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하는 낙원 철원 대마리(?馬里)
긴장하는 낙원 철원 대마리(?馬里)
  • 미래한국
  • 승인 2010.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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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우익의 국토기행] ‘지뢰터져 죽어도 좋다’며 서약하고 개척한 민통선 풍요마을

답사는 보통 미리 생각해서 준비하고 떠나는 것이지만, 매사가 그렇듯이 때로는 불현듯 어디를 가보고 싶어지거나, 따로 정한 바도 없이 그냥 떠날 때도 있다.

북한핵을 둘러싼 안보 논쟁이 한창인 대선 막바지에 10년 전에 만난 ‘대마리 사람들’이 생각났다. 학생들과 세미나 하다가 우연히 읽은 책의 무대를 찾아갔다가, 충격을 받고 마음을 다잡은 적이 있는 곳이다.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궁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고 초조해지기까지 하다.

이럴 땐 경원선 기차가 신탄리까지 가다 마는 것이 아쉽고, 그렇기 때문에 더 철원이라는 실감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철원 평야의 작은 마을은 적어도 외관상은 여전했다.

민북마을로 들어가는 신작로 어귀에 있던 초소가 저만치 안으로 들어가 있고, 추상 같던 검문이 약식으로 이루어지긴 하지만 여전히 긴장이 감도는 민통선 마을이다. 마을입구의 개척비는 예전처럼 당당한데, 동네 가운데를 관통하는 길은 예전보다는 좀 복잡해진 대로 시원하게 널찍하다.

해방 당시 38선 이북이었다가 휴전선이 북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이남 땅이 된 곳이다. 제대군인들이 민통선 이북의 폐허가 된 땅을 ‘지뢰 터져서 죽어도 좋다’고 서약하고 개척했다고 했다.

1967년 처음 입주할 때엔 150세대였던 것이 그동안 근 아흔 세대나 늘어났다. 적잖은 사람들이 드나들기도 했지만 자식들이 분가하여 새 가구를 꾸민 것이다. 철책을 마주보면서 버려진 땅, 되찾은 땅을 다시 옥토로 일궈낸 대마리 개척민들은 순전히 피와 땀과 눈물로 이 동떨어진 북녘 마을을 전국 최고의 농촌으로 만들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지역감정으로 몸살을 앓을 때에도 팔도 사람들이 흔연히 어울려 남 먼저 경지정리하고, 영농기계화에도 앞장섰다. 젊은이들은 도시의 유혹을 뿌리치고 마을 발전에 앞장섰고, 군부대와 군청이라는 이중의 행정체계에도 불평없이 단합했다.

좀은 거칠지만 바르고 성실한 대마리 사람들, 지뢰에 팔다리를 잃었고, 남파간첩을 얼씬 못하게 했지만, 아픈 가슴으로 술 마시면 울기가 십상인 다정다감한 이웃들이다. 대남 방송을 들으며 자라나는 자식들을 걱정하더니, 그 아이들이 지금은 다 커서 마을을 이끌고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햇볕정책 속에서 안보의식이 어떠냐는 질문에 조용히 답하는 이장도 개척민 2세대이다.

마음 아파하면서도 돕지 못했던 ‘토지소유권’ 분쟁 문제는 차마 먼저 물어보지 못했다. 개척 당시 군 당국은 소유권 문제를 덮어둔 채 ‘개간해서 농사지어 먹어라’고 했고, 제대군인들은 ‘김일성에게서 되찾은 땅’에 목숨을 걸고 새 고향을 일구었다.

그런데 정착촌이 자리잡자 지주가 나타났고, 처음에 어쩌다 돌출한 소유권 분쟁은 쉬쉬하는 가운데 결국 마을을 벌집처럼 들쑤셔 놓았다.

나는 마침 독일통일 후의 통합과정을 추적하고 있던 터라, 한국의 사례라고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조사도 해 보았다. 소유권이 복잡하게 얽힌 독일의 경우, 처음에는 ‘법치의 원칙’ 대로 재판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소유권과 이용권을 분리하고 보상제도를 도입하는 현실적인 차선을 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정한 땅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였지만, 결국 사변적인 논리에 매몰되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교수라는 직업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절감하였다. 그 뒤로 나는 대마리를 가지 않았다. 아니 못 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에게 답사 노트를 내어주면서 학위 논문을 쓰게 하고도 끝내 그 아픔을 현장에서 함께 하지 못하였다. “개별적으로 해결했지요. 매입하기도 하고 소송에 패해 떠나기도 하고요. 그러나 지금은 어지간히 해결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 초로의 농부가 의외로 담담하게 설명한다.

