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중국 국경에 가다
[르포] 중국 국경에 가다
  • 미래한국
  • 승인 2009.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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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선교의 최전선에서는 지금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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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북한의 국경지역에는 국경을 몰래 넘어온 북한의 탈북주민들과 돈벌이를 위해 중국을 방문한 북한 여행객들이 중국의 한족 및 조선족들과 뒤섞여 살고 있다. 처지는 달라도 탈북민들이나 북한 여행객들이의 하루하루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다. 중국어를 할 줄 몰라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고 돈이 없어 거의 노숙자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붙잡힐지 모른다는 탈북민들의 불안한 심정이나 중국여행을 오려고 진 빚을 갚기 전에는 조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북한 여행객들의 초조한 심정은 ‘오십보 백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중국 국경도시에서는 이들을 둘러싸고 은밀한 선교활동들이 펼쳐지고 있다. 이 활동들은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벅찬 감동을 주기도 한다. <미래한국>은 11월 말 중국 국경도시 지역, 그 ‘영적 전쟁’의 현장을 취재했다.

현재 중국에는 탈북민들이 다수 살고 있다. 항간에는 중국 내 탈북민 규모가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한 규모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들 외에도 중국 동북지역을 헤매고 있는 북한주민들은 북한으로부터 여행 허가를 받고 공식적으로 중국에 온 이들이다. 이들 역시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현지의 한 한국 선교사는 탈북민을 제외한 단동지역의 북한 거류민이 매달 평균 3,000명에 이른다고 예상했다.

멀리 대련에서 단동, 심양, 장춘, 길림, 연길, 도문, 훈춘에 이르는 중국 동북지역의 국경도시에는 많은 북한사람들로 북적인다. 단동에서 만난 한 선교사는 “북한과 맞닿은 중국 국경도시는 치열한 영적 전쟁터지요. 북한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지만 오히려 보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의 한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로서 4년째 사역을 하고 있다. 단동 중심부에 조그만 상점을 경영하면서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서 살고 있지만 그의 실제 목표는 선교활동에 있다.

이 선교사는 주로 북한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들으면서 돕고 있다.

말하자면 구제선교를 하고 있는 셈이다. 식품과 의류 그리고 의약품 등을 공급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면 장사 밑천까지도 제공한다.


일대일 선교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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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한국의 대표적 기독교 기관과 교회들이 중심이 돼 중국 현지에서 북한사람들을 10여명씩 모아 선교사로 양성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된 적이 있다. 양성된 북한 선교사를 북한으로 다시 들여보낸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지만 초반에 중국 공안에 의해 조직이 발각되면서 선교사 양성 활동은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그 후 북한사람들을 집단으로 선교사 양성하는 위험한 프로그램은 없어졌지만 북한사람들을 향한 선교 프로그램은 중단되지 않고 꾸준히 시도돼 왔다. 그중에 가장 성과를 거둔 방법이 바로 일대일 양육이다. 집단 양육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순분자의 잠입이나 고발을 예방하고 신앙고백을 끌어내는 개인별 성경공부가 지금 북한선교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에는 한국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영국 등에서 온 약 300여 명의 선교사들이 ‘복음의 전사’로 나서고 있다. 이들은 북한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고 한다. 현지인의 소개로 직접 만나기도 하고 대학 강사로서 영어공부 과정을 통해 접하기도 하며 비즈니스맨으로서 교류하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북한사람들을 순수하게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경계하는 또 다른 집단의 활동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국경지역을 감시하는 중국변방대나 공안들이며 또 북한 보위부나 안전부 사람들이다. 불법적인 종교 활동을 제재하기 위한 활동이지만 북한 보위대원들은 탈북민 색출이나 탈법하는 북한여행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그물’을 던지고 있다. 이들에게 붙들린 북한사람들은 중국의 협조로 강제 북송되는 절차를 밟게 된다.

최근 탈북민들에 관한 처리는 중국변방대의 관할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십자가 세워진 집을 찾아

중국에 와 있는 탈북민들이나 북한여행객들 대부분은 다급하고 비참한 처지에 몰려 있으며 생존하기 위해 몸무림 친다. 그러나 이들이 도움을 받을 기회는 많지 않다.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현지 중국 사람들의 배려를 기대하지만 이들의 수도 적지 않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의 반응은 무덤덤할 수 밖에 없다. 조선족들마저 이들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조차 먹고사는 문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십자가가 세워진 교회를 찾아 나선다. 북한사람으로서 기독교 선교사를 만나거나 교회를 찾아가면 엄중한 처벌을 각오해야 한다는 교육을 북한의 도당위원회에서 수도 없이 받았지만, 어렵고 힘들 때는 중국에서 ‘십자가가 세워진 집’(교회)을 찾으면 산다는 말이 적지 않게 떠돌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교회가 이들을 도와주지 않는다. 북한사람을 돕다가 공안에 적발돼 낭패를 본 경우가 적지 않아 중국의 삼자교회 목사들은 소극적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욕을 하며 북한사람들을 쫓아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들은 북한 선교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현지인들과 함께 사역을 한다. 현지 조력자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북한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선교사들에게 전해준다. 대개 조선족 출신의 크리스천들이며 때로 한족인 경우도 있다.

