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단을 타고 흔들리는 가락은 삶의 고단함을 흥으로 달구어 올린다
장단을 타고 흔들리는 가락은 삶의 고단함을 흥으로 달구어 올린다
  • 미래한국
  • 승인 2009.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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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돌아 흐르는 들판의 소리 - 나주(羅州)

미래한국이 338호부터 매거진 판형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신문 형태로 게재된 기사 중 호평을 받았던 내용을 발췌해 <다시보는 미래한국>으로 소개한다. <Beautiful Korea 류우익의 국토기행><역사를 움직인 기도><시대를 보는 눈> 그리고 특색 있는 기사를 다룬다.

영산강(榮山江)이라는 이름에는 어딘지 가슴 설레는 정취가 녹아 있다. 강을 오르내리는 범선이나 발동기 달린 통통배나, 아니면 노로 젓는 작은 목선이라도 각기 실어 나르는 사연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다른 사람들이 기억해주지 않아도 ‘나 여기 있소’라고 소리치지 않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거기서 크고 작은 사연들을 엮어가면서 산다. 그 삶의 애환을 풀어낸 것이 곧 소리다. 그리하여 영산강이 펼쳐놓은 들판에는 언덕이 물결치고 강물이 흐르듯이 땅의 숨결에 화합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있다.

나직나직한 야산들을 이리저리 흩뿌려놓고, 천연덕스럽게 휘감아 흘러나가는 강줄기의 자태에는 열두 가지 판소리의 일곱 장단이 다 녹아 있다. 사람들은 G선상의 아리아를 말하지만, 나는 느린 장단의 진양이 띠는 비조(?調)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중머리, 중중머리의 3박4각에 실린 밝고 화려한 장단은 서양음악이 넘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감정의 변화를 실어 나른다.

잦은모리, 휘몰이의 빠른 속도와 몰아치는 긴박감은 여기 속 깊은 사람들의 깊은 곳에서 끓어 솟구치는 열정이다. 그리고 엇중머리와 엇모리야말로 살갑게 어깃장 놓는 이 지방 특유의 매력을 한껏 안겨준다. 마치 하도를 벗어나 짐짓 틀을 깨는 듯이 흐르다가 다시 새로운 유로를 얻어 들판의 균형을 바로잡아 나가는 강물처럼.

돌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들과 산에 기대고 엎딘 마을들이 어울려 춤을 춘다. 밀고, 달고, 맺고, 푸는 장단을 타고 흔들리는 가락은 삶의 고단함을 흥으로 달구어 올린다. 그리하여 거침없는 소리의 세계가 펼쳐지면 나주들의 아기자기한 모습은 이내 포근한 어머니 가슴이 된다.

그것은 일망무제로 시원한 김제들이나 김해들과는 다르다. 남도 사투리 아니고는 소리의 사설로 어림없듯이, 감치고 돌아 능청떠는 이곳 사람들의 삶의 모양새 또한 맛깔스럽기로 달리 비할 데 없다.

남도로 가는 길이면 황토 천릿길이라, 몇날 며칠을 두고 세상을 두루 살피며 걸어서 가는 것이 제격이리라. 그럴 팔자가 못 된다는 엄살로 비행기를 탔더니, 한 시간이 채 안 걸려서 광주비행장에 내릴 수 있었다. 그놈의 단발령만 아니었어도 지금 이 비행장이 나주들판 어디쯤에 있을 것 아닌가?

아니, 도청이나 비행장이나 목포-무안으로 옮겨갈 일도 없었을지 모르지. 전라도면 전주와 나주가 아닌가 말이다. 이런 궁상맞은 생각을 흥얼거리면서 출구를 나서는데 안 교수가 반긴다. “이 교수가 있었어야 하는데요.” 자신도 객지라는 겸손이다. “광주가 근무지니 여기도 향리가 아닌가, 이 사람아”.

먼저 영산포로 갔다. 나주가 종로라면 영산포는 한강나루터다. 나주에서 영암, 강진으로, 그리고 목포로 오가려면 이 나루터를 건너야 했다. 서남해에서 들어오는 바닷배들이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왔고, 그 중에는 흑산도에서 들어오는 홍어배도 적잖았다.

