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최고봉은 새마을운동, 제2의 운동을 일으키자”
“한류의 최고봉은 새마을운동, 제2의 운동을 일으키자”
  • 미래한국
  • 승인 2010.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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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호선 전 농협중앙회 회장
▲ 한호선 전 농협중앙회 회장

오늘날 중국과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각국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 배우기 열풍이 일고 있다. 새마을운동이 이제 국제적 운동으로서 한류(韓?)의 대표적 아이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0년 좌파정권 하에서 군사독재의 잔재로 폄하되어온 새마을운동이 어떻게 세계에서 주목받는 개혁운동이 된 것일까. <미래한국>은 1972년부터 79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며 청와대 새마을담당관을 역임한 한호선(74. 韓灝鮮) 전 농협중앙회 회장을 만나 새마을운동의 태동과 전개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한 전 회장은 현재 3만여명의 회원을 가진 사단법인 농협동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지는 지난 호(358호. 12월9일자)에서 중국 농촌 현지 르포를 통해 현재 중국에서 한창 진행 중인 농촌개혁이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한호선 농협동호인회 회장은 “요즘 새마을운동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꽤 나타나고 있다”며 입을 열었다. 특히 “중국이나 아프리카 등지를 다니며 새마을운동을 팔아먹는 사이비 지도자들 때문에 새마을운동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으며, 이들이 새마을운동을 과장시키거나 잘못된 강연으로 자기를 선전하는 돈벌이나 하며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말은 새마을운동이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아직도 생생한 현재진행형의 농촌개혁운동임을 알려주는 증거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계기는 무엇이고 이 운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한 회장의 얘기를 들어본다.

대통령의 가슴에서 시작된 운동

한 회장은 “새마을운동은 누가 뭐래도 박정희 대통령의 가슴에서 시작된 일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통령은 뼈저린 가난을 체험했기에 우리나라를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일생의 염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염원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다.

한 회장에 의하면 박 대통령의 꿈을 새마을운동이라는 모양으로 움트게 한 실제적인 못자리는 당시 농업협동조합이었다고 한다. 1940년대 후반 처음 발족된 구(舊) 농업협동조합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사회주의 운동으로 치부됨으로써 근대적 농협으로의 발전이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농촌개발은 정부의 통치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농민 자신의 의지를 개발하여야 한다면서 그 수단으로서 농협을 지목했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을 지원하는 방안으로 구 농협을 농업은행과 통합하고, 1961년 8월 15일 마침내 ‘종합농협’을 발족했다.

1968년 무렵 농협중앙회 조직지도과장이던 한 회장은 농협의 지역조직을 면단위로 합병시키는 일을 성공시켰고 이와 함께 고리대금의 부채를 덜어주기 위해 신용조합을 세우고 생필품 물가의 안정을 위해 연쇄점을 설립하는 일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이무렵 농림부는 1970년 초 농가소득 증대 특별사업을 추진하면서 독농가의 성공사례를 발표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바로 이 자리에 박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이때 채소재배로 농가소득을 크게 올린 조치원의 농민 하사용 씨가 성공사례를 발표했는데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눈물을 훔치며 “찌든 가난을 박차고 일어난 저런 사람을 길러야 한다. 하사용 씨와 같은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 지시에 따라 당시 농협대학에 농촌 지도자 양성과정을 의뢰하게 되었고 이 과정은 이후 ‘독농가연수원’으로 발전하게 하게 되면서 새마을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당시 ‘독농가(篤農家)’라 함은 농가에 농업기술을 지도해주는 모범 농가를 일컫는 말이다.

그 무렵 정부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국적인 지역사회개발사업을 벌였지만 전시행정에 그칠 수 밖에 없었고 종합정책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조직이 ‘이동(里?)개발사업위원회’였다. 이 명칭이 이후 새마을운동이라는 말로 바꾸어져 불리기 시작했고 거창한 역사적 운동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때가 1971년 말이었다.

박 대통령의 농촌개혁에 대한 의지가 불타고 있었지만 청와대에는 대통령의 뜻을 보필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 홍성철, 정종택 등 수석비서관들이 직접 농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 상황을 파악하려고 나섰다. 이 과정에서 변화의 실제적 주역인 몇몇 사람을 찾게 되었는데 그들은 바로 연쇄점 운동을 일으키고 있던 한호선 과장, 이스라엘의 농촌 변화운동을 강연하고 다니던 유태영 교수, 그리고 송원종 군수 등이었다.