북한사람들이 받는 기본적인 도움은 조건 없이 편안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받는 것이다. 집단 합숙소 같은 여인숙에서 지낼 수도 있지만 1일 숙박료 20위안(한국 돈 3500원)을 아낄 수만 있다면 그들은 노숙이라도 하고 싶어할 것이다. 버스비를 아끼려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닌다는 그들의 절박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선교사들은 이들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돕는다. 두 사람 이상을 한꺼번에 상대하지 않는다. 북한사람들은 누구에게도 노출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때마침 서울에서 파송된 한 선교사(49. 여)의 소개로 북한에서 왔다는 60대 할머니를 단동 중심부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이 선교사와 함께 같은 아파트에서 보름째 기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편안한 잠자리와 넉넉한 음식이 제공된다. 게다가 위성 TV도 시청할 수 있다.

이 할머니는 출신 성분이 좋아 지난 달 쉽게 여행허가를 받았다지만, 실제로는 빚을 얻어 보위부 담당자에게 500달러의 뇌물을 주고 여행허가증에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500달러면 화폐개혁 전의 북한 돈으로 100만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제 귀국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연하다는 것이다. 만약 빚을 못 갚으면 추운 겨울에 가족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야 할 절박한 형편이었는데 이제는 시름을 놓게 되었다고 했다. 선교사가 이 할머니에게 장사 밑천을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한 조선족 동역자의 안내로 이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자신의 어머니가 해방 전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당시 어머니가 부르던 찬송가 가락을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찬송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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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는 할머니에게 먼저 위성방송을 시청하게 하고 남한을 비롯해 바깥 세계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보게 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의 어머니께서 즐겨 읽으시던 책입니다” 하고 성경책을 건네주었더니 하루 종일 책을 뒤지며 읽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태초에 천지가 창조된 이야기를 비롯해 노아의 홍수, 아브라함의 가족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더니 빠르게 이해하며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까?”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0계명은 북한의 10대강령과 너무나 흡사하다며 주체사상의 체계가 성경책에서 나왔다는 선교사의 얘기를 심각하게 들었다고 한다.

이후의 전도 과정은 자연스러웠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먼저 신앙고백을 하는 기도문을 써주고 기도하는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할머니는 기도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성경을 읽는 기쁨과 기도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다음 주가 되면 북한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도 받을 계획이라고 한다. 

“북한사람들은 대체로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속도가 아주 빨라요. 주체사상의 체계가 성경의 이론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나서는 그들은 그렇게 평안해할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일생에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안식을 비로소 누린다는 고백을 그들로부터 듣곤 하지요”

이 선교사는 행복해 하는 북한사람들을 볼 때마다 목회자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선교사로서 북한에 들어가기를 기대하지 않아요.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진정으로 나를 도와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날마다 평안으로 인도해주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심령 깊이 체험했다면, 어떤 형태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북한 땅에 희망을 퍼날라

단동에서 연길로 가는 야간 열차에서 50대 조선족 부부를 만났다. 같은 침대칸에서 22시간의 지루한 여행을 하다 보니 개인 신상에 관한 얘기도 털어놓게 됐다. 이들은 현직 공무원 부부였다. 30년이 넘는 공무원 생활을 통해 탈북민이나 북한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가끔 있었다고 했다. 그들이 만난 북한사람들의 형편은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했다고 한다. 같은 동포로서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도왔고 그들이 도와준 탈북민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 남한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2년 전만 해도 이들 부부는 부업으로 소위 보따리장수가 돼 북한 국경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주로 북한에서 채취해온 ‘송이버섯’을 연변시장에 파는 일로 돈벌이를 했다. 송이 철이 되면 북한에 들어가 북한사람들과 직접 거래를 했는데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북한경비대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했다. 부인은 북한군인들 사이에 ‘어머니’로 통했다고 한다. 아들 같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 즉 담배, 혁대, 양말, 구두 같은 생필품을 사다 주었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이 부인은 북한의 한 마을에 집을 지어 거래처로 삼고 중국 물건을 북한에 팔거나 북한의 농산물을 중국으로 들여보내는 중간상 역할을 했다. 불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소규모의 원시적인 거래를 위해 부인은 국경 출입처마다 통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두었다. 이런 작업에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북한과 연결되는 이 통로는 그동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이 통로를 통해 북한과 중국에 있는 북한사람들이 서로 통지를 할 수 있었고 필요한 물자 전달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탈북의 기회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남한의 친지들이 전해주는 상당한 금액의 돈을 송금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또 아주 드문 일이지만 복음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성경 ‘밀수’가 이루어졌다. 또 북한에 있는 친지들에게 중국제 휴대폰을 들여보내는 일도 했다고 한다. 긴급한 일이 발생되었을 때 휴대폰보다 편리한 비상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이 조선족 부부야말로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깜깜한 북한 땅에 희망을 전해준 고마운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처럼 밀폐된 북한에 자유로운 세상의 공기를 전하는 역할을 이 부부보다 그 누가 잘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 일도 국경감시가 더 엄중하게 강화되면서 최근에는 그만두고 말았다고 한다.


