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재조명하는 6·25전쟁
기록으로 재조명하는 6·25전쟁
  • 미래한국
  • 승인 2010.06.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 속의 책 (Book in Book)] 6·25 60주년 <미래한국> 특별기획
▲ 중공군 포로모습


지금부터 60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북한공산군은 소련제 최신형탱크 T34-85 200대를 비롯한 150mm장거리포, 600대의 항공기와 함께 23만1,000명의 침략군이 한꺼번에 문산, 의정부, 춘천, 강릉에 걸친 38선의 전 전선을 밀고 내려왔다.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민족 살상을 위한 불법남침이었다. 북한은 이를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불렀다.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겨우 5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중 3년은 소련(북한)과 미군(남한)의 군정통치 아래 있었고 대한민국은 정부를 수립한 지 불과 1년 10개월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엉성했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 맞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정착을 위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총선거반대운동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장소요사태가 발생했으며, 제주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 명령을 받은 여수 순천 주둔의 국군 14연대는 제주도로 가는 대신 반란을 일으켰다.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소위 여수순천 반란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 세계 21개국이 모여들어


▲ 필리핀 참전부대. 오른쪽 위가 후에 대통령이 된 라모스
이런 혼란의 정국을 겪고 있던 그때 남한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탱크, 대포, 폭격기와 같은 최신공격무기를 갖춘 북한 공산군이 일시에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략했던 것이다.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새로운 독립국가를 설립하라는 유엔 결의에 반대하면서 38선 이북을 밀봉하여 따로 인민공화국을 세운 김일성 정부는 남한이 자유민주정치의 걸음마를 하는 동안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아 무력남침 준비를 착착 진행한 후 불시에 38선을 넘었다.

대한민국은 9만 명의 군대가 있었으나 소총도 다 갖추지 못했으며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사단급 이상의 군 기동연습을 미리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도무지 큰 전쟁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탱크를 앞세운 북한 침략군은 38선을 넘어 거침없이 서울을 점령했다. 2차 대전의 최신형 소제 무기로 무장된 북한군과 소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남한군과의 싸움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북한 침략군이 강했다. 세계에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달려와 국제전이 되고 뒤에 공산 중국군이 들어와 다시 전쟁이 확대되고 하는 동안 한반도는 두번 세번 밀고 밀리는 전쟁 과정을 치르게 되었다. 전국이 두번 세번 전쟁터가 되었다.

▲ 6.25 전쟁 인명 피해 현황
한국군 전사자 13만7,000명, 부상 45만700명, 미군 전사자 3만6,900명, 부상 9만2,100명을 포함한 총 300만 명에 이르는 피가 이 땅에 뿌려졌다. 이런 과정 속에서 세계전쟁사상 처음 보는 많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38선을 넘은 인민군 전차여단은 의정부축선을 밀고 들어와 6월 27일 저녁에는 이미 태릉 뒷산을 돌아 청량리 쪽에 진입했으며 3일 만인 28일 오전에는 미아리고개를 넘어 삼선교-서울대병원-창경원 길을 따라 중앙청으로 들이닥쳐 서울을 완전 점령했다. 전차가 거침없이 제 속도를 내면서 왔고 인민군 보병은 그 탱크바퀴를 따라 왔다.

보전포(步戰砲)항공기로 번개처럼 전격작전(Britzkrieg)을 구사했던 나치 독일도 1939년 9월 폴란드수도 바르샤바를 점령하는 데는 29일이나 걸렸고, 이듬해인 1940년 5월 10일 벨기에 국경을 넘어 프랑스를 공격한 독일 전차대도 6월 9일이 되어서야 파리를 점령했다. 독일군은 파리외곽 솜 강에서 파리까지 밀고 들어가는 데도 5일 걸렸다. 전쟁 3일 만에 수도를 뺏긴 전쟁은 없었다.

서울은 한 전쟁에서 적에게 두 번 짓밟힌 기록도 세웠다. 처음에는 6월 28일 북한 인민군에게,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전쟁에 불법적으로 뛰어든 중공군에 의해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1·4후퇴) 서울이 다시 침략 당했던 것이다.