▲ 나주역

그래서 영산포 장은 농산물과 해산물, 공산품이 한데 모였다가 바뀌고 흩어져 가는 큰 장이었다. 일제는 이 나루터에 그들의 포구,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였다. 곡물을 내어가고 공산품을 풀어먹이는 수탈의 거점으로 영산강 유역을 몽땅 장악할 수 있는 참으로 야무진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선창 쪽에는 지금도 홍어 도소매상이 즐비하다. 그러나 거래되는 홍어는 예전처럼 흑산도에서 잡아온 것이 아니라 칠레에서 수입한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썰렁한 거리가 더욱 을씨년스럽게 비어 보였다.

가게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숙성한다’고 써 붙인 것은 앞서간 시대를 뒤쫓아 가기 위한 전통의 안간힘이렷다. 한낮에 홍탁을 곁들여 점심을 하고 나니 속이 울렁이고 머리도 어지럽다. 빈속의 쓰림인가, 영산포의 연민인가.

나주로 들어가기 전에 영산강 본줄기를 돌아보기로 했다. 강을 보는 것이 곧 들을 보는 것이요, 강의 흐름에서 고장의 내력을 살피는 것이니, 차를 달리면서라도 영산강을 보지 않고서야 어찌 나주를 본다 하겠는가.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판을 가로질러 월출산 자락을 한바퀴 돌고, 지남들 지나 상대포로 내달았다.

여기서 배타고 왕인박사(?仁博士)는 일본으로, 최치원 선생은 중국으로 떠났단다. 강이 어찌 저만 혼자 흐르겠는가. 물길 따라 홍어, 소금에 쌀과 포목을 실어 나르고 또한 사람을 실어 나르니, 이 고을 저 고장을 서로 잇고 바깥 세상으로 여는 것이 아닌가?

병든 영산강을 살리기 위한 진맥과 처방으로 “영산강 3백 50리”를 발로 썼다는 지리교사 김경수 씨는 영산강에 다시 배를 운항시키자는 제안이 뜬금없는 내용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지금도 이 지방 어디에서 향토사랑 일념으로 묵묵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뜻 맞는 이들을 모아 남도문화의 속살을 살피고 돌아다닐 것이다. 이런 지리학도가 있다는 것은 참 고맙고 든든한 일이다.

왕인박사 유적지 조성공사가 한창인 곳을 지나니, 수신정(修身亭) 앞 박사의 출생지로 추정된다는 빈터에는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 놀고 있었다. 향토연구가들의 명승지가 된 구림마을에 들렀다. 교사(校舍)를 개조한 도기센터에서 손자국이 유난히 깊은 옹기 한 점을 사서 안는데, 동행은 야속하게도 갈 길을 재촉한다.

차 속에서 안 교수는 연신 고지도를 내보이면서 이 지방 간척의 역사를 설명한다. “지명에 만(灣)이 붙은 곳은 바다였습니다. 광탄에서 몽탄까지 영산강 본류 일대의 낮은 곳은 다 개펄이거나 물난리가 잦은 감조구역(感潮區域)이었고요. 조선 초 15세기 경부터 꾸준히 간척이 이루어졌지요. 일제 때는 앞선 기술로 해서 하천직강공사를 겸한 간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요.”

“안 교수, 자네도 설마 그게 근대화라고 보고 있는 건 아닐 테지? 틈나는 대로 동척(東拓)의 공간적 네트워크를 한번 복원해보지 않겠나?” 차창 밖에는 석양을 가린 구름이 검붉게 타고 있었다.

우거진 갈대 너머로 해 넘어가는 영산호변을 걸으면서 우리는 먼발치로 도청이 옮겨 올 것이라는 남악산 신도시 공사현장을 바라보았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안 교수가 ‘하구언’이 ‘하구뚝’으로 된 내력을 일러주었다. 높은 분이 언(堰)자를 언짢아하는 바람에 그리됐다고. 우리는 같이 웃었다. 아마도 서로 다르거나 또는 같은 의미로.

남도한정식의 별미는 삭힌 홍어와 묵은 김치 그리고 삶은 돼지고기를 합친 삼합이다. 게장과 젓갈, 장아찌 같은 짭짤한 것들도 빼어 놓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음식을 정작 맛나게 하는 것은 벽에 걸린 한 폭의 수묵화와 상머리에서 건네지는 몇 마디 정 묻은 말이다.