목숨을 건 복음 전파

중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중소도시인 연길은 북한사람들에게는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생존의 현장이다. 탈북민들과 북한 여행객들이 저마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곳에서 6년째 북한선교를 하는 정숙희 선교사(가명. 50)를 만났다. 교회 전도사로 사역해온 정 선교사는 2000년 여름 중국에 처음으로 단기선교를 오면서 인생의 진로가 바뀌고 말았다.

처음에는 연길 북쪽의 한 농촌마을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선교를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무렵 정 선교사는 몸이 많이 아파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폐와 임파선에 암이 발병했고 그것도 말기라는 선고를 받았다. 치료 가능성은 1%도 없었다. 그러나 여섯 번의 항암치료를 받고 머리털이 모두 빠진 상태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중국 땅으로 달려왔다. 2002년 5월이었다.

정 선교사는 2003년 후반까지 8곳에 교회를 개척하는 왕성한 선교활동을 하다가 다음 해 연길을 방문하여 4박 5일간 가정 집회를 가졌다. 이때 회령 지역의 북한 대학생 3명이 농어촌 봉사기간을 틈타서 중국으로 넘어와 느닷없이 기독교 복음을 듣고 싶다고 어느 여자 집사에게 요청을 해왔다. 집회 도중에 이 전갈을 받은 정 선교사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하나님의 뜻으로 순종하기로 하고 북에서 온 대학생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한 학생이 연길에 온 까닭을 설명했다. 자신의 할머니가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복음에 대해 들려주었는데 그 진리가 무엇인지 내용이 궁금해 왔다고 했다. 정 선교사는 복음의 진리를 그들에게 전해줬고 그들은 뜨겁게 복음을 받아들였다. 한 학생은 말씀을 들은 후에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진출할 때 이 복음을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의 은혜 받는 모습에 정 선교사 자신도 감격하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북한선교에 나서게 됐다고 한다.

이 무렵 정 선교사에게는 놀라운 일이 나타났다. 북한선교를 결심하면서 암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모든 앞길을 주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그즈음 정 선교사는 잠시 귀국을 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이 때 의사로부터 암이 없어졌다는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정 선교사는 이것이 북한선교를 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남편과 자녀들의 동의를 얻어 본격적으로 북한선교에 나서게 됐다. 정 선교사는 철저한 일대일 성경공부 과정을 통해 북한 사람들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역에 주력해 왔다. 그동안 마흔 명이나 되는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해 다시 북으로 들여보내는 위업을 이뤄냈다. 그러나 사역은 순탄치 않았다. 보위부 첩자로부터 협박당하는 일도 있었고 함께 공부하던 탈북민들이 공안에게 붙들려가는 일도 당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이 사역을 지켜주셨다고 그는 증언했다.

“북한 선교에서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북한사람의 인격과 자존심을 존중하는 것이고 또 그들의 신뢰를 얻는 일입니다. 이것을 위해 참고 배려하고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하지요. 같은 인간으로서 감정의 바닥 선까지 내려가지 않고서는 신뢰를 끌어낼 수 없거든요.”

북한사람들의 변화는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나타난다. 노동당과 김정일에 대한 정치적 세뇌가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닐 것이다. 위성방송을 같이 시청하면서 며칠만 지나면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것이 어찌된 것인가?”라고 스스로 의구심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변화의 조짐이라고 한다. 

정 선교사는 한국교회들에 간곡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아무쪼록 한국교회가 북한선교에 대한 담대함을 가지고 이곳 중국에서 북한사람들을 위한 일대일 양육 프로그램에 참여해주기를 바랍니다. 만약 교회마다 이 사역을 전개해 나간다면 훨씬 더 많은 북한 사람들이 복음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복음으로 통일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am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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