역사상 가장 빠르고 강력한 유엔의 결의와 전쟁 참여


▲ 6.25 참전국 현황(전투부대 파견국)
북한은 남한이 먼저 북침을 했기 때문에 이를 보복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정의의 전쟁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국제연합은 뉴욕(유엔본부 소재)시간으로 6월 25일인 바로 그날 이 전쟁이 북한에 의한 ‘도발되지 않은 침략전쟁’(unprovoked war)임을 인식하고 즉각 유엔 안보리 결의 UNSC-82를 통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안보리는 결의를 통해 북한 침략군이 즉각 38선 이북으로 물러갈 것을 요구했다.

세계 역사상 이렇게 빠르게 국제기구가 움직인 일은 없었다. 북한군이 계속 밀고 내려오자 유엔 안보리는 27일 다시 UNSC-83결의를 하고 유엔 회원국의 대한민국 군사지원을 권고했다. 이 결의에 따라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콜롬비아, 캐나다,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남아공, 터키, 태국 등 16개국이 군대를 보내게 되었고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 인도, 덴마크 등 5개국이 병원선 파견 및 의료지원을 했다.

▲ 6.25 참전국 현황(의료지원 및 시설파견국)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도와 연합군이 된 나라는 12개국,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을 따라 연합국이 된 나라는 15개국, 베트남 전쟁 때 월남을 군사 지원한 우방국은 10개국이었다.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을 도운 우방국이 가장 많은 국제전이었다. 세계가 이 전쟁은 불법침략이며, 때문에 대한민국을 도와야 한다고 결의하고 또 실제 행동했던 것이다.

북한의 침략에 직접 가담한 나라는 소련과 공산 중국, 그리고 체코, 폴란드 등이 무기 및 의료지원을 했기 때문에 6·25전쟁은 남북한을 합하면 25개국 이상이 벌인 전쟁으로 세계전쟁사상 가장 많은 나라가 개입한 국제전쟁으로 기록되었다.


당시까지 가장 학력이 높았던 유엔군

▲ 6·25 참전용사의 현재 모습. 캐나다 참전용사가 브람튼에 있는 참전기념벽을 찾았다
역사상 군인의 학력 수준이 부쩍 올라가 있는 전쟁이 2차 대전이었다. 미국 군인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미국은 1929년 대공황이 찾아와 국가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을 때 산업에 대한 투자 대신 사람에 대한 투자를 함으로써 경제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전국에 중고등학교를 대거 설립하고 가난해서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던 아동들을 모두 취학시킴으로써 교육 붐을 일으켜 교육산업을 중심으로 산업회복을 해 갔다. 대공황으로 취학한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쯤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했다.

태평양전쟁에 참여했던 한 일본군 사령관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은 소학교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미군은 고등학교 졸업자들이었다. 소학교 출신과 고등학교 출신의 싸움인데 누가 누구를 이길 것인가는 뻔한 일이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2차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GI(군인)빌이라는 법을 만들어 제대군인들을 대거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등록금과 주택보조금을 지급했다. 미국의 교육수준이 고졸에서 대졸로 높아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났을 때 한국에 징집돼온 군인들의 학력은 거의 대학생이거나 대졸자들이었다. 이중에는 하버드대생도 많았는데 그중 17명의 하버드맨이 전사했다.

미국의 명문대치고 한국전에 군인을 보내지 않은 학교는 거의 없었다. 다른 참전국들도 우수한 군인들을 선발해 한국전에 보냈다. 태국은 왕궁근위대 2개 대대를 한국전에 파견했다. 한국군의 평균 학력은 초등학교 수준이 되지 못했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부대에서 한글공부를 시켰다.


첫 연대장전사자는 미 34연대장 마틴 대령

유엔군 총사령관이 되어 한국 방어의 책임을 맡게 된 맥아더 원수는 6월 28일부터 미 공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인민군 남침부대를 공격하게 하는 한편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를 특공대로 뽑아 오산지구(쑥고개)까지 끌어올려 인민군 선발부대와 첫 전투를 벌이게 했다. 미 24사단의 다른 부대들도 전투에 속속 투입됐다. 그러나 인민군을 효율적으로 저지할 수는 없었다.