맛나고 정나게 사는 문화를 2천년 동안 가꾸어온 고을의 속내를 어찌 하루 이틀에 알까마는, 애달프게도 사람이 떠나가고 있다고 했다. 70년대 중반에 24만이나 되었던 나주시 인구가 지금은 겨우 10만이란다. 그 때만 해도 광주 인구의 절반은 되었었지.

텅 빈 여관방에 달랑 이부자리 하나 깔고 누우니 허허롭기가 그지없다. 들판 한가운데에 홀로 선 느낌이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광주, 목포에서 불어오고, 서울에서, 동경에서, 상해에서 불어온다. 칠레에서도 불어오고, 미국에서도 물론 불어온다. 거세어지는 바람에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다.

길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강물은 여전히 유장하게 흐르고, 낙토의 흙냄새도 변함없이 푸근하지만, 바람 따라 사람들이 떠나가면서부터는 남은이들도 말이 없어졌다.

나주의 말 수가 줄어든 것은 근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마한의 옛 땅으로 일찍이 해상세력 왕건(?建)과 손을 잡고 견훤을 물리침으로써 고려의 국기를 다진 나주는 12목의 하나로 어향(御鄕)이라 추앙받았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목(牧)과 현(縣)을 오르내리긴 했지만 서남해안지방 전역에 대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만은 놓지 않았다.

그러나 한말에 끝까지 관군 편에 서서 동학농민혁명을 물리친 후로는 인근 지방으로부터 고립되기도 하였고, 단발령에 저항한 다음 해(1896)에는 결국 관찰도를 광주로 넘겨주고 만다. 이어 하운(河運)의 몫이 철도와 도로교통으로 넘어가면서 하항(河港)으로서 나주의 세는 본격적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당장 농촌중심지로서의 위치까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주곡인 쌀과 보리를 생산하는 호남의 곡창이요, 나주배의 본고장이며, 감, 복숭아, 포도, 수박이 풍성히 나고, 황토 무와 배추는 지금도 가락시장의 상품이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이 낸 농사터라지만 농업이 천하지대본의 자리를 상공업에 내어주면서부터는 대세를 거스를 방도가 없었다. 그나마 이제는 농산물 시장까지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른 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 전에 나주 들판을 둘러봤다. 여전히 풍성한 느낌을 주는 것은 계절과 날씨 덕이렷다.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맘먹고 찾아간 나주역에서 나는 잠시 가벼운 충격에 휩싸였다. 기차가 서지 않는 역전(驛前) 광장에서는 벼를 널어 말리고 있었다.

▲ 나주들판

크지 않았지만 반듯한 역사(驛舍) 앞에 그 역사만큼이나 가지런하게 펼쳐 널린 벼의 그 밝은 노란색은 내가 일찍이 보지 못한 색이었다. 그것은 일견 평온한, 역시 말이 없으나 매우 충격적인 역사의 시위현장이었다.

길섶 안내판은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조선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 간의 충돌이었음을 적고 있다. 이 나주역에 기차가 설 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날을 기약하자.

이어서 찾아간 금성관(錦城館)에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나주시의회에서 쓴다는 허연 건물이 나주의 역사이자 얼굴이라고 할 객사의 웅자를 가로 막고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설핏 경복궁을 가리고 막아섰던 구 총독부 건물을 연상하였다.

일제 때 악의적으로 세웠든, 해방 후에 정신없이 달아냈든, 저 볼품없는 건물이 저기 서 있는 한, 이 고도에 자존심은 없다. 건물 주위는 몇 자씩이나 파헤쳐진 채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무얼 찾는지 모르나 먼저 자존심부터 되찾아야 할 텐데.

김종순 학예연구사, 나주곰탕 맛있습디다.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 보다 옹관묘 생각이 더 많이 나네요. 이 담엔 부시장, 이 교수, 안 교수, 박 군까지 내아(內衙) 마루에 다 모여 앉아 나주배 성분연구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좀 알아보십시다. 혹시 프렌치 패러독스에 버금가는 나주 패러독스가 거기서 나올지 압니까? 영산강에 다시 배 띄우고 소리판을 아우르는 길은 어쩌면 거기 어디쯤에도 있을 것 같은데요. / 미래한국 71호 (2003.11.2.)

류우익 서울대 교수(지리학)
세계지리학연합회 사무총장·청와대 대통령실장·본지 편집위원(1기)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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