주민들의 굳건한 정신과 함께 변함 없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은 뒤 켠의 백마고지 기념탑이다. 불과 보름 동안에 서로 수십만 발의 포탄을 퍼부으면서 고지의 주인을 스물네 번이나 바꾸다가 마침내 승전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다. 기념비는 백마고지를 잃어 강원도 쌀의 1/4을 생산하는 철원평야를 내주게 된 김일성이 사흘 동안 식음을 폐하고 애통해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진정 애통할 일은 고지의 높이를 1m 나 낮추도록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영혼들일 것이니, 저 한 많은 탑에 이런 비극이 다시 없기를 빌어보자.

대마리의 긴장은 이어진다. 쌀 개방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데 이 마을 소득의 80%는 미작에서 나온다. 진전된 기계화로 남아도는 인력을 수용할 방안을 찾느라고 마을 지도자들이 바쁘다.

군대 막사 같은 입주촌에서 삶을 일구어 온 농부의 자식들이라, 공장을 지어보거나, 운영해본 경험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사람들이 도에서 받은 새농어촌건설운동 상금을 밑천 삼아 성심 하나로 부품조립공장을 계획한단다. 그들이 평가받은 정신을 밑천으로 환경과 조화되는 소득증대를 위하여. 부디 잘 돼야 할텐데.

마을을 나서는 일행의 뒤통수에 대고 이장이 소리친다. “12월 31일에는 ‘두루미평화마을’을 선포합니다.” “그 때 못 오면, 내년 8월 30일 입주기념식에는 꼭 오겠습니다.” 내가 왜 또 이러지?

그러나 두루미는 보고 가야지. 사실 나는 ‘철새마을’이 풍기는 뉘앙스나 ‘안보관광’이라는 말의 모순에 대해 늘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도 이 청정 들판의 철새 구경은 결단코 빼어 놓을 수 없지. “여름에는 아무르 지나 레나-바이칼까지 가야 만날 친구들인 걸.” 양지리 토교 저수지에는 온갖 겨울 철새들이 섞여서 이쁜 짓이라고는 다한다.

오리, 독수리, 까마귀, 기러기, 그리고 이름 모를 잡새들까지 끼리끼리 모여 웅성거리고, 모이를 쪼다가 뒤뚱거리며 걷고, 혼자 빙글빙글 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괜히 따라 나르는 것들도 많다. 논둑으로 저공비행을 하다 연착륙하는 멋쟁이를 따라 부지런히 카메라를 움직이노라니, 나는 어떤 새일지가 궁금해진다. 설마하니 저기 양지바른데 앉아 조는 놈은 아니기를.

▲ 철원평야 샘통 근처 한가로이 노닐던 재두루미(천연기념물203호)들이 외부 침입자(?)들의 인기척에 놀라 날아 오르고 있다.

재두루미들이 한 수 높게 노는 샘통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물이 흐른다. 말 그대로 낙원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안온한 늪과 도랑을 싸고 푸나무가 우거졌는데, 포장하지 않은 길이 새삼 고맙다. 철새 조망대 계획을 선뜻 철회하고 주민의 자율적 보호 제의를 받아들인 것도 칭찬할만한 일이다. ‘달의 우물’만으로도 너무나 슬픈 월정리역에는 ‘달리고 싶은 철마’에 녹이 많이 슬었다.

그리고 간신히 찾아낸 철원역의 표지판은 억지 세월을 붙잡고 매달려 있다. 경의선을 연결한다고 법석인데 경원선은 여기까지라도 이어 놓으면 좋을 것을.

철새가 긴장하나? 불빛이 어지러운 동송과 신철원 시가지에 ‘한탄강댐 건설 반대’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다. 여기에도 새로운 긴장이 있구나. 하기야 젊은이들은 긴장을 즐기기 위해 래프팅을 한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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