▲ 말년을 쓸쓸히 보내면서도 6·25 참전에 대한 자부심으로 사는 콜롬비아 참전용사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천안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34연대장을 경질했으나 새로 부임한 로버트 마틴(Robert Martin) 대령은 7월 7일 조치원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어 딘 사단장 자신도 대전 방어를 하다가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 한국군 연대장으로서는 국군 1사단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6·25 당일 후퇴하다가 머리를 다쳐 후송된 후 뒤에 포항 전투에서 전사해 전사한 첫 연대장이 되었다. 첫 군목 희생자는 미 24사단 19연대 군목 허만 펠헬터(Herman G. Felhoelter)로 부상병을 돌보면서 후퇴하지 않고 있다가 7월 14일 인민군에 잡혀 현장에서 학살됐다.


가장 희생이 큰 부대들

6월 25일 아침 개성(당시 한국지역)-문산에 배치된 국군 1사단, 포천-의정부 지역의 국군7사단, 춘천지역의 국군 6사단, 그리고 강릉의 국군 8사단 중 심한 타격을 입지 않은 부대는 없었다. 전차부대를 막을 무기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유엔군이 들어와서도 처음에는 비슷한 상황이어서 심하게 얻어맞았다. 한국전쟁에 가장 먼저 들어온 미 24사단이 비슷하게 당했다.

최선발전투부대인 스미스부대(미 24사단 21연대 1대대)는 오산 죽미령고개에서 540명 중 150명을 현장에서 잃었다. 24사단 병력이 속속 들어와 19, 21, 34의 3개 연대는 죽미령전투에 이어 평택-안성-조치원-천안-대전 방어전투를 하는 동안 사단장, 연대장, 연대참모장 등을 잃고 전투병 4,000명 중 1,150명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렀다. 뒤에 중공군개입시인 운산전투에서 미 1기병사단이 1개 대대를 완전히 중공군에 의해 섬멸당한 일, 그리고 청천강지역의 군우리 전투에서 미 2사단의 1개 연대가 협곡에서 인디언태형(indian gauntlet)전술로 비참하게 사살당한 것 등이 미군부대의 처참한 희생들이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제5차 공세에서 중공군 63병단의 187, 188, 189 3개 사단이 임진강을 건너 영군군 29여단과 부딪쳤을 때 6대 1의 인해전술 때문에 영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 특히 좌측선을 지키던 글로체스터대대는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죽음을 불사하는 방어력은 결국 중공군의 서울 재진입을 저지하는 빛나는 공헌을 했다.

영국군 29여단이 큰 희생을 입자 애틀리에 영국 총리는 동경으로 날아와 맥아더에게 “영국군을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 영국군 출신을 유엔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한국전쟁의 최 일선에 나간 장군의 아들들

▲ 이디오피아군 지휘관과 함께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
6·25전쟁에는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을 비롯해 미군 장군의 아들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이들 중 35명이 전사를 하거나 심한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미국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John Eisenhower) 육군중령, 미 8군사령관 워커 육군중장의 아들 샘(Sam Sims Walker) 육군대위,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육군대장의 아들 빌(Mark Bill) 육군대위,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육군중장의 아들인 밴플리트 2세(James A. Van Fleet, Jr) 공군중위, 미 해병비행단장 해리스 해병소장의 아들 해리스 해병소령이 포함되어 있다.

1948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공군을 선택했던 밴플리트 2세는 6·25전쟁 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북한지역에 대한 야간 폭격 임무 수행 중 전사했고, 미 해병1사단 7연대 3대대장이었던 해리스 소령은 장진호 철수작전 중 전사하였다.

전쟁 중 미 해군참모총장 셔먼(Forrest Sherman) 제독이 순직했고 워커 미 8군사령관의 교통사고로 사망, 무어(Bryant E. Moore) 미 9군단장의 헬리콥터 사고에 의한 사망, 그리고 미 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포로 되는 등 장군들의 희생도 컸다.


한국군 고급지휘관들의 희생과 중공. 북한 고급지휘관 전사

한국군도 부자(父子), 장인(丈人)과 사위(胥), 그리고 형제가 같이 전쟁에 참전하여 희생된 경우도 있었다.

