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북한 땅에도 신앙의 씨앗이…
어둠의 북한 땅에도 신앙의 씨앗이…
  • 미래한국
  • 승인 2010.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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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지방선거일인 지난 6월 2일 서울 역삼동 한 교회에서 남한에 온 지 13년이 된다는 탈북민 할머니를 만났다. 북한에서 태어나 탈북할 때까지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강소영 씨(가명·71). 강 씨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평안남도의 대표적 교회인 P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그러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10년이 넘도록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평안도에서 대대로 살아온 강 씨 집안은 전통적인 기독교 가정이었다. 일제시대에 P교회가 개척될 무렵 증조할아버지가 처음 입교하면서부터 신앙을 지켜왔다고 한다. 강 씨가 어린 시절 아버지는 P교회의 수석장로였고 목수로서 집을 설계하고 건축해 꽤나 유명했다. 당시 돈도 잘 벌어 형편이 넉넉했던 터라 강 씨 아버지는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활동을 주시해온 일본 형사가 아버지를 3·1운동 때 잡아갔지만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도 있었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1947년 아버지는 먼저 서울로 갔고 이후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 후 들은 얘기에 의하면 아버지는 월남해 영락교회에 적을 두고 교회 교육관 건립에 참여했고 어느 고등학교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다가 30년 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고 온 가족을 그리며 재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는 폐쇄됐으나 늘 가정예배 드려

아버지는 비록 월남했지만, 북한에서는 아버지가 김형직(김일성 아버지)과 함께 한 항일운동의 행적을 밝혀내고는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의 사적을 연구할 때마다 아버지가 많은 군자금을 독립군에 보낸 사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덕에 월남 가족으로 분류돼 추방됐던 강 씨 가정은 원상회복이 됐고 숙청을 면했다.

강 씨 어머니도 아버지처럼 모태신앙을 가진 분이었다. 아버지가 월남한 후 할아버지를 모시고 2남 4녀의 자녀를 데리고 살았다. 온 가족이 출석했던 교회는 1947년 폐쇄됐고 당시 담임목사는 교회와 함께 죽겠다고 월남하지 않고 끝까지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했다. 공산 정권 초기에는 통제가 심하지 않아 구역별로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점차 통제가 심해지면서 모든 예배가 사라졌다.

그 후 강 씨 어머니는 가정예배에 치중했으며 기도드릴 때 늘 세 가지를 간구했다. “첫째 교회가 다시 문을 열게 해 달라. 둘째 남한으로 간 남편과 기독교인들이 돌아오게 해 달라. 셋째 자녀들이 믿음을 끝까지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기도를 드렸는데, 자녀들이 모두 시집 장가를 가고 막내딸인 강 씨만 남을 때까지도 어머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벽기도를 드렸다. 그래서 막내인 강 씨는 지금도 소곤거리는 어머니의 기도가 들려오는 것 같다고 했다. 강 씨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우리 가문은 기독교 가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강 씨 어머니가 좋아한 찬송가는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과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등이었다. 특히 455장 찬송가는 늘 4절까지 부르곤 했고 자녀들도 모두 가사를 외웠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몇 번에 걸친 보위부의 가택 수색으로 성경과 찬송은 집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예배 때에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워 성경 말씀을 대신했고 가사를 암송할 수 있는 찬송만 부를 수 밖에 없었다.

1973년 강 씨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북한은 선천 지역을 중심으로 곳곳에 숨어 있던 기독교인들을 색출해 처형함으로써 북한에서 기독교인은 정말 씨가 말랐다고 할 지경이 됐다. 하지만 저마다 마음 속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없애지 못했다.


어머니가 지하교회 예배 인도


1963년에 강 씨 할머니는 세 살 연상의 남편(현재 73세)과 결혼했다. 당시 남편은 의사였다. 하지만 믿음이 없었다. 의사로서 당원이 되어야 했지만 아내가 기독교 월남 가정 출신이므로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노동당은 차라리 이혼하라고 남편에게 요구했고 남편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장모가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강 씨는 염려하지 말고 이혼하자고 했지만 남편은 끝까지 가정을 보전했다.

어느 날 남편이 진료소에 걸려 있는 김일성 사진 액자를 닦다가 실수로 떨어뜨려 박살을 내고 말았다. 큰일을 저질렀다.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갈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때 남편은 위급할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라는 장모의 말이 떠올라 마음으로 급히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이날 곧바로 병원 책임자에게 보고된 이 사건은 갑자기 도검열대에서 내려온 검열에 관한 시달로 처리가 연기되었다. 유일사상체계를 위반한 문제는 3일 안에 처리해야 하며 만약 시간을 넘기면 책임자도 처벌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병원의 도검열 문제로 강 씨 남편의 사건은 3일을 넘기고 말았고 병원 책임자는 자신도 처벌받아야 될 입장이 되었으므로 그 일은 없던 일로 처리하고 말아 남편은 기사회생했다. 이후로 남편은 신앙을 갖게 되었다. 장모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믿겠다고 신앙을 고백했다.

이 사건 이후에 조상 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그루터기 신앙의 자녀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불과 5가정이지만 그 믿음의 뿌리는 강했다. 이들은 모두 P교회 출신의 가정이었다. 주로 김일성과 김정일 생일과 같은 북한의 명절날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조용히 찬송을 드리고 주기도문을 외우고 기도를 드렸다. 이날 부른 찬송은 김일성 찬가와 함께 드려졌다. 찬송가와 비슷한 곡조의 ‘김일성 찬가’를 부르며 사실은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411장)’ 등의 찬송가를 불렀다. 그리고 때로는 남한에서 들려오는 기독교방송(극동방송)의 설교를 함께 듣기도 했다.

