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들은 통일한국의 소중한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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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0.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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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강철호 새터교회 목사


지난 5월 19일 서울 종로 한 커피숍에서 탈북민 출신의 강철호 목사(42)를 만났다. 그는 탈북민 같지 않았다. 말씨에서도 북한 억양을 찾을 수 없었다. 남한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난 그는 남한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남한 출신의 부인과 일곱 살 난 아들을 둔 어엿한 가장으로서 그는 성도가 120명에 달하는 새터감리교회(양천구 신정동) 담임목사로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김일성 우상화 반대로 온 가족 몰락

그의 가족은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로자로 인정을 받아 북한에서 잘 사는 계층에 속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당 교육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1971년경 북한 교과서에 실린 김일성과 김정일의 우상화와 관련된 거짓 글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이를 시정해달라는 요구를 중앙당에 올려 보냈다.

그러나 당은 즉각 할아버지를 반역자로 몰아 숙청하여 정치범수용소에 가두었고 온 가족은 함흥에서 외곽의 함주군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소위 반동가족으로 부모와 형 그리고 강 목사가 받은 고통과 멸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의 가정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무너져갔다. 아버지는 견디다 못해 ‘할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중앙당에 탄원서를 올렸지만 오히려 보위부에 붙들려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해야 했다. 울분을 못 견딘 아버지는 저항하며 보위부 건물에 불을 지르려다가 잡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악질 반동가족으로 낙인찍힌 그의 가족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까지 몰려갔다. 어머니는 그래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벽돌공장에서 가장 힘든 막일을 하며 견뎠다. 고등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형과 함께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면 당이 봐주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두 형제는 학교에서도 우수한 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대학 진학이 금지되었고 군대 입대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환경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마흔 일곱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때가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무렵이다. 어머니의 충격적인 죽음은 그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 사회에서는 더 이상 살 길이 없다. 미래를 꿈꿀 여지가 없다.” 강 목사는 이때 북한에 대한 모든 미련을 던져 버렸다.

이 무렵 그는 건설돌격대 대원으로서 각종 건설 현장에 강제 배치됐다. 당이 지시하는 대로 끝도 없는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주로 북부 오지지역의 건설 현장을 돌아다녔다. 철길공사, 도로공사, 주택공사, 발전소 공사 등에 동원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됐다. 닫혔던 의식이 환하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부터 중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중국으로 탈출을 계획했다. 2년 동안 국경의 지리조건과 경비 상황 등을 면밀히 관찰했다. 특히 양강도의 김정숙군 일대의 지역을 연구했다. 이곳은 압록강의 가장 상류지역으로 수심이 얕아 도강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북한을 탈출한 강 목사는 무조건 북쪽으로 걸었다. 나중에 확인됐지만 그곳은 중국 통하(通河) 지역, 장백산 기슭이었다. 높은 산악지대를 3일이나 헤매며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을 무렵, 그는 산에서 소를 방목하는 중국인 일행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다행히 조선족이 한 사람이 있어 그의 사정을 얘기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권유대로 산에서 약초와 산나물을 채취하고 산개구리 등을 잡아 시장에 팔았다. 그는 두 달을 열심히 일해 중국 돈 300원을 벌 수 있었다. 그로서는 거금이었다. 그 돈으로 그는 통하로 나올 수 있었다.

통하 시장에서 김치 장사를 하는 조선족 여인을 통해 심양에는 조선족과 한국인이 많으니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는 그 여자의 안내로 심양에 가게 되었다.

하루는 심양의 어느 아파트 바닥에서 잠들었는데, 새벽 무렵 누군가 그를 깨웠다. 때마침 새벽기도를 가던 한 할머니가 신음소리를 듣고 그에게 온 것이다. 할머니는 ‘추운 날씨에 이런 데서 자면 되겠느냐, 우리 교회로 같이 가자’고 했다. 교회에서는 먹을 것도 주고 잠잘 곳도 준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를 따라 간 곳이 바로 심양 서탑교회였다. 강 목사는 그곳에서 평생의 은인인 오애은 목사(서탑교회 설립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강 목사는 6개월을 서탑교회에 머물렀다. 낮에는 오 목사가 교회 안에 설립한 동북신학원에서 성경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성경을 배우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성경이 ‘김일성의 혁명노작’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경이 혁명노작을 베껴 쓴 것이라는 의심을 하고 “성경이 베낀 것 아니냐? 살아있는 김일성도 나를 못 지켜 주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지켜주느냐? 나를 바보취급 말라”고 대들었다.

이때 오 목사는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에 대해 들려주면서 김일성이 성경을 도용하여 혁명노작들을 조작했다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오 목사의 얘기를 듣고서야 그는 비로소 성경공부를 할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오사카 가는 도중 한국에 귀순


어느 날 오 목사는 “어떻게 하든 한국에 가라”고 그에게 말하며 그 길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연변 해양대학에서 3년을 공부하고 외항선원으로 취업해 한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 목사의 도움으로 그는 조선족 자격으로 당당히 해양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학이 생각대로 순조롭게 된 것은 아니다. 입학시험은 조선어 시험과 중국어 시험 두 가지였는데, 중국어 시험지를 놓고 한 자도 읽을 수 없어 당황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험 감독관이 등을 치며 시험 보는 시간에 잠자는 사람은 입학자격이 없다고 시험지를 빼앗아버리고는 그를 시험장에서 내쫓고 말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어서 무척 당황했지만, 한편에서는 너무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시험관을 찾아가 그가 잠잤던 것이 아니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시험관은 의외로 반가워하며 자신은 선교사 출신 교수라고 밝히고 ‘기도하는 줄은 몰랐다’고 미안해했다. 그리고는 중국어 시험과는 상관없이 그는 그를 입학시켜 주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는 1996년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그 다음 해 일본 오사카의 한 선박회사에 취업했다. 외항선원으로서 그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북경을 출발해 남한의 김포공항을 경유, 오사카로 가는 항공편을 타게 됐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경유지인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그는 즉각 남한에 귀순했다. 당시만 해도 탈북이 드문 일이었으므로 그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 후 그는 교회의 도움으로 결혼도 하고 감리교신학대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4년에 탈북민들을 위한 새터교회를 개척했고 꿈에도 그리던 형을 다시 남한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강 목사의 꿈은 탈북민들과 함께 북한 땅에 제1호 감리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강 목사는 “한국교회도 정부도 과거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변화해 탈북인들을 미래의 통일한국을 위한 소중한 인적 자원으로 인정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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