▲ 벨기에 참전기념 행사에 참석한 백선엽 장군
부자(父子)간은 전쟁 초기 3사단장인 유승열 장군(육군소장 예편)과 7사단장인 유재흥 장군(육군중장 예편) 부자, 전쟁 초기 청년방위대 수도서울고문단장인 안병범 대령(육군준장 추서)과 안광수 대령(육군준장 예편), 개전 초기 수도사단장과 3사단장을 역임할 때 학도병들의 영웅이었던 김석원 장군(육군소장 예편)과 김영수 소령 등의 부자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장인과 사위 관계로는 전쟁 초기 5사단장인 이응준 장군(육군중장 예편)과 전쟁 초기 2사단장인 이형근 장군(육군대장 예편),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육군중장 추서)과 백홍석 대령(육군소장 예편), 형제로는 전쟁 초기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육군대장 예편)과 17연대장인 백인엽 장군(육군중장 예편), 이형근 장군과 이상근 대령(육군준장 추서)이 있다.

전쟁 중 전사한 장군으로는 총참모장을 지낸 채병덕 육군소장을 포함하여 1군단장 김백일 육군소장, 이용문 육군준장(육군소장 추서), 박범집 공군준장이 있다. 또 대령에서 전사하여 준장(准將)으로 추서(追敍)된 장군으로는 개전 초기 창동전선에서 7사단 1연대장이었던 함준호 육군대령을 비롯하여 김현수 육군대령, 이형근 장군의 동생인 이상근 육군대령, 권태순 육군대령, 박노규 육군대령, 안병범 육군대령, 김용배 육군대령, 전성호 육군대령, 권동찬 육군대령, 이근석 공군대령 등이 연대장 직책을 수행하다가 전사하거나 순직하였다.

중공군에서는 모택동의 아들인 모안영이 1950년 11월 25일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전사했다. 북한군에서는 남침공격계획을 소련군 군사고문단과 함께 수립했고 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부 총참모장으로 나왔던 강 건이 1950년 9월 8일 낙동강 전선에서 지뢰 폭발로 사망하였고, 전선사령부 사령관 김책은 1951년 1월 31일 사망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최초의 대(?) 전차전

▲ 6.25 전쟁 당시 남북 군사력 비교
낙동강 방어선은 대한민국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은 국토의 5%밖에 안 남은 대구-부산지역의 공략에 총공세를 했다. 그 중 가장 심한 곳이 국군 1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다부동지역이었다. 이곳은 바로 대구의 북쪽 관문에 해당됐기 때문에 피아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한은 이곳에 T-34전차를 집중해 돌파하고자 했다.

미 8군은 증강된 미 27연대를 증원해 대 전차전을 벌이게 했다. 미 27연대는 천평동에서 진목동 간의 4㎞의 직선도로인 이 지역을 볼링 앨리(Bowling Alley : 볼링 계곡)라고 불렀다. 볼링 앨리라는 명칭은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전차와 대포가 쏜 포탄들이 이 계곡의 산등성이에서 작렬하는 소리가 마치 볼링장에서 볼링 핀이 쓰러질 때 나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 전투는 북한군 전차가 집단으로 아군에 저항하며 싸웠던 마지막 전투였다.


최고로 많은 마대로 쌓아올린 벙커(Bunker) 고지 전투

1951년 5월 중공군 춘계공세시 미 2사단 38연대 K중대는 홍천 북방 800고지에서 중공군과의 전투를 위해 23만7,000개의 모래주머니와 철조망 385롤(roll)을 이용하여 철옹성과 같은 강력한 벙커진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연유로 800고지는 벙커고지로 명명되었고, 벙커고지에서 미 2사단은 견고한 방어시설을 최대한 이용해 중공군의 끈질긴 공격을 물리치고, 이 고지를 사수함으로써 현리 지구의 적 돌파구가 서측으로 확대되어 유엔군 전선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가장 치열했던 고지전투인 백마고지전투

백마고지(白馬高地 : White Horse) 전투는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다. 백마고지(395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9사단이 중공군 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 동안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 전투 결과 중공군은 8,234명이 사살되고 추정살상 6,098명과 포로 57명 등 1만4,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9사단도 3,4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작전 기간 중 피아간에 중공군이 5만5,000발, 아군이 21만9,954발의 포탄을 발사함으로써 총 27만4,954발이라는 막대한 양의 포격이 이 작은 고지에 집중됐다. 유엔군의 항공기도 754회나 출격해 폭격을 가함으로써 고지 정상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이처럼 피아간의 극심한 폭격과 포격으로 고지의 수목이 모두 없어져 하얗게 된 민둥산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불렀다.


