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설립과 파괴 반복한 민주주의 유괴범”
“정당 설립과 파괴 반복한 민주주의 유괴범”
  • 미래한국
  • 승인 2010.01.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물탐구] 국민참여당 창당 중인 유시민 전복지부 장관
▲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

출판사 <북마크>에서 우리 사회 일반인들의 사회 및 정치 인식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인물들의 궤변적 논리를 비판하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 소개된 인물 비평을 요약, 발췌해 소개한다.  

“우리는 ‘고래를 삼킨 새우’가 될 것”

#FK2#2002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개혁국민정당(이하 개혁당) 창당을 주도한 유시민 씨의 일갈(一喝)이다. 이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이른바 구(舊) 동교동세력으로부터 후보지위 박탈을 위협받고 있었다. 노무현 후보는 2002년 5월 지방자치 선거에서 부산시장, 경남도지사, 울산시장 등 영남권에서 한 석도 얻지 못하면 후보를 사퇴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결과는 전패였다. 이에 박상천, 정균환 등은 노무현에 후보 사퇴를 요구했고, 이러한 여론이 민주당 내에서 급속히 세를 얻고 있었다.

유시민은 ‘다시 바리케이드를 치고 화염병을 들고 나서는 심정’이라며, 공식적으로 정치적 개입을 선언했다. 그 뒤 나온 것이 민주당에서 팽당한 노무현을 구하겠다며 개혁당을 창당한 것이다. ‘고래를 삼킨 새우가 되겠다’는 뜻은 몸집만 컸지, 국민의 지지를 잃은 민주당을작은 개혁당이 먹어 삼키겠다는 뜻이다.

개혁국민정당은 창당하자마자 무려 4만 명의 당비를 내는 진성 당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한나라당 출신의 김원웅 의원을 당대표로 영입하여 원내정당이 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당선되자마자 민주당이 아닌 개혁당을 찾아 유시민과 함께 축배를 들었다. 노무현의 당선 이후 유시민은 민주당 내의 친노세력인 신기남, 천정배, 정동영 그리고 영남민주화세력의 핵심인 이강철, 김두관 등과 함께 끊임없이 민주당 흔들기에 나섰다. 목표는 노무현 후보를 좌초시키려 했던 박상천, 정균환 등 구 동교동세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명분이었을 뿐, 실제로는 여당 전체를 친노세력으로 장악할 정치적 계략이었다.

2003년 4월 유시민은 개혁국민정당의 후보로 고양 덕양갑에 출마한다. 이 당시 유시민은 ‘절대 구태 정당인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는 없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워 개혁당 당원들의 지지를 받아냈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주당의 송영길, 정동영 등은 민주당 후보를 사퇴시키며, 개혁당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다. 개혁당의 당원들은 강력히 반발했지만 유시민은 특별히 해명하지 않고 유유히 당선되었다

그러다 유시민은 개혁당을 중심으로 한 친노신당 창당의 깃발을 내세웠고, 유시민이 움직일 때마다 민주당은 크게 흔들렸다. 특히 민주당 내의 신기남, 친노세력 내의 이강철의 활약이 돋보였다.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등 친노 언론들은 연일 민주당의 구태를 비판하며 신당 창당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나팔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급기야 2003년 8월 민주당은 크게 요동치며 2003년 9월 김근태, 이해찬, 문희상, 정동영, 신기남 등 42명은 민주당을 탈당 독립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이들 외에도 한나라당에서 이부영, 김부겸 등 5명이 탈당, 이들은 2004년 1월 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정치적 큰 도박을 감행했다.