또 집집마다 기독교 신앙 전통을 지켜가려고 믿음의 사위, 믿음의 며느리를 찾기 위해 서로 정보를 나누었으며 어려운 일에는 서로 돕는 손길이 되기도 했다. 비록 매주 드려지는 예배는 아니지만 1년에 몇 차례라도 서로 믿음 안에서 안부를 묻고 위로하는 일이야말로 더 없이 기쁘고 즐거웠다고 강 씨는 전했다.

1995년경부터 북한의 식량 사정이 악화돼 갑자기 아사자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강 씨는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가산도 다 팔아먹고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가야겠구나’하고 생각하자,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남한에 내려간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죽기 전에 꼭 알고 싶다는 생각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려 주세요.”


탈북 길에 체험한 놀라운 기적

놀랍게도 기도를 드린 지 한 달 후에 탈북의 길이 열렸다. 신의주의 신도섬을 통과하여 단동으로 들어가는 탈북 경로가 열린 것이다. 신도섬은 갈대가 우거진 섬으로 유명한데, 갈대들은 방직공장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또 신도섬에서는 고기잡이가 성행했고 단동과 밀수 거래가 많이 이루어졌다. 때마침 함경북도 신포로 갈 예정이었던 같은 아파트의 사람이 사정이 생겨 여행을 포기했다며 아까우니 여행허가증을 사용하라며 강 씨에게 주었다.

여행허가증에 기재된 여행 목적지를 ‘신포’에서 ‘신도’로 바꾸면 단동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얼른 들었다. 곧바로 남편과 상의하고 또 아들과도 상의했다. 모두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첫딸은 시집을 갔으니 상관없고 다만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는 막내딸이 마음에 걸렸지만 늘 하나님을 믿고 강한 성품을 가졌으니 염려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장사가 잘 되잖아요. 염려하지 말고 떠나세요’ 막내딸은 강 씨의 등을 밀었다.

남편과 아들 그리고 강 씨는 신의주에서 신도섬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기로 했다. 그런데 경비원이 일일이 여행허가증을 확인하고 있었다. 강 씨는 가짜여행증이 탄로가 날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들도 떨며 엄마가 앞장서라고 해서 강 씨가 여행증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려울 때 기도하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서 강 씨는 무조건 기도했다. 여행증을 경비원에게 넘겨주고 경비원이 그것을 살펴보는 순간, 갑자기 상관이 배 위에서 “뭘 해. 빨리 들여보내라. 늦었잖아”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경비원은 여행증을 급히 넘겨주며 ‘빨리 들어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강 씨 가족은 배를 탈 수 있었다. 

신도섬에 도착했지만 중국에 가는 무역선을 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섬을 가로질러 선착장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선착장으로 가는 길은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었다. 발이 빠지며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초소 위에서 이 광경을 보던 경비병이 이상하게 여기고 강 씨와 남편과 아들을 초소로 불러들였다. 아들은 구리 그릇을 보여주며 쌀을 바꾸려고 왔다며 그에게 설명했다. 마침 아들은 새로 나온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는데 경비원은 그것이 맘에 든다며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아들은 “그럼, 이 배지를 잘 모시세요” 하며 넘겨주었다. 그 경비병은 “그럼, 한 번 용서해 주겠다”며 그들을 선착장까지 안내해 주었다.

당시 단동을 오가는 무역선은 북한 장사꾼들이 주로 사용했고 북한 당국도 어느 정도 용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역선 활동에 문제가 있다며 모두 본국으로 불러들였고 당시에는 딱 한 대가 운항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그 날이 마지막 날이었다. 강 씨 남편은 배 안에서 조선족 상인을 만나 거래를 했다. 갖고 있는 구리그릇을 다 줄 터이니 단동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 상인은 그렇게 하겠다며 새벽 2시쯤 뱃전에 오면 작은 배를 준비해놓겠다고 했다. 그날 밤 비가 쏟아졌다. 배를 탈출해 쪽배로 단동으로 숨어들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강 위로는 서치라이트들이 비치고 있었다. 자칫 발각되면 끝장이었다. 강 씨는 배를 옮겨 타자마자 곧바로 엎드려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강 씨 가족은 단동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들은 공항에서 체포되어 북송 당해

그들은 연변 지역에 있는 친척 집으로 가서 한국 선교사를 만났다. 한국 선교사와 두 달간 함께 머물며 한국에 들어오기 위한 준비를 했다. 탈출 경로로 상해를 선택했다. 상해공항을 통과하는 것이 쉽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때마침 황장엽의 한국 망명사건이 일어나 상해공항의 경비가 몹시 삼엄했다.

강 씨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출국장 안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잡히더라도 한꺼번에 잡히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공항 출국장에서 강 씨는 남편을 만날 수 있었지만 아들은 만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아들은 중국 공안의 심문에 걸려 북송되고 말았다. 3년 전 북한의 막내딸로부터 온 소식에 의하면 아들은 북송된 후 많은 고문을 받았고 현재는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가 생사를 알 수 없는 처지가 됐다고 했다.

강 씨와 남편은 상해에서 홍콩을 거쳐 서울로 무사히 올 수 있었다. 이때가 1997년경이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시집 간 첫째 딸이 몇 년 전에 손녀와 함께 무사히 서울에 들어온 것이다. 강 씨 가족은 현재 잠실에 있는 한 장로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아들을 생각하며 기도 가운데 위로받으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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