당시 농협중앙회에서 일하고 있던 한호선 과장은 농협 사업을 브리핑하라는 지시를 받고 청와대로 차출이 돼 농촌개혁을 위한 담당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가 1972년 3월이었고 당시 부서 명칭이 새마을운동 담당관실이었다.

새마을운동을 준비하던 초기 멤버로 한 회장은 교육담당, 유태영 교수는 홍보담당 그리고 송원종 군수는 내무 행정을 맡았다. 그리고 농협에서 맡았던 독농가연수원은 농업진흥청으로 장소를 이전해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새롭게 출발했고 초대 원장은 김준 교수가 맡았다.

이와 함께 내무부는 초기 새마을운동을 마을환경 가꾸기로 시작했다. 이동개발사업위원회를 통해 1973년부터 전국의 농촌 마을마다 시멘트 400포와 철근 1.5톤씩을 공급하여 마을환경 개선사업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마을환경 개선사업의 운영은 마을마다 자율에 맡겨졌다. 행정을 맡은 이장과 함께 자원봉사직으로 개발위원장을 두어 주민들의 자발적 의사로 마을을 개량하고 가꾸어 나가도록 했다. 개발위원장을 비롯한 마을의 지도자들은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통해 교육받도록 의무화되었고 군단위로 새마을담당 부군수를 두어 새마을운동에 관한 모든 행정과 재정을 도맡게 했다. 그리하여 마을마다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지붕이 개량되고 흙길이 사라지고 시멘트 포장길이 뚫렸다.

마을간 경쟁 구도 조성해 자립심 키워

▲ 새마을 운동 현장 지도를 하는 박정희 대통령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밤낮없이 새마을운동을 생각하며 정리된 생각을 메모해 지시하곤 했다. 그러나 비록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창안하고 추진한다고는 하지만 마을 주민이 스스로 참여해 결실과 보람을 얻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측면을 늘 염두에 두었다. 이에 마을과 마을이 경쟁하는 구도에서 마을 주민 모두가 스스로 참여하게 했으며 성공한 마을에는 상을 내렸다.

또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경제 보고와는 크게 관계가 없어 보이는 새마을운동의 성공사례 보고가 있었고 지도자에 대한 훈장 수여와 성금 전달이 있었다. 모든 장관들이 보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시골 마을에서 올라온 새마을지도자를 높이고 칭찬을 하며 박수를 보냈다. 대통령과 1대1로 대화하는 모습은 전국의 농촌지도자들을 흥분시키고 그 자리를 선망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새마을 노래가 퍼져가며 농촌의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새마을부녀회가 앞장서 농부들을 나태하게 만들고 패배의식에 빠지게 하던 부정적 생활방식을 일소하는 운동을 일으켰고 투전판, 노름판이 사라지고 술에 빠져 살던 농부들이 새로운 활기를 찾아갔다. 뿐만 아니라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 지도이념에 따라 새마을운동은 농촌개혁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국민정신운동으로 승화되어 각 분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새마을전국대회를 통해 더욱 촉진됐고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로도 새마을운동이 파급되었다. 거리질서를 지키고 하수구를 청소하고 거리에 화분을 설치하는 등 도시환경을 개선하는 일로 번져나갔다. 또 상공회의소가 나서서 각 기업과 공장에도 새마을운동을 적용시켰다. 경영주 자신이 ‘종업원을 가족같이, 공장을 내 집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솔선수범하게 했다. ‘국적 있는 교육’을 모토로 학교 새마을운동도 전개됐고 군부대 새마을운동도 있었다. 새마을운동에 장병들을 참여시켜 환경 가꾸기, 나무심기, 돼지 기르기 등을 통해 자조, 자립을 훈련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거국적 정신개조 캠페인으로 발전

1974, 75년 무렵 새마을운동은 전국에 걸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 운동은 이제 농촌개혁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신을 개조하는 국민적 캠페인으로 발전되었고 가난과 후진성을 벗어나게 하는 거국적 몸부림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부는 새마을지도자연수과정에 사회 지도층을 참여시켰다. 사회지도자반을 만들어 장차관, 대학교수, 종교인, 법조인, 기업체 사장, 지역인사 등을 농촌지도자들과 함께 과정에 참여시킨 것이다. 농촌지도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새마을운동의 진실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게 했다.