이들이 노린 것은 2004년 총선이었다. 유시민은 이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하며 ‘민주당의 이름으로는 절대 영남권에서 당선될 수 없다’는 점을 선동하여 결국 신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은 곧바로 민주당을 탈당, 민주당은 재집권 1년 만에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유시민이 주도한 일련의 민주당 분당사태는 세계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정당 민주주의 파괴였다. 물론 1995년 정계에 복귀하며 민주당에서 분당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김대중 식 방식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분당 때의 민주당은 당시 야당이었다. 수법은 비슷했으나, 국민의 심판을 받기 전이었으므로 유시민의 정당 파괴와는 격이 달랐다. 유시민의 경우는 민주당 후보로 국민의 선택을 받은 노무현 대통령을 빼내 신당을 만들면서 여당을 야당으로 만들어버린 상식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방법을 택했다. 

개혁당 파괴하며 새우들의 눈물마저 빼앗은 유시민

여기까지는 당시의 언론보도만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법한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한 가지는 개혁당이다. 고래를 삼킬 새우가 되겠다는 개혁국민정당은 어떻게 되었을까?

2003년 10월 27일 유시민을 비롯한 구 개혁당 집행부는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전자투표를 감행한다. 안건은 ‘우리 당은 신당에 전원 참여한다. 참여 방법 및 전국당원대회 결과에 따른 법률적 절차 등은 전국상임위원회에 위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안건 자체가 위법이었다. 정당해산에 관한 안건은 무조건 전당대회에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안건을 올리면 통과가 될 가능성이 없으니 신당 참여를 안건으로 올려놓고, 그 방법까지 함께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불법으로 개혁당 해산을 선언한다. 이들의 횡포에 대해서 선관위는 개혁당 해산을 인정하지 않았고, 개혁당은 다수가 열린우리당으로 탈당한 뒤 2기 집행부체제로 유지되었다. 즉 유시민은 정당법까지 어겨가면서 개혁당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이에 실패했던 것이다.

유시민이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고래를 삼키겠다는 새우들의 정당 개혁당은 잊혀졌다. 이 과정에서 유시민은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유시민 세력이 떠난 개혁당을 살리기 위한 2기 집행부는 유시민이 개혁당의 자금을 유용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부친의 친일 의혹에는 묵묵부답

유시민의 정치적 위기가 또 한 번 찾아왔다. 브레이크뉴스에서는 유시민의 부친의 친일 의혹을 제기했고, 유시민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당시 정국은 친일파 청산 논란 속에, 열린우리당의 당의장 신기남 부친이 일본 헌병이었던 점이 드러나 사퇴하는 등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유시민 의원의 부친 유태우는 일제시대 만주 소학교에서 역사 훈도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에 유시민은 “1943년경 만주에서 소학교에 잠시 근무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소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브레이크뉴스가 도대체 무얼 근거로 제 선친이 일제 때 교사를 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근거를 확보한 것이 있으면 밝혀주기를 정중하게 요청합니다.”라며 반박했다.

그러나 브레이크뉴스 측에서는 경상북도 교육청으로부터 만주 소학교에서 훈도로 활동한 유태우라는 사람이 있는데 직계 가족이 아니면 확인해줄 수 없다는 증거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결국 이 문제도 유시민의 회피로 인해 더 이상 논란이 되지 못했다. 교육청에 전화 한 통만 하면 확인할 수 있는 문제를 그는 끝까지 외면했다. 

개혁당 파괴하고 만든 열린우리당 파괴에 앞장

유시민은 그 뒤 노무현 대통령의 지원 사격을 받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그의 장관 시절의 업적은 거의 없다. 그가 언론에 주목을 받은 것은 장관으로서의 임무 수행이 아니라 2006년부터 시작된 열린우리당의 대분열에 대한 입장이었다. 열린우리당은 잇따른 재보선에서 참패하면서 점점 침몰하고 있었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호남에서의 참패를 극복하기 위해 잔류한 민주당과의 통합에 골몰하고 있었다. 여기서 쟁점이 되었던 사안은 바로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 유시민의 태도였다.