대학살(massacre)의 시작은 서울대병원에서

대학살은 무장행위를 하지 않은 다수의 사람을 사상, 종교,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집단 처형하는 것을 말한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이런 범위를 전범재판을 통해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한 대학살은 서울대병원에서 시작되었다. 서울대병원은 평소에도 병실이 남지 않을 만큼 환자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국군이 후송되어 28일 아침까지 약 150명의 국군부상병환자가 침상 또는 병원바닥에 자리를 잡고 치료를 받고 있었다. 서울대병원에 채 수용되지 못한 부상병은 서대문의 적십자병원으로 이송되어갔다.

6월 28일 오전 10시경 인민군이 서울대병원에 들이닥쳐 부상치료 중인 국군을 모두 끌어내서 다발총으로 사살하고 다른 많은 민간인 환자도 함께 사살했다. 시체는 병원 담벼락에 총살한 채로 쌓아두기도 했고 본관 건물의 내부 정원에 시체를 던져 정원이 시체더미로 꽉 쌓이게 되었다. 적십자병원에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서울대병원의 300구 이상 되는 시체들은 휴전될 때까지 제대로 치우지 못한 채 방치돼 이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의 코를 들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냄새를 냈다. 현재 서울의대 본관 정원에는 이름 모를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인민군의 두 번째 학살은 28일 오후 한강다리가 끊어져 건너지 못한 시민들이 서빙고 앞으로 몰려와 나룻배나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것을 본 인민군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마구 사살하여 수백 명이 죽었다. 이런 대량 살상 행위는 인민군이 남침할 때 또는 유엔군에 밀려 북한으로 후퇴할 때 계속하여 저질러졌다.


20억장의 선전삐라 뿌려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심리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극동군 사령부에 설치되어 있던 심리전기구의 인원을 6명에서 35명으로 대거 확충하여 3년 전쟁 동안 삐라, 확성기를 통한 직접 방송, 기타 심리전작전을 강화했다.

유엔군 사령부는 전쟁 기간 동안 20억장의 삐라를 북한 상공 또는 북한군 점령지에 뿌렸다. 마이크를 동원한 선전방송도 했다. 특히 선전방송은 수복지구에 들어가 실시하기도 했는데 주민을 신속하게 안정시키고 사회질서를 바로 잡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유엔군 사령부는 이런 삐라 살포를 비롯한 심리전으로 10만 명의 북한인민군 또는 중공군 투항자를 유도했다고 분석했다. 삐라는 주로 B29, C45, C54등의 폭격기 수송기로 뿌렸으며 105mm포탄 속에 넣어 적진으로 쏘기도 했다.


131명에게 美최고훈장

▲ 1951년 폐허가 된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포즈를 취한 필리핀 군인들. 뒤쪽으로 중앙청 건물이 보인다.
미국은 군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훨씬 넘어서서 용기와 기지를 갖고 특별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대통령최고훈장(Medal of Honour)를 수여하고, 그 다음으로 특별서비스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을 수여하는 데 한국전쟁에서는 총 131개의 미최고훈장이 수여되었다.

그중 70%는 사후에 수여되었고오직 37명만 살아서 이 훈장을 받았다. 일등병이 가장 많고 일등병 하사를 포함한 사병이 전체 수여자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장군으로서는 대전전투에서 스스로 바주카 對전차포를 들고 나와 북한탱크를 공격하다가 포로가 된 미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에게 수여된 것이 유일하다. 부대별로는 장진호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른 미1해병사단으로 이 전투에서 8개의 대훈장이 수여됐다.
한국도 유엔군사령부소속이었기 때문에 은성훈장을 받은 군인은 다수 있었다. 한국정부에서 주는 전쟁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은 6·25전쟁 중 약 80여명에게 수여되었다. 대부분 사단장급의 장군들이 받았고 사병 신분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은 2명밖에 없다. #


글·정일화 한미안보연구회 이사·정치학 박사·미래한국 2기 편집위원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역사학 박사
사진·조수봉 사진작가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