당시 유신체제에 대항해 반체제운동을 일으켰던 천주교 인천교구의 김병상 신부는 새마을지도반에 참여하고 나서 ‘유신은 반대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찬성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한 회장은 “당시 박 대통령이 쏟아내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철학과 아이디어를 따라가기에 벅찼다”고 회고했다. 배고픔과 찌든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눈물겨운 몸부림을 대통령 혼자 감당해야 할 때였다고 한다.

한국을 개혁시키고 있는 새마을운동이 외신을 타고 알려지자 해외에서도 새마을운동을 알고 싶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한 회장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우리도 바쁜데 남을 가르쳐 줄 게 뭐가 있는가? 남의 걱정 말고 당신들이나 잘하시오”라고 했다.

새마을운동의 내용을 교과서로 만들고 영어로 번역해 전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도 이러한 말로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은 지도자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밤낮없이 골똘히 새마을운동을 생각하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이를 이해하고 따라주는 국민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런 조건이 주어진 국가가 아니면 새마을운동은 흉내만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교과서를 만든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회장은 새마을운동이야말로 국민정신개발운동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대한민국의 국운이 상승하는 역사적 기류에 맞춰 선진국으로 가는 국가와 국민의 틀을 만든 일대 사건이 새마을운동이라고 말했다.

당시 새마을운동의 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을 주장하고 이미 오래 전부터 실천해온 단체나 인사들이 없지 않았지만, 새마을운동은 그 모든 국가적 염원을 하나로 묶어 뜨거운 정신으로 용솟음치게 하여 전 국민을 교육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유사한 운동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한호선 회장은 주장했다. 아래는 한 회장과의 일문일답.

“10년간 유명무실해진 새마을운동, 제2의 물결을 일으키자”

-새마을운동이 성공하게 된 핵심적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보다 사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를 따르려는 지도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운동에 참여한 국민 구성원들의 공감과 자각이 새마을운동을 성공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새마을운동의 결과로 몇 가지 구체적 성과를 든다면.

“많은 성과들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주곡(主穀)의 자급자족을 완성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는 주곡인 쌀의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원조를 받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통일벼라는 쌀이 개발되었고 새마을운동을 통해 증산 운동을 벌임으로써 자급자족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 때가 1976년인데 이 해야말로 우리나라가 후진국을 벗어나는 역사적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 통일벼 밥맛에 대해 이런저런 소리가 들리자 대통령은 ‘우리가 언제부터 포시랍다(경상도 방언, 분에 넘치게 안락하다)고 밥맛을 따지는가?’라고 했지요.”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새마을운동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정부 주도의 새마을운동은 박 대통령의 서거로 1979년으로 마감됐지만 이후로는 민간 주도의 운동으로 지속되었지요. 당시 신군부의 주도세력인 권정달, 허문도, 허삼수 씨 등이 새마을운동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시도했고 결국 1980년에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가 만들어져 민간 주도의 운동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아래서 그런대로 새마을운동이 명맥을 이어갔다고 봅니다만 김대중 정부 때 북한에 국수공장이나 만들어주고 리어카나 공급하는 북한지원운동으로 전락했고 노무현 정부 때는 아주 유명무실하게 되고 말았지요.”

-앞으로 새마을운동은 어떻게 이어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최근 새마을운동이 녹색운동이니 CO2 감소운동이니 하며 정부시책을 홍보하는 일에 나서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국가 정체성을 회복하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서 그야말로 제2의 새마을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전 국민이 공감하고 알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열정을 용솟음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첫째는 광화문 광장에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동상을 세워 건국정신을 되살리고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크게 세워 후대가 그 애국정신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피부에 와 닿는 것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는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이 나라의 정체성, 국민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근본을 세우는 일입니다.

둘째는 한류의 원조요 정상으로서 새마을운동을 소개해야 합니다. 드라마다 음악이다 하여 한류가 나타나는 것도 좋지만, 후진국에서 벗어나게 한 국민운동으로서 새마을운동이 세계에서 유일한 성공사례이기 때문에 한류의 최고봉으로 세워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한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에게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훈장을 주고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민주화운동에 이바지했다고 친북인사까지 포상하는 세상인데, 정작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뼈저리도록 헌신한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외롭게 병상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김준 전 새마을원장과 같이 새마을 운동에 온몸과 재산을 바친 초기 지도자들을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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