유시민은 2007년 5월 22일 전격적으로 보건복지부 장관을 사퇴하여 당으로 돌아온다. 당에 복귀한 유시민은 열린우리당 당원들을 대상으로‘열린우리당의 정신을 승계하지 않는 신당에는 절대 참여하지 않겠다’라고 발언하여 당원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유시민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이해찬이 주도하여 열린우리당과 잔류 민주당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합당하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개혁당 때와 똑 같은 문제가 남게 된다. 열린우리당에서 합당을 결의할 전당대회가 제대로 치러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개혁당 때는 전당대회를 통한 결의가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한 유시민 세력이 전자투표라는 편법을 동원했으나 선관위로부터 무효 판결을 받았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전당대회를 열어 재적 대의원의 과반수가 출석하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2007년 8월 18일 고양 킨텍스에서 전당대회를 개최, 전격적으로 열린우리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의 합당을 결의한다. 이 과정에서도 유시민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동원하며 맹활약한다. 유시민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대선 출마 출정식을 열며, 자신을 지지하는 열린우리당 대의원들을 대거 모았다. 당시 8월 1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확인한 대의원 명부 5,374명이, 그 다음날 전당대회 직전에 5,200명으로 줄어드는데 최고위원회의는 개최되지도 않았다. 단 하루 사이에 대의원 174명이 사라졌는데 이를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최고위원회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참여 정족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체 대의원수를 전당대회 당일에 줄여버린 것이다.

개혁당 때도 열린우리당 때도 유시민에게 당원이란 당을 만들 때만 필요한 도구였지, 이들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다시 대통합민주신당 탈당 뒤, 신당 창당 공언

‘정치 폭력’으로 만들어진 대통합민주신당을 뒤로 하고 유시민은 대선 직후 또다시 이 당마저 탈당한다. 명분은 없었지만 다시 명분을 만들어냈다. 단지 총선을 앞두고 유시민 세력과 불편한 관계인 손학규가 당대표로 선출되자 전격적으로 탈당했다. 표면적으로라도 내세운 명분은 ‘현재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진보적 가치가 살아 숨 쉴 수 없어 진보정당을 창당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내세우는 진보적 가치는 주로 정당 민주화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당을 창당했다 파괴했고, 그 파괴의 산물로 만들어진 열린우리당도 파괴했고, 역시 그 산물로 창당된 대통합민주신당에서도 탈당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유시민은 다시 신당을 창당할 태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이후 친노세력은 급격히 부활했다. 그 상징 역시 유시민이다. 7월 15일자 CBS 여론조사 결과 유시민은 대선 후보로 박근혜(40%)에 이어 16.7%로 굳건히 2위를 지키고 있다. 현재의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보자면 박근혜의 대항마로 유시민이 거의 굳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2009년 7월 14일 정치컨설팅회사 E윈컴의 서울시장 후보 여론조사에서도 오세훈 현 시장(26.6%)에 이어 16.3%로 역시 2위를 지켰다.

이러한 유시민의 강한 지지세를 바탕으로 친노세력은 신당 창당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이를 주도하는 사람은 이병완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천호선 전 대변인이다. 이들은 이미 구체적인 창당 계획을 갖고 수시로 워크샵을 열고 있다. 이들의 스케줄은 2010년 지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유시민, 4번째 신당 창당 기도

현재까지 유시민의 입장은 유보이다. 같은 친노세력이라도 이미 민주당에 참여하고 있는 안희정 최고위원이나 한명숙 전 의원 등이 반대하고 있으며 탈당은 했지만 민주당에 오랜 뿌리를 두고 있는 이해찬 전 총리도 반대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이라는 것이 승리와 권력 쟁취라는 목적으로 창당된다는 것으로 볼 때 결국 창당의 열쇠는 유시민이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친노세력은 물론 민주당 내 그 누구도 유시민의 대중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만약 유시민의 지지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유시민이 대권 선언을 하며 신당 창당에 합류할 수 있다.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DJ도 아니고 호남도 아니다. 유시민을 지지도에서 누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는 유시민의 대항마를 찾기 어렵다.

유시민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 만약 이런 인물의 탄생이 늦어진다면 유시민은 2010년 지자체부터 또다시 정계의 태풍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