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베트남 내 한국대사관에만 가면 남한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국경지대를 흐르는 홍하(紅河)를 넘기 위해 구명조끼를 구입하여 한 밤에 도강을 시도했다. 1시간이 걸려 베트남 국경 강변에 도착하고 보니 바로 머리 위에 베트남 국경 초소가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기 때문에 어디로 뛰어도 발각될 위험이 높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음 속으로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벌어졌다. 몇 분도 채 안 되어 갑자기 굵은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닥, 후다닥! 요란하게 떨어지는 우박 속으로 뛰기 시작해서 그는 초소지역을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정글을 뚫고 민가지역으로 나와 인근 국경도시로 들어갔고 중국말을 아는 한 화교를 만나 하노이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다행히 승무원의 검표를 당하지 않고 7시간을 여행하여 다음날 새벽에 하노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 대사관은 하노이 대우빌딩 8층에 있었지만 경비가 삼엄해 접근이 어려웠다. 더구나 행색이 남루하여 호텔에 들어가기조차 어려웠다. 이때 한국말을 하며 호텔로 오는 한 부인을 만났는데 그 부인은 ‘어디서 온 분인지 알겠어요. 도와드리지요. 내 아들처럼 내 팔짱을 끼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대사관이 있는 8층에는 엘리베이터가 정지하지 않았다. 이미 근무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부인은 그를 2층에 있는 베트남한인회 사무실로 데려다 주었다. 한인회 직원은 대사관 직원에 연락을 했고 얼마 있지 않아 베트남 경찰과 함께 대사관 직원도 나타났다.

그는 대사관 직원에게 한국 송환을 요구했다. 하지만 직원은 불가능하다며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여러 방법으로 설득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그 직원은 ‘북한으로 돌아가라’고까지 말했다. 믿고 있던 한국 외교관에 의해 쫓겨난 것은 ‘가슴에 비수를 꽂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대기 중이던 베트남 경찰에 넘겨졌고 다행히 중국 공안에게는 넘겨지지 않고 중국 땅으로 추방되었다. 


‘요셉’의 삶

중국에서 살아갈 길은 막막했지만 그는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웠고 6개월이 지나 일상회화에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는 심천의 한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는데 식당 주인의 권유로 교회 출석을 시작했다.
그는 그 무렵 창세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37장부터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는 확신이 들어고 끝없이 울음이 터져나왔다. 17살에 자기 동족 형제들로부터 버림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자기 가족과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총리가 되었던 요셉. 그는 자신이 바로 요셉이고 하나님이 자신을 요셉과 같은 삶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18살에 탈북의 길을 걷게 한 것도 자신에게 요셉의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게 됐고 자신의 이름을 ‘백요셉’으로 개명했다.
당시 그가 일하는 식당에는 피자가게 한국인 사장이 자주 들르곤 했는데 하루는 그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피자가게에서 카운터를 봐주면 월급도 현재의 3배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 순간 삶의 환경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피자가게에서 온 힘을 바쳐 일했다. 가게 전반에 걸쳐 경영의 노하우를 배우게 되었고 사장은 그를 신뢰하며 은행통장까지 맡겼다. 사장은 그에게 중국신분증을 만들어 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피자가게에서 편안하게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러시아를 통한 탈출

2007년 초 그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에 있는 탈북민 이민복 자유북한인연합 대표를 알게 되었고 러시아를 통한 탈북계획이 시작되었다. 이 대표가 러시아에서 유엔난민기구인 UNHCR을 통해 국제난민지위를 인정받아 탈북했던 첫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심천을 출발하여 러시아 국경지역인 흑룡강성까지 올라가 2007년 9월 말쯤 한국서 들어온 이 대표를 만났다. 그는 중국에서 러시아 쪽으로 흐르는 우수리강을 따라 튜브를 타고 험로를 들어섰다. 하지만 튜브를 타고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멀리 중국 변방대의 움직임을 보고 강 건너편으로 숨어들어 도주하고 또 도주했다. 지역을 분간하기 어려워 당초 루트를 이탈하고 말았다. 산으로 도망쳐 갔지만 높은 철조망과 고압전류 때문에 국경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일대는 40년간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분쟁지역이어서 어느 곳보다 경비가 삼엄했던 것이다.

다행히 첫 번째 철조망을 넘었지만 그 다음, 또 그 다음의 철조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고압선과 가시철망을 넘어 간 곳이 하필이면 세관지역이어서 통과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그 지역을 벗어나려고 우회하여 무인지경의 땅을 5일이나 헤매야 했다. 간식으로 가져간 월병 2개로 견뎌야 했다. 먹을 물도 없었다. 하루 24시간을 도보로 걷고 또 걸었다. 가도 가도 광야였고 가시덤불로 가득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밖에 없었다.

“하나님, 저를 여기서 죽게 버려두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제발 살려주세요. 물도 주세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멀쩡한 하늘에서 갑자기 눈송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먹으며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고압선이 없는 철조망지역을 찾게 되어 쉽게 철조망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곳곳에 세워진 경비초소를 통과하기란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기도하였고 경비들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침내 차량이 다니는 도로를 발견하고 걸어갈 때 경찰차가 따라와 그를 심문했다. 그는 미리 배워둔 서투른 러시아 말로 “나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다. 교회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술 취한 러시아 경찰에게 수고비로 200루블을 건네주자 가까운 도시로 데려다 주었다. 그곳은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는 그곳에서 박필녀 소망교회 목사를 만날 수 있었다. 


북송이냐, 망명이냐 기로에서

그러나 그는 3개월 후 갑자기 들이닥친 러시아 경찰에 의해 교회 안에서 연행되어 갔다. 그리고 꼬박 100일간 감옥생활을 하며 ‘북한사람으로 북송되는가’, 아니면 ‘국제난민으로 망명되는가’의 기로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그가 북한사람으로 확인되자 북한 영사관에서 본국으로 송환하겠다고 나서면서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북송 시 나는 일체의 종교자유를 불허하는 모국 북한에서 종교탄압을 받아야 할 기독교인이므로 남한에 가기를 원한다. 나를 난민으로 인정해 달라”고 러시아 정부에 요구했다. 그리고 감옥에서 3일 금식, 1주일 금식을 이어가며 모두 20일에 걸친 금식기도에 매달렸다. 또 성경을 다섯 번이나 통독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확신하였다. 재판은 여섯 번에 걸쳐 있었다. 러시아 재판국은 그를 국제난민으로 인정하고 한국 망명을 허락했다.

한편 한국에서 그를 기다리던 이민복 대표는 요셉이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북송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방으로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때 이 대표는 탈북민 구출기구인 북한구원운동의 김상철 회장과 이 문제를 상의했고 김 회장은 즉각 외교통상부 장관과 주한 러시아 대사에게 공문을 보내 백요셉의 구출을 탄원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주효하여 그는 마침내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를 도운 소망교회의 박필녀 목사는 탈북민을 도왔다는 이유로 2008년 9월 러시아 경찰에 의해 러시아로부터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는 10월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거기서 비행기로 독일 베를린에 기착한 후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2007년 10월 25일 중국에서 러시아로 출발한 지 딱 1년이 